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유종호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04년 8월 15일 | ISBN 89-374-0725-6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80쪽 | 가격 6,000원

책소개

예순이 되어 등단한 시인 유종호의 첫 시집 ▶ 한국 문학 평단의 거두 유종호 선생의 첫 시집이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시는 “내 삶의 첫 정열”이라는 말을 자주 해오며 중학교 때부터 시를 써왔지만, 정작 시를 발표하지는 않았었다. 대신 유종호 선생은 『시란 무엇인가』라는 명저를 썼다. 시를 함부로 쓰고 발표하는 일을 경계해 오다가 예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시를 발표하였다. 그렇게 발표하였던 것이 60편 가까이 되어가는데, 이번 시집에 약 30편을 수록하였다.

편집자 리뷰

그릴 줄은 알아도 여적/ 거북 귀 字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맨날 옥편이며 영어사전 뒤져야 하고/ 아직도 조선 말 모르는 거 천지인데/ 백죄 어느새 예순이라 한다.(「불멸의 한 줄은커녕」에서)1990년대 후반부터 쓰이기 시작한 이 시들은, 당대의 젊은 시인들의 경향과는 다르다. 늦깎이 시인이라 하겠지만, 시인의 감성은 당대보다는 오히려 전통 혹은 탄탄함 쪽에 가깝다. 유종호 시인의 시는 ‘서정적 진실’이 드러나는 정제된 언어의 맛을 보여준다. 그가 말하는 ‘서정적 진실’ 찾기는 시 자체의 가치와는 관련 없는 문학 외적 논평에서가 아니라 텍스트를 빠트림 없이 향유하는 데서 시작된다. 서정시의 장은 글자 한 자의 차이가 세계의 명멸을 빚어내는 미시적인 감각과 지각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언어 조직의 세목을 음미하면서 시의 빼어난 아름다움을 인지하는 것이 곧 시편에 대한 이해이다. 시인은 이와 같은 진지한 비평적 안목을 갖고서 그의 시작 활동을 행하였다.
정제된 언어의 미, 짧은 시행마다 돋보이는 진실의 순간들
그의 시는 이번에 같이 출간된 산문 『나의 해방 전후』와 교차하여 읽으면 그 읽는 의미가 한층 배가된다. 이종형과의 정신적 교유의 경험을 담아 비감 혹은 회억을 노래한 시 「코로의 추억」, 정신적 버팀목이었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어머니 가시다」, 「복사꽃이라든가 함박눈이라든가」, 어린 눈으로 목도하였던 해방 정국 시절을 노래한 「노래하는 아이들」, 「그해 겨울」, 어느 빨치산 대원의 공개 처형 장면을 목도하였던 경험을 담은 「오래 전 오랜 후에」 등. 이런 개개의 시편들의 짧은 시행마다 도처에서 돋보이는 진실의 순간들이 있다. 온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나의 해방 전후』를 읽으면 되거니와, 시적 진실은 이러한 이차적 맥락에서의 접근을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시집의 첫머리에는 대개 일상생활에서 찾을 수 있거나 일상에 근접해 있는 사물과 소재를 들고 있다. 반딧불이, 풀섶, 둥굴레차, 고추잠자리, 자목련, 램프, 제비꽃 등등. 잔잔한 흐름. 그러다가 갑자기 “번갯불 번쩍—그리곤 한밤!”이라는 보들레르의 한 시편에서 따온 구절이 나온다. 「지나가는 뒷모습에」라는 시에서 ‘소매 스치고 지나간 먼발치의 사람’을 “처음이자 마지막 본 것이 승냥이떼 오소리떼 득실거리는 강북 명동의 밀림 속이었다”라고 말한다. ‘이승의 잠시’ 스쳐간 이가 지금쯤 ‘나비 부인’ 되었을까 ‘꿀벌 부인’ 되었을까 ‘평강 공주’ 아니면 ‘울 안의 암사자’ 되었을까 궁금해한다. 우연이었으나 “번갯불 번쩍” 하고서 ‘지나가는 뒷모습에서’ 작은 서정을 느낀다. 진실의 순간이라 할 것이다. 제2부의 시편들을 읽을 때에도 전체를 하나의 체계로 이으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단 개개의 시편들에서 찾을 수 있는 의미들이 한데 어울릴 수 있다면, 한국 현대사의 굴곡되고 신산스러운 삶을 살아온 한 지성인이자 세대인으로서의 진실된 자세라 할 것이다. 「대소원을 지나며」에서는 “우리들의 辛酸은 끝나지 않았다/ 살구꽃 뎅그랗게 피어 있는 사월 어느 하루/ 동해변의 죽변이나 주문진 혹은/ 황사 낀 內陸의 음성이나 대소원을 지나가 보라/ (……) / 어디에들 간다는 것이냐/ (……) 그렇다 멀어도 다시 한참 멀었구나/ 우리들의 신산은 끝나지 않았다”라고 노래한다. 신산스러운 삶 속에서 “눈부신 세상” “그 많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갔는가”라고 묻지만, “엄연한 사실처럼 비가 내린다”(「비 오는 대륙」). 「전언에 대하여」, 「시인의 꽃」, 「시는 죽었다」, 「마부 표도르의 포장마차」 등의 시편에서는 시론적 태도를 드러낸다. 시인은 ‘시’의 유의미성, ‘기의적 의미’를 먼저 묻는 경향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보인다. 시인은 기의보다 기표에 끌리는 일이 많다는 의미다. 山茶花가 어떤 꽃이냐 여쭈었더니/ 사실은 나도 잘 모른다/ 소리랑 글자가 좋아 썼을 뿐/ 산다화를 거푸 노래한/ 시인 김춘수 선생은 말하였다. (「시인의 꽃」에서)마지막으로 시인은 “한 일 없이 할 일은 태산만 같은데” 어느새 예순이 훌쩍 넘어 “불멸의 한 줄”을 쓰지 못했음을 고백한다.(「불멸의 한 줄은커녕」)
유종호
1935년 충북 충주 출생.서울 문리대 영문과를 나와 뉴욕 주립대(버팔로) 대학원에서 수학.현재 연세대 문과대학 특임교수.1957년 이후 비평 활동을 해왔으며 저서로 『유종호전집』(전5권) 이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다시 읽는 한국시인』, 『내 마음의 망명지』 등이 있음.

