밀란 쿤데라, 미셸 투르니에, 수잔 손탁, 헤르타 뮐러 등 46인의 세계적인 작가가 들려주는 책 속의 책, 책 속의 그림 이야기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책들의 신’이 주는 은총으로 신비로운 이 책이 나에게 날아왔다. 초저녁이었다. 나는 마그리트의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처럼 놀라움 속에서 그림들을 보았고 단숨에 글들을 끝까지 읽어나갔다. – 최승호/시인
밀란 쿤데라, 미셸 투르니에, 체스 노터봄, 헤르타 뮐러 등 46인의 세계적인 작가들이 전하는 책 속의 책, 책 속의 그림 이야기
타자기, 찻잔, 넓은 수평선. 크빈트 부흐홀츠의 나라는 외롭고 아름답다. 그곳은 시적인 독특함으로 가득 차 앉아서 찾고 기다리고 방황하는――거의 언제나 혼자인――조용한 인간의 나라이다. 그곳은 경쾌하게 펄럭이거나 신비스럽고 매혹적으로 장면들이 모여 있는 책들의 나라이다. 펼쳐진 채, 또 접힌 채, 매우 높이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로 겹겹이 쌓인 책의 나라. 46명의 유명한 작가들이 그의 그림에 대한 간략한 이야기를 썼다.(슈피겔, 97. 3. 31.)
46명의 세계적인 작가들의 글과,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들이 어우러져 \”책과 관련된 모티브들을 소재로 한 책\”이 나왔다. 이 책에 나오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작품 대부분은 책과 관련된 그림들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책의 역사, 책의 탄생의 역사를 드러내는 그림들이다.
첫 기획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크빈트 부흐홀츠는 어느 날 출판사에 자신이 그동안 작업한 표지화와 삽화들을 모아 가져왔다.(한국 독자들에게는 『소피의 세계』(한국판) 표지화로 친숙하다.)
대부분의 그림들이 책들의 비밀스러운 생애를 드러내는 독특한 작품들이었다. 뮌헨의 출판업자 미하엘 크뤼거는 이 그림들을 전 세계의 46명의 작가들에게 보내어 감상을 써달라고 했다. 그 그림 속에 들어 있는 내용에 대해 한 자 적어달라는 부탁도 함께 했다. 그리고 모두 동참하여 글을 보내왔고, 이 책이 태어났다. 이 책은 글쓰기와 읽기에 대해 많은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두 개의 책표지 사이에서만 들을 수 있는 옛날 이야기를 옛날 방식대로 들려주는 한 위대한 책 예술가를 위한 기념비적인 작품\”(서문에서)이다.
이렇게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에 자신의 글을 덧붙인 이들 중에는 세계적인 작가들이 즐비하다. 밀란 쿤데라·미셸 투르니에·아모스 오즈·오르한 파묵·체스 노터봄·수잔 손탁·요슈타인 가아더·존 버거·마르틴 발저 등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독자의 사랑을 받아온 작가들이다. 부흐홀츠의 그림에 대한 자유로운 감상문이라 할 수 있는 46편의 짤막한 글들에서 현대인의 삶을 진단하고 있는 작가들 46명의 다양한 개성을 읽어낼 수 있다.
1957년생인 크빈트 부흐홀츠가 이 그림을 그릴 당시는 마흔을 갓 넘긴 상태였다. 그런데도 세계적인 작가들은 이 화가에게 자신의 글을 내주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그림들이 지니는 독특한 매력에 매료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들은 \”사회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든가 고정관념으로부터의 해방과 같은 주제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나지막하게 동화를 들려주는 듯한 목소리로 호소하고 있다.\” 즉 \”글쓰기와 글읽기에 얽힌 내밀한 심리 묘사\”로부터 \”현대 문명의 절박한 위기 상황\”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영역을 절제된 목소리로 전달한다. 그런데 그 절제된 메시지는 오히려 더 명료한 울림으로 전달된다.
또한 부흐홀츠는 \”일상화된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미 길들여져 있는 감각의 관행을 거부하고 뒤집는다.\” 하늘 위에 책이 떠 있고, 사다리를 타고 책 위로 올라가 하늘을 바라보며, 책을 타고 하늘을 날아간다. 표범이 책을 물고 전깃줄 위를 걸어가고, 독서하는 여인이 의자와 함께 공중에 떠 있다. 바다 한가운데의 보트 위에서 한 남자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다. 안테나의 예리한 끝이 책을 꿰뚫고 있다. 문명의 상징인 전깃줄과 자연의 상징인 표범, 정보와 실용성의 상징인 안테나와 자유의 공간인 책이 서로 어울린다.
