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전후 독일 문학 최고의 작가 귄터 그라스 유고집

유한함에 관하여

유머로 가득한 이별

원제 Vonne Endlichkait

귄터 그라스 | 옮김 장희창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3년 9월 28일 | ISBN 978-89-374-2715-2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85x240 · 192쪽 | 가격 22,000원

분야 외국 문학

수상/추천: 노벨문학상

책소개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전후 독일 문학 최고의 작가

『양철북』의 작가 귄터 그라스 유고집

“노대가의 솔직함과 경쾌함, 장난기와 진지함이 하나로 뒤섞여 그의 인간적 풍모를 파노라마처럼 보여 준다.” ―옮긴이의 말

 

귄터 그라스는 독일 문학의 위대한 댄서다. 그는 문학의 아름다움을 향해 역사의 공포를 가로질러 춤추었으며, 그가 가진 품위 덕분에 악에서 살아남았다. _살만 루슈디

명징하고, 당긴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주는 책. _MDR

수많은 싸움을 마친 노작가의 달관에서 나온 경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_《슈피겔》

편집자 리뷰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 유고집
작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와 에세이 96편, 드로잉 63점 수록

전후 독일 문학 최고의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유고집 『유한함에 관하여―유머로 가득한 이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육체와 정신의 노쇠, 죽음에 대한 예감이 그라스 특유의 강건하고도 유머러스한 글과 드로잉에 담겼다. 『양철북』, 『게걸음으로』, 『양파 껍질을 벗기며』 등 그라스의 주요작들을 번역하고 작가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은 장희창 전 동의대학교 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고, 귄터 그라스 작품 세계와 유고집 사이에 다리를 놓는 해제를 덧붙여 책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귄터 그라스는 2012년부터 일종의 문학 실험으로 이 책을 기획하고 작업했으나 안타깝게도 출간 직전인 2015년 4월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책의 부제인 ‘유머로 가득한 이별’은 작가가 30여 년 함께했던 출판사 슈타이들이 연 출판 기념회의 테마였다. 이 유고집은 작가가 디자인과 글꼴과 제작 사양까지 모든 것에 관여한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자 독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림은 귄터 그라스에게 아주 중요한 창작 수단이었다. 작가가 되기 전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 대학과 베를린 조형 예술 대학에서 시각 예술과 조각을 공부한 그라스는 자신의 모든 작품의 표지 그림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 그림이란 언어보다도 본능적으로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장르여서, 언제나 집필 전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그림을 완성한 후 다시 빠르게 글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산문과 시, 그리고 그 두 장르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글 꼭지들에는 글의 핵심 주제를 담은 연필 드로잉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 그간 표지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그라스의 그림을 만끽할 수 있다.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
귄터 그라스가 생생하게 그려 낸 나이 듦과 죽음

이 책의 원제인 ‘Vonne Endlichkait’의 ‘Endlichkait’는 동프로이센 방언으로 “언젠가는 죽을 운명인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작가의 고향인 동프로이센 단치히 자유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편입되어 그단스크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방언도 세월이 지나 이제는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죽은 언어가 되었다. 작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모어(母語)를 제목으로 정했다는 사실은 영원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진리를 통렬하게 일깨운다.
언제나 논쟁적 주제로 글을 썼던 그라스가 생애 마지막으로 다룬 주제는 무너져가는 육체와 정신, 즉 나이 듦과 필멸(必滅)이다. 물론 세계정세, 특히 유럽의 정치 사회에 대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던 작가답게 세태를 논하는 꼭지들도 사이사이 위치해 세월도 무디게 하지 못한 날카로운 혜안을 보여준다. 그러나 노작가의 눈과 마음이 줄곧 향한 곳은 머지않아 가 닿을 죽음과 이제는 영영 멀어진 저 어리고 젊었던 시절이다.

