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학계의 거목 유종호 교수가 쓴
종래의 통념과는 다른 도전적인 관점이 포함된
새로운 스타일의 시문학사
이 책은 해방 이후 한국 현대 비평사의 산 증인인 유종호 교수가 문학적 깊이와 풍부한 예시로 집필한 새로운 스타일의 시문학사 책이다. 문학사를 하나의 역사 서술 체계로 개관하고 정리해야 한다는 딱딱한 문학사의 통념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작품의 예를 들어 분석 설명하여 한국 시 읽기의 즐거움까지 체험할 수 있다. 특히 근대라는 엄청난 변화의 시기에 우리 시가 보여 준 문학적 가치와 힘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한국 근대시의 파노라마가 통째로 살아 숨 쉬는 이 책은 저자 특유의 문학에 대한 통찰력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어우러진 문체를 통해, 물질 중심의 현 시대에 인문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일깨워 준다.
요령 있게 축약된 간소한 20세기 한국시사(韓國詩史)를 써 보자는 생각을 해 온 지가 한참 된다. 이왕에 나온 이 방면의 몇몇 노작에 대해서는 모르지 않는다. 20세기 전반기의 시집, 동인지, 신문, 정기 간행물을 섭렵하고 서지적(書誌的) 고증을 갖춘 견고한 책들이 나와 있다. 그러나 분량이 너무 방대하고 세부 고증에 치우쳐 연구자들에게는 더 없이 유용하지만 일반 독자에게는 버겁게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시에 대한 이해를 두텁게 하고 아울러 문학사가 비평과 상호 보족 관계에 있다는 것, 아니 문학사란 비평에 다름 아님을 실감시켜 주고 아울러 독자들이 즐기면서 통독할 수 있는 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특정 개인의 삶을 비평적으로 추적한 전기를 보통 평전(評傳)이라 하는데 이를테면 한국 근현대시의 평전을 염두에 둔 것이다.
—「책머리에」에서
■ 시를 즐기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하지 않고서는 즐길 수 없다
유종호 교수는 이 책을 여는 1장에서 문학사란 무엇이고 왜 문학사 서술이 필요하며 그것이 존귀한 일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문학사를 쓰는 것도 읽는 것도 작품을 즐기고 이해하기 위해서이므로 작품 향수와 이해에 기여하는 시문학사가 진정한 문학사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특히 저자가 조명하는 시기는 1920~1945년 한국의 근대시사이다. 이 시기를 다루려면 근대의 특성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한국사에서 가장 큰 변화의 시기라 할 수 있는 근대의 특성을 저자는 서양사나 동양사 학습 노트, 즉 기계적 현학적 관념의 유희에서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 생생하게 살아 있는 각 문학 작품과 문학 운동의 구체 속에서 찾는다.
한국의 20세기, 즉 근대는 국권 상실의 위기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와 함께 각 분야의 강제적 문화 개방이 이루어지면서 문학에서도 고대 문학인 한시·시조가 탈락해 간 자리에 번역시형이 주류로 부상하면서 20세기 한국 시가 전개되어 왔다. 번역시형의 주체적 형태적 수용을 거쳐 곧이어 김소월이나 정지용의 명편들이 쓰이고 15~20년 후에 백석, 이용악, 청록파 시인들의 시가 나오면서 문화적 민족주의의 역동적 정력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권 상실 시기에 모국어의 놀라운 세련 능력이 이루어진 것은 한국 시의 긍지요 위엄이다. 암담한 고향 상실 시대의 척박한 터전에서 무기력한 시간의 리듬을 창조적 리듬으로 돌렸다는 역사적 사실은 문화 실천의 막강한 중요성을 절감케 하는 대목이다.
20세기 한국 시의 전체적인 경향은 무엇인가. 저자는 토착주의 지향과 근대주의 지향이라는 상충하는 하나의 축, 사회 현실 지향과 민족어 순화 지향이라는 또 하나의 축을 우리 20세기 시의 기본 충동으로 상정한다. 이러한 큰 그림을 바탕으로 저자는 2, 3장에서 주요한으로 시작되는 한국 근대시를 시기 별로 개관해 보고, 근대시인들이 처한 시대적 경제적 상황들을 고려해 본다. 5장은 특히 우리 근대시사의 한 획을 그은 만해를 다루는데 저자는 1926년에 간행된 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불가사의한 경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이 시집은 만해를 불멸의 시인으로 살아 있게 하면서 20세기 우리 문학사에서 전무후무한 사례가 되었다. 이어 6장은 테제 문학으로서의 신경향파 문학과 프로 문학을 다루고 있는데 사회주의 성격을 띤 테제 문학의 대표적 시인인 박팔양과 임화 등의 시편들을 심도 있게 다룬다. 이렇게 시단 한쪽에서 사회 현실 지향의 테제 문학이 번지고 있던 시기에 정지용 김영랑, 박용철 등이 활동한 《시문학》은 반테제 문학 성향을 띠며 20세기 한국 시의 한 축을 이룬 민족어 지향 쪽으로 나아갔다. 또한 한국 시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서정시 부분에서 저자는 20세기 한국 시의 가장 좋은 사례로 민요적인 가락에 기대어 있는 김영랑을 꼽았다.(7장) 8장에서는 양복쟁이로 대표되는 모더니스트 시인들인 김기림, 김광균 등을 다룬다. 이상의 오감도 신화에 대해선 부정적이다. 급진적 진보적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이상의 소설 작품의 위대성은 인정하면서도 “‘한발 앞서기’에 들려 있었던 이상은 오늘날 경쟁적 시험지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 청소년의 난경을 앞당겨 보여 준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의 성취도를 고려하지 않는 새로움의 날조는 실상 어려운 것이 아니다.”라고 평한다. 공연한 난해의 포즈가 가시지 않는 풍토에서 다른 각도의 모더니즘도 시도되었는데 모더니즘의 한 가능성을 보여 준 작가로 이시우의 시편을 소개하고, 계몽적 모더니즘의 실천자 김기림의 반(反)음악 친(親)회화적인 경향을 「태양의 풍속」, 「기상도」 등의 작품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서정주 등 《시인부락》으로 대표되는 1935년경의 시인들은 선행 시편과 사회 인습에 대한 반역을 시도하면서 시를 통해 도적적인 반역의 꿈을 키웠다. 테제 문학과 모더니즘에 대한 반동으로 동인 활동 외에도 백석, 이용악, 노천명 등 독자적으로 활동한 시인들도 있었다. 1941년에 와서 한국어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어 해방 전까지 문학에서도 강제된 휴지기를 갖는데, 신석정, 노천명, 박두진, 조지훈, 박목월 등 이 무렵의 시인들의 민족어 글쓰기 문화실천 행위는 동시에 정치실천이기도 했다.
한국 문학계의 거목인 유종호 교수가 균형 잡힌 시각으로 치밀하면서도 통찰력 있게 다시 쓴 이 문학사 책은 한국 근대시의 평전으로서 문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엄숙한 질문에 해답을 줌과 동시에 독자들이 즐기면서 통독할 수 있는 책이 될 것이다.
책머리에
1 모색과 변모의 궤적
2 두 개의 축
3 평생 경영의 포기
4 고향 상실 시대의 민족시인
5 만해 혹은 불가사의한 경이
6 테제 문학의 시인들
7 부족 방언의 순화
8 모더니티를 찾아서
9 반(反)음악 친(親)회화 지향
10 저주받은 부락민
11 홀로 선 시인들
12 그 전날 밤의 시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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