일상적인 감각의 관행을 뒤집고 문명과 자연을 대립시켜 형상화하는 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 요컨대 \”사회적 억압이란 것이 없다면 글쓰기와 책읽기라는 자유의 공간은 어떻게 성립할 것인가?\” 작가들은 \’억압\’과 \’자유\’의 두 영역 사이에 처하고 있는 작가의 그러한 딜레마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부흐홀츠의 그림을 해석하고 있는 작가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대 문명이 처한 질곡의 깊이와 그 언저리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인간들의 몸짓을 목격하게 된다.\”
궁극적으로 『책그림책 』에는 작가들이 흔히 작품을 통해서 의무적으로 강요하는 절박한 메시지는 없다. 대신 절제된 메시지만 있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무언가를 가르쳐야겠다는 의무감을 지닌 새장 속의 예술가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독자는 그림과 글이 보여주는 느낌의 스펙트럼을 통하여 작가에 의해 사육된 독자가 아닌, 야생의 새 같은 독자로 되태어날 것이다.
그림과 글 인용:
라인하르트 레타우의 글, 책을 타고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12쪽)무엇 때문에 나는 책과 함께 멀리 대기 속을 날아왔는가?여기는 서늘하고 조용하다. 어떤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다.다리[足] 아래 책을 달고 날아가면결코 혼자가 아니다!
마르틴 모제바흐 글, 저물녘 하늘을 날아가는 침대 위의 어머니와 아이.(36쪽)\”아니야! 활자들은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날아가는 거야—그리고 우리도 날아가고 있는 거지! 땅은 저 아래쪽으로 가라앉고 있어. 벌써 밤이야. 하지만 우리들에게 책이 있으면 아직 아름다운 빛이 있는 셈이야. 파랗게 빛나는 등불 말이야. 그 빛은 그렇게 영원히 계속될 거야!\”
마하비에르 토메오 글, 집 정원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여인.(38쪽) 우선은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시(詩)의 정신과 아름다움이 책을 읽고 있는 노파를 저 예속 상태, 즉 모든 인간에게 있어서 지구 인력을 의미하는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노라고. 이 경우에는 물론 독서 삼매에 빠진 여성의 정신만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몸도 그리고 그 몸의 연장인 잔 속의 차도 함께 떠 있는 것이다.
마르크 퍼티 글, 산더미처럼 책을 쌓아놓고 읽는 중년 남자.(46쪽) 우리가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책들은 더 두꺼워진다. 요지부동이다. 의미가 완전히 텅 빈 궁극의 책은 우리가 블랙홀이라고 부르는 별들—이 별들은 너무나 밀도가 높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어서 골무 속에 그 전체가 다 들어갈 수 있다—처럼 그 자체 내에서 붕괴된다.
코레이거선 보일 글, 책을 비집고 혀가 쏙 고개를 내밀고 있다.(61쪽) 책은 그저 순식간에 떠올랐고, 깊이를 알 수 없는 우주적인 의식의 바다로부터 마치 마술처럼 나타났다. 그런데 그 순간 너무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책이 움직였고 스스로의 힘으로 책장들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의 한가운데에서 촉촉하게 습기에 젖은 장밋빛의 혀가, 말을 하는 생명체의 혀가 서서히 나타났다.
마틴 R. 딘 글, 침대에 엎드려 있는 반라의 여인.(64쪽)신사 양반, 그대가 아무리 안개 자욱한 세기로부터 온다 하더라도, 그 어떤 신발을 신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 어떤 눈길로써 촛불을 끄고 벽에 걸린 거울을 뿌옇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 어떤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농염하고 거들먹거리며 활짝 꽃 피어난 문장들을 가지고 나의 아침 꿈을 찾아온다 하더라도, 그대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손댄 흔적은 결코 뒤바뀔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렉산드르 치마 글, 책이 내는 음향을 엿듣는 사람.(89쪽)그는 그 책들로부터 어떠한 음향도 어떠한 목소리도 듣지 않고 오직 침묵만을 듣는다. 그러나 이 침묵은 인간들 사이의 상호소통 결핍에 대한 그의 거부에 상응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서로 욕설을 퍼붓고 죄를 뒤집어씌우는 일에만 야단법석이며, 상호이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러나 이 책들, 이 커다랗고 두꺼운 이해의 서고(書庫)는 그 완벽한 침묵에 의해 인간의 거부하는 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수잔 손탁 글, 책을 덮고 자는 아이.(90쪽)독자 여러분이 보듯이 나는 모든 것으로부터 떠나 있다. 심지어는 나를 덮고 있는 책으로부터도. 위에는 책이 있고, 아래에는 땅이 있다. 내가 나의 책에 대해 무슨 꿈을 꾼다할지라도 다시 깨어난 후에 그것을 거의 기억하지 못하리라. 나는 대지의 심장박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프리트마르 아펠 글, 배에 책을 가득 싣고 떠나는 사람.(117쪽)책이며 그림이며, 바이올린과 칼은 알아주는 이 없으면 죽은 물건이니까. 잘 간직하라. 우리 앞에는 결코 없었던 그것을.