 

그로테스크 미학의 이면에 존재하는 유머와 건강한 아이러니
육체라는 밀폐된 방을 탈출하게 하는 예술의 힘

죽은 새, 버섯, 짐승의 뼈, 돌, 화석, 틀니, 나무뿌리, 깃털, 낙엽, 다 말라비틀어진 열매……. 책에 실린 글들의 마중물이 되어준 그림들의 주제 역시 늙음과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 그림들은 일견 그로테스크하게도 보이는데, 그라스가 바라보는 우리 삶의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로테스크의 이면에는 유머와 건강한 아이러니라는 흔치 않은 감성이 깃들어 있다. 그 감성은 작가의 자유분방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책의 첫 꼭지에서 그는 나이 듦이 그런 자유를 선사해 주었음을 고백한다. 직역하면 ‘추방된 존재’인 제목의 첫 글 「새처럼 자유롭게」에서 그라스는 자신을 “깃털처럼 추방된 존재”라고 일컫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현대의학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창작의 샘이 다 말라 버려 그때그때 “파트타임 뮤즈”에게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으로 도움을 받고, 이제는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된 작가. 그러나 “오래전부터 종말을 맞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덕분에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 안의 짐승을 밧줄에서 풀어놓고,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되어 보고, 마음껏 방황도 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들은 그 자유로운 방황이 남긴 흔적이자, 허물어져 가는 필멸의 육체라는 밀폐된 방을 탈출하게 하는 예술의 힘에 대한 증거이다.

 

노년의 삶에도 존재하는 욕구와 희망

다 빠지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齒]에 대한 단상을 담은 연작 글들과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린 우스꽝스러운 자화상, 허물어져 가는 육체와 더불어 퇴화하는 미각, 노년의 밤을 길게 늘이는 수면 장애, 모든 것이 표준화된 21세기에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지난 시절의 음식에 대한 그리움, 젊어서부터 사랑했던 선배 작가들, 젊은 예술학도 시절 함께했지만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가슴 아픈 회한……. 그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들은 노년의 삶에도 여전히 느껴지는 질투 같은 원초적 감정과(「그대의 그리고 나의」), 담대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가운데서도 이듬해의 봄꽃을 기다리는 생의 욕구를 그린 글(「우리가 들어가 눕게 될 그것」)들이다. 특히 작가와 그의 부인이 그들의 가구를 만들어 주던 소목장에게 관 제작을 의뢰하고, 주문한 관을 받고 부부가 그 안에 들어가 눕는 입관 ‘리허설’을 하고, 또 그 관을 도둑맞으면서 벌어지는 부조리극 같은 소동을 그린 연작 에피소드는 이 책의 백미와도 같다.(「우리가 들어가 눕게 될 그것」, 「보험 들어 놓은 손실」, 「도난품」) 귄터 그라스가 그리는 노년의 삶은 고유한 다이내믹으로 요동치고 은근한 서스펜스가 흐른다.

 

더 이상 ‘전후 시대’가 아닌 오늘날, 거듭 읽혀야 할 작가 귄터 그라스

책 말미에 이르러 그라스의 마지막 하나 남은 이도 마침내 빠져 버린다. “이제 치통은 없다.”고 작가는 선언한다. 이가 다 빠졌다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고 일갈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건만, 그는 그 몫을 이가 남아 있는 젊은 세대에 넘기려 한다. 이제 그는 경기장 바깥에 서 있는, 지난 시대의 인물인 것이다.(「종결선 긋기」)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의 100세 생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라디오에서 여전히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또 다른 세계 대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감에 작가는 다시 분기탱천한다. 역사가 남긴 교훈은 간데없고,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이미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8월」, 「그 여름에 분기탱천하여」) 어린 시절 그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던 언어”의 소멸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라스가 안타까워한 것은, 언제든 우리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방인이 될 수 있음에도 좀처럼 베풀지 않는 환대의 마음이다.(「쿠르브윤 씨의 질문」) 작가가 평생을 걸고 한 투쟁과 고발의 이면에는 그 같은 짙은 휴머니즘이 깔려 있었다. 점점 더 혼탁해지는 지금의 세계를 보며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작가가 떠난 지 어느덧 십 년을 향해 가지만, 더 이상 “전후 시대”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된 이 시대에 귄터 그라스는 거듭 다시 읽혀야 할 작가로 남아 있다.