목차

제1부 초승달 / 반딧불이 / 풀섶을 지나며 / 둥굴레차 / 고추잠자리 / 자목련 아래서 / 불 켜진 램프 / 어제 그제 / 내 뻐꾸기 / 지나가는 뒷모습에 / 제비꽃 / 달달 / 어머니 가시다 / 코로의 추억 / 마른 새벽에 / 당분간 / 老後 / 복사꽃이라든가 함박눈이라든가 /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제2부 대소원을 지나며 / 그제 회오리 / 비 오는 대륙 / 언제나 悲歌 / 전언에 댛아ㅕ / 민중의 나무 / 오래 전 오랜 후에 / 창녀와 야수 / 그들의 청춘 / 노래하는 아이들 / 그해 겨울 / 강가에서 / 광고 / 꿈이었나 / 오감도 88호 / 한여름 밤의 꿈 / 시인의 꽃 / 耳鳴 / 청바지 나그네 / 시는 죽었다 / 마부 표도르의 포장마차 / 불멸의 한줄은커녕

작가 소개

유종호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뉴욕 주립대 대학원에서 수학했다. 공주사범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를 거쳐 2006년 연세대학교 특임교수직에서 퇴임함으로써 교직 생활을 마감했다. 저서로 『유종호 전집』(전 5권) 외에 『시란 무엇인가』,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 『한국근대시사』, 『나의 해방 전후』, 『과거라는 이름의 외국』 등이 있고 역서로 『파리대왕』, 『제인 에어』, 『그물을 헤치고』, 『미메시스』(공역) 등이 있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며,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 인촌상, 대한민국예술원상, 만해학술대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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