그린이:
크빈트 부흐홀츠는 1957년 슈톨베르크에서 태어나 뮌헨의 오토브룬에 살고 있다. 그는 시적이고 상상력이 가득 찬 표지 그림으로 많은 책들이 독자에게 가는 길을 밝혀주었다. 예술사를 공부한 다음 1982년~1986년까지 뮌헨 조형예술대학 아카데미에서 그래픽과 그림을 전공했다. 1988년 이후 그는 많은 책의 삽화를 그렸고 또 자신의 분야에서 많은 상을 받으며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푸이미니의 『마티와 할아버지』(1994),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네로 코를레오네』(1995)의 삽화를 그렸고 최근에 그림책 『순간의 수집가』(1997)로 라가치 상을 받았다.
글쓴이:
밀란 쿤데라·미셸 투르니에·아모스 오즈·오르한 파묵·체스 노터봄·수잔 손탁·요슈타인 가아더·존 버거·마르틴 발저·헤어베르트 아흐터른부쉬·프리트마르 아펠·T. 코레이거선 보일·한스 크리스토프 부흐·알도 부치·이조 카마르틴·마틴 R. 딘.·페르 올로프 앙크비스트·다비드 그로스만·루드비히 하리크·엘케 하이덴라이히·페터 회크·에른스트 얀들·한나 요한젠·이반 클리마·미하엘 크뤼거·귄터 쿠네르트·라인하르트 레타우·마르틴 모제바흐·헤르타 뮐러·오스카 파스티오르·밀로라트 파비치·마르크 퍼티·기우제페 폰티기아·라피크 샤미·W. G. 제발트·찰스 사이믹·조지 슈타이너··보토 슈트라우스·게오르게 타보리·안토니오 타부키·알렉산다르 치마·하비에르 토메오·이다 포스·리하르트 바이어·볼프 본드라췌크·파울 뷔어
서문 …7
요슈타인 가아더·지평 …8헤르타 뮐러·백 개의 옥수수 알 …10라인하르트 레타우·책 다리 비행 시구 …12W.G.제발트·오래된 학교의 안뜰 …15가우제페 폰티기아 …17조지 슈타이너 …20한스 크리스토프 부흐·말리 여행기 …22한나 요한젠·사물들의 자리 ….24아모스 오즈·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마련이다 …26라픽 샤미 …29체스 노터봄 …33마르틴 모제바흐 …36하비에르 토메오·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 앞에서 …38헤어베르트 아흐터른부쉬 …40존 버거 …43찰스 사이믹 …44마르크 피티 …46미하엘 크뤼거 …48볼프 본드라체크 …50
다비드 그로스만·길 위의 인생 …52파울 뷔어 …55리하르트 바이에·도로 위에서 …58T. 코레이거선 보일·혀들의 키스 …61마틴 R. 딘 …64페르 올로프 앙크비스트 …67에른스트 얀들·누구인가? …68게오르게 타보리 …70알도 부치 …73루드비히 하리크·켈스터바흐의 시인 …76밀로라트 파비치·카드리유 …79오르한 파묵 …80안토니오 타부키 …82엘케 하이덴라이히 …84미셸 투르니에·조르주 심농의 마지막 날 …86알렉산다르 치마 …89수잔 손탁 …90밀란 쿤데라 …92이다 포스·마지막 안건 …94마르틴 발저·최후의 일격 …97이반 클리마·책-친구이자 적 …101보토 슈트라우스 …104오스카 파스티오르·구름 …107귄터 쿠베르트·조명등 아래에서 …108이조 카마르틴·단테, 신곡Ⅲ, 47-48 …110페터 회크 …112프리트마르 아펠·남은 자의 노래/사공의 대답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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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라고 쉽게 생각하지말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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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안 | 2020.6.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