목차

새처럼 자유롭게 11
영원히 새로운 종이 위에 12
오징어 먹물 물감 15
끝없는 붓질 16
무기력 17
저녁 기도 18
남은 것 21
달팽이 편지 22
마음속 소음 24
혼잣말 26
긴 호흡으로 28
내겐 힘이 없어 29
알 속에서 살기 32
애초에 무엇이 먼저였던가 33
남은 이[齒]들과의 이별 34
심연 위에서 35
마지막 이 37
자화상 38
따로따로 그리고 마녀들처럼 원을 이루고 있는 것 42
정주민이 된 어느 여행자의 비탄 43
내장들 44
한땐 그랬지 45
화폐 유통에 대하여 48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49
일상적인 것 50
소유 51
어떤 새가 여기서 알을 품는가? 51
차례
편지들 54
사랑하는 리부셰 왕비 55
그의 유머가 달아나 버린 곳 56
롤벤첼라이에서 57
한밤의 손님 58
끝없는 고통 후에 62
그러고 나서 크사베르가 왔다 63
일기 예보에 의하면 64
정물(靜物) 65
여운을 남기는 뒷맛 68
게브란트 만델 69
내 후각과 미각이 사라졌을 때 72
육체와의 이별 73
쌓아 놓은 판자 79
이방인 혐오 80
우리가 들어가 눕게 될 그것 83
심심파적 97
이것들이 내가 그린 거라고? 99
다시 불러 보는 이름, 프란츠 비테 99
터널 끝의 빛 104
무티 105
향수 107
법률에 따라 109
사실이란 무엇인가 110
너무 늦기 전에 111
보험 들어 놓은 손실 112
너무 온화한 겨울 115
부엉이의 눈 115
구름에 대해서 116
천상의 망상에 빠져 117
글 쓰기에 대하여 120
할아버지의 애인 121
그대의 그리고 나의 122
욕망이 열정과 짝을 이룰 때 125
상실의 불안 127
그는 가 버렸어 129
온실 속에서는 130
다시 3월이 오면 131
가르칠 수 없는 것 134
종말 135
나의 바위 136
해변의 산책자가 발견한 것 139
마지막 희망 140
지금 141
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도록 142
못과 밧줄 142
기념품으로 선물할 수 있는 것 144
밧줄 꼬기 147
초상화 그리기 148
꿰뚫어 보다 149
첫 번째 일요일에 151
뒤쪽 의자에 앉아 153
미신 154
그가 세 번 울었다 155
친애하는 슈누레 씨 156
도난품 157
발견된 오브제 160
구시가에 남은 것들 안에는 161
죽음의 무도(舞蹈) 164
똑바로 응시하기 165
발자국 읽기 166
사냥 시즌 168
사냥 허가 기간 169
종결선 긋기 170
결산 171
8월 172
그 여름에 분기탱천하여 173
쿠르브윤 씨의 질문 176
유한함에 관하여 177

옮긴이의 말 179

작가 소개

귄터 그라스

1927년 폴란드의 자유시 단치히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2차 세계 대전 중에 열일곱의 나이로 히틀러의 나치 무장 친위대에 징집되어 복무했고, 미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농장 노동자, 석공, 재즈 음악가, 댄서 등 여러 가지 일을 전전하다가,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 대학과 베를린 조형 예술 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이후 글쓰기에 눈을 돌려 1954년 서정시 경연 대회에 입상하면서 등단했다. 1958년 첫 소설 『양철북』 초고를 전후 청년 문학의 대표 집단인 47그룹 모임에서 낭독해 그해 47그룹 문학상을 받았고, 이후 게오르크 뷔히너 상, 폰타네 상,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 수많은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1년부터는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960년대에 『고양이와 생쥐』(1961), 『개들의 세월』(1963)을 발표해 『양철북』의 뒤를 잇는 ‘단치히 3부작’을 완성했다. 1976년 하인리히 뵐과 함께 문학잡지 《L’76》을 창간했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어 『넙치』(1977), 『텔크테에서의 만남』(1979), 『암쥐』(1986), 『무당개구리 울음』(1992), 『나의 세기』(1999) 등을 발표했고, 1995년에 독일 통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품 『또 하나의 다른 주제』를 내놓았다. 1999년에 독일 소설가로는 일곱 번째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2002년에 오십 년 넘게 금기시되었던 독일인의 참사를 다룬 『게걸음으로』를, 2003년에 시화집 『라스트 댄스』를 발표했다. 2006년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에서 10대 시절 나치 무장 친위대 복무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해 전 세계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2008년에는 그 후속편으로 여겨지는 자전 소설 『암실 이야기』를 출간했다. 2015년 4월 13일 여든여덟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장희창 옮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독어독문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의대학교 독어독문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독일 고전 번역과 고전 연구에 종사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독서 평론집 『춘향이는 그래도 운이 좋았다』가 있고, 옮긴 책으로 귄터 그라스의 『양파 껍질을 벗기며』(공역), 『암실 이야기』, 『양철북』, 『게걸음으로』, 『나의 세기』(공역), 레마르크의 『개선문』, 『사랑할 때와 죽을 때』, 괴테의 『색채론』, 『파우스트』, 에커만의 『괴테와의 대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후고 프리드리히의 『현대시의 구조』, 안나 제거스의 『약자들의 힘』, 베르너 융의 『미메시스에서 시뮬라시옹까지』, 카타리나 하커의 『빈털터리들』, 부흐홀츠의 『책그림책』 등이 있다.

전자책 정보

ISBN 978-89-374-2716-9 | 가격 15,400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 유고집
작가가 마지막으로 남긴 시와 에세이 96편, 드로잉 63점 수록

전후 독일 문학 최고의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유고집 『유한함에 관하여―유머로 가득한 이별』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한 육체와 정신의 노쇠, 죽음에 대한 예감이 그라스 특유의 강건하고도 유머러스한 글과 드로잉에 담겼다. 『양철북』, 『게걸음으로』, 『양파 껍질을 벗기며』 등 그라스의 주요작들을 번역하고 작가와도 각별한 인연을 맺은 장희창 전 동의대학교 교수가 우리말로 옮기고, 귄터 그라스 작품 세계와 유고집 사이에 다리를 놓는 해제를 덧붙여 책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귄터 그라스는 2012년부터 일종의 문학 실험으로 이 책을 기획하고 작업했으나 안타깝게도 출간 직전인 2015년 4월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책의 부제인 ‘유머로 가득한 이별’은 작가가 30여 년 함께했던 출판사 슈타이들이 연 출판 기념회의 테마였다. 이 유고집은 작가가 디자인과 글꼴과 제작 사양까지 모든 것에 관여한 하나의 아름다운 예술 작품이자 독자들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 그림은 귄터 그라스에게 아주 중요한 창작 수단이었다. 작가가 되기 전 뒤셀도르프 국립 미술 대학과 베를린 조형 예술 대학에서 시각 예술과 조각을 공부한 그라스는 자신의 모든 작품의 표지 그림을 그린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에게 그림이란 언어보다도 본능적으로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켰던 장르여서, 언제나 집필 전 아이디어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그림을 완성한 후 다시 빠르게 글로 옮겨 적었다고 한다. 산문과 시, 그리고 그 두 장르의 경계에 걸쳐 있는 듯한 글 꼭지들에는 글의 핵심 주제를 담은 연필 드로잉이 나란히 배치되어 있어 그간 표지에서만 접할 수 있었던 그라스의 그림을 만끽할 수 있다.

필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
귄터 그라스가 생생하게 그려 낸 나이 듦과 죽음

이 책의 원제인 ‘Vonne Endlichkait’의 ‘Endlichkait’는 동프로이센 방언으로 “언젠가는 죽을 운명인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작가의 고향인 동프로이센 단치히 자유시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로 편입되어 그단스크로 이름이 바뀌었고, 그가 어린 시절 사용하던 방언도 세월이 지나 이제는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죽은 언어가 되었다. 작가의 죽음과 함께 사라질 모어(母語)를 제목으로 정했다는 사실은 영원한 것은 세상에 없다는 진리를 통렬하게 일깨운다.
언제나 논쟁적 주제로 글을 썼던 그라스가 생애 마지막으로 다룬 주제는 무너져가는 육체와 정신, 즉 나이 듦과 필멸(必滅)이다. 물론 세계정세, 특히 유럽의 정치 사회에 대한 발언을 멈추지 않았던 작가답게 세태를 논하는 꼭지들도 사이사이 위치해 세월도 무디게 하지 못한 날카로운 혜안을 보여준다. 그러나 노작가의 눈과 마음이 줄곧 향한 곳은 머지않아 가 닿을 죽음과 이제는 영영 멀어진 저 어리고 젊었던 시절이다.

그로테스크 미학의 이면에 존재하는 유머와 건강한 아이러니
육체라는 밀폐된 방을 탈출하게 하는 예술의 힘

죽은 새, 버섯, 짐승의 뼈, 돌, 화석, 틀니, 나무뿌리, 깃털, 낙엽, 다 말라비틀어진 열매……. 책에 실린 글들의 마중물이 되어준 그림들의 주제 역시 늙음과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 그림들은 일견 그로테스크하게도 보이는데, 그라스가 바라보는 우리 삶의 현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로테스크의 이면에는 유머와 건강한 아이러니라는 흔치 않은 감성이 깃들어 있다. 그 감성은 작가의 자유분방한 정신에서 비롯된 것으로, 책의 첫 꼭지에서 그는 나이 듦이 그런 자유를 선사해 주었음을 고백한다. 직역하면 ‘추방된 존재’인 제목의 첫 글 「새처럼 자유롭게」에서 그라스는 자신을 “깃털처럼 추방된 존재”라고 일컫는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현대의학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창작의 샘이 다 말라 버려 그때그때 “파트타임 뮤즈”에게 “구강 대 구강 인공호흡”으로 도움을 받고, 이제는 “자신에게 낯선 존재”가 된 작가. 그러나 “오래전부터 종말을 맞을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는” 덕분에 그는 부끄러움 없이 자기 안의 짐승을 밧줄에서 풀어놓고,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되어 보고, 마음껏 방황도 할 수 있다. 이 책에 실린 글과 그림들은 그 자유로운 방황이 남긴 흔적이자, 허물어져 가는 필멸의 육체라는 밀폐된 방을 탈출하게 하는 예술의 힘에 대한 증거이다.

노년의 삶에도 존재하는 욕구와 희망

다 빠지고 하나밖에 남지 않은 이[齒]에 대한 단상을 담은 연작 글들과 그런 자신의 모습을 그린 우스꽝스러운 자화상, 허물어져 가는 육체와 더불어 퇴화하는 미각, 노년의 밤을 길게 늘이는 수면 장애, 모든 것이 표준화된 21세기에 더 이상 맛볼 수 없는 지난 시절의 음식에 대한 그리움, 젊어서부터 사랑했던 선배 작가들, 젊은 예술학도 시절 함께했지만 먼저 떠난 친구에 대한 가슴 아픈 회한……. 그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다가오는 글들은 노년의 삶에도 여전히 느껴지는 질투 같은 원초적 감정과(「그대의 그리고 나의」), 담대하게 죽음을 준비하는 가운데서도 이듬해의 봄꽃을 기다리는 생의 욕구를 그린 글(「우리가 들어가 눕게 될 그것」)들이다. 특히 작가와 그의 부인이 그들의 가구를 만들어 주던 소목장에게 관 제작을 의뢰하고, 주문한 관을 받고 부부가 그 안에 들어가 눕는 입관 ‘리허설’을 하고, 또 그 관을 도둑맞으면서 벌어지는 부조리극 같은 소동을 그린 연작 에피소드는 이 책의 백미와도 같다.(「우리가 들어가 눕게 될 그것」, 「보험 들어 놓은 손실」, 「도난품」) 귄터 그라스가 그리는 노년의 삶은 고유한 다이내믹으로 요동치고 은근한 서스펜스가 흐른다.

더 이상 ‘전후 시대’가 아닌 오늘날, 거듭 읽혀야 할 작가 귄터 그라스

책 말미에 이르러 그라스의 마지막 하나 남은 이도 마침내 빠져 버린다. “이제 치통은 없다.”고 작가는 선언한다. 이가 다 빠졌다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고 일갈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건만, 그는 그 몫을 이가 남아 있는 젊은 세대에 넘기려 한다. 이제 그는 경기장 바깥에 서 있는, 지난 시대의 인물인 것이다.(「종결선 긋기」) 하지만 1차 세계 대전의 100세 생일이 다가오는 가운데 라디오에서 여전히 전쟁 소식이 들려오고, 또 다른 세계 대전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예감에 작가는 다시 분기탱천한다. 역사가 남긴 교훈은 간데없고, 한 세기도 지나기 전에 이미 비극은 반복되고 있다.(「8월」, 「그 여름에 분기탱천하여」) 어린 시절 그를 “따뜻하게 데워 주었던 언어”의 소멸을 가슴 아파하면서 그라스가 안타까워한 것은, 언제든 우리도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 이방인이 될 수 있음에도 좀처럼 베풀지 않는 환대의 마음이다.(「쿠르브윤 씨의 질문」) 작가가 평생을 걸고 한 투쟁과 고발의 이면에는 그 같은 짙은 휴머니즘이 깔려 있었다. 점점 더 혼탁해지는 지금의 세계를 보며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작가가 떠난 지 어느덧 십 년을 향해 가지만, 더 이상 “전후 시대”라고 단언할 수 없게 된 이 시대에 귄터 그라스는 거듭 다시 읽혀야 할 작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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