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000년에 걸친 <말하는 넙치>와 여자 요리사 이야기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중세, 바로크 시대, 절대 왕정기, 혁명의 19세기와 20세기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움직여 온 넙치와 열한 명의 여자 요리사들이 엮어 낸 또 하나의 역사. 남자와 여자, 그리고 사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작품.
『넙치』는 1977년에 발표되어 귄터 그라스만의 독창성이 뛰어나게 발휘된 작품이라는 평을 받은,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귄터 그라스의 대작이다. 발표 후 2년 동안에만 45만 부가 판매된 베스트셀러로 당시 그라스는 수익금의 일부로 베를린 예술원의 후원 하에 알프레드 되블린 상을 제정하기도 했다.그라스는 그의 쉰번째 생일을 맞기 5년 전 자기 자신을 위한 선물로서 대작을 쓰기로 결심하고 시, 스케치, 짧은 에피소드 등을 통해 작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뒤셀도르프 및 베를린 예술 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화가이기도 한 그라스는 『넙치』와 관련하여 상당량의 삽화를 직접 그렸는데(이번에 출간된 『넙치』의 표지도 그라스 자신의 작품이다), 이러한 사실들에 비추어 볼 때 이 작품에 대한 작가의 애정이 얼마만큼인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독일 슈타이들 출판사와의 정식 계약으로 출간되는 이번 판본은, 시인이자 고려대 독문과 교수인 김재혁 선생이 번역을 맡았으며, 원문에 충실한 정확한 번역과 아울러 현대적인 감각의 언어 구사로, 다양한 내용이 다층적으로 구성되어 자칫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작품을 한층 가독성 있게 만들어 주고 있다.
식량과 여성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인류 문화사
작품의 첫 페이지에는 <헬레네 그라스에게>라는 헌사가 붙어 있는데 헬레네는 귄터 그라스의 딸로, 작가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1973년 10월에 잉태되었다고 한다. 시기적인 측면과 엇물려, 이 작품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살아 나가야 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가 들려 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첫째 달부터 아홉째 달까지 총 아홉 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이 세상에 처음부터 존재해 온 인물인 <내>가 임신한 아내 <일제빌>에게 들려 주는 이야기 형식을 바탕으로 한다. 바익셀 강 어귀의 늪지대를 배경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 중세, 바로크 시대, 절대 왕정기, 혁명의 19세기와 20세기, 제3제국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내>가 만났던 열한 명의 여자 요리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시대 순으로 전개된다. 작가는 1977년 9월 한 인터뷰에서 소설을 집필하게 된 동기에 대해 이렇게 밝힌 바 있다. <그때 나는 우리의 역사 서술에서 빠진 부분과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여성들이 역사 형성에서 이름없이 이루어 낸 몫을 말합니다. 요리사로서, 가정주부로서, 식량 구조를 혁명적으로 개선할 때, 즉 기장을 감자로 대체할 때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서 말입니다. > 이렇게 작품 속의 여성들은 민족 대이동 시절에는 순무를 재배했고, 7년 전쟁 시기에는 감자를 도입했으며, 공산주의 혁명 시기에는 양배추를 들여오는 등, 식량 문제 해결을 통해 인류의 생존에 지대한 역할을 한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한편 작품 속에 등장하는 요리의 재료 및 방법 또한 놀라우리만치 다양하여 작품을 읽는 동안 마치 성대한 만찬에 초대받은 듯한 느낌을 안겨 주기도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와 진정한 페미니즘을 향한 모색
여자 요리사들의 이야기와 엇물려, <나>와 마찬가지로 약 4000년에 이르는 시간 동안 존재해 왔던 <말하는 넙치>, 그리고 그가 역사상 남성 편만 들어왔다는 죄목으로 여성 배심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도 작품의 또 한 축이 된다.여기에서 <넙치>는 헤겔의 세계 정신과 같은 전지전능한 존재로서 이성과 논리성의 상징이다. 약 4000년 전 세 개의 유방이 달려 있는 아우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권 사회에서 남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시절, <넙치>는 <나>에게 잡혀 남자들을 위한 조언자 역할을 맡기로 하고 그 이후로 역사의 주도권은 남성에게 넘어간다. 넙치는 모든 시대적 변동과 유행의 변화, 모든 혁명, 최신의 진리와 진보를 앞서서 예견하고 남자들이 그에 대비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다가 현대에 이르러 <넙치>는 다시 여자들에게 잡히는데, 넙치는 남성 중심의 역사가 초래한 파멸에 대해 언급하며 앞으로는 여성들을 위한 조언자 역할을 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렇지만 그 또한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없음은 작품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화자는 어느 한 쪽의 우위가 아닌, 제3의 것을 통해 대립 구도를 허물고 진정한 화해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려 준다.
동화적 서술방식을 통해 재구성한 또 하나의 역사
그라스는 동화적 서술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나는 『양철북』때부터 ‘옛날, 옛날에’라는 동화적 서술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독특한 독일적 서술형식이 우리 문학의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 나는 깊이 파고 들어가는 심리 소설보다 이 동화 형식 속에 더 많은 현실이 들어 있다고 봅니다. > 실제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된 것은 그림 형제의 동화 「어부와 그의 아내」이다. 이 동화에서 어부는 어느 날 말하는 넙치를 잡게 되는데, 마음씨 착한 어부는 넙치가 살려 달라고 하소연하자 넙치를 그냥 풀어 주고 만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부의 아내는 넙치에게 가서 소원을 빌라고 어부에게 강요하고, 점점 큰 욕심에 사로잡힌 아내는 결국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후로 어부의 아내는 무한한 소유욕에 사로잡힌 심술궂은 여인의 전형이 된다. 그러나 작중 화자는 그 동화를 가부장제를 지키려는 남자들의 음모라고 말하며, 원래 「어부와 그의 아내」는 두 가지 판본이 있었는데, 남성들의 욕구가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내용으로 한 판본은 남자들이 불태워 버렸다고 말한다. 그 불타버린 판본을 토대로 한 작품이 바로 『넙치』이며, 그라스는 이 작품에서 <백과사전과도 같은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라는 찬사에 걸맞게 인류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상세하고 진실된 또 하나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
- 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해 온 인물. 아우아에서 마리아까지,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여자 요리사들과 관계를 맺는 남자들의 대부분이 바로 <나>이다. 현재의 아내 일제빌이 임신한 상태에 있는 아홉 달 동안, 자기의 기억 속에서 <뛰쳐나오려고 야단>인 여자 요리사들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놓는다.
- 말하는 넙치: 기나긴 역사의 흐름을 움직여온 존재. 모권 사회에 안주해 있던 남자들을 일깨워 역사의 흐름을 남성 중심으로 돌려 놓는다. 그러나 자기가 남자들에게 지식과 권력을 주었으나 결국 역사는 전쟁과 기아로 치달았을 뿐이라며, 여성을 역사의 중심에 세우기 위해 여자들의 낚싯대에 걸려든다. 그러나 넙치를 잡은 세 여자는 넙치를 여성 배심 법정에 넘겨 신석기 시대 이래 남성의 편에만 서 있었던 그의 죄과를 묻는다. 넙치는 긴 시간 동안 재판을 받고 벌로써 동료 넙치들이 시식당하는 장면을 지켜본 뒤에서야 발트해로 돌려 보내진다.
- 열한 명의 여자 요리사
1) 아우아: 신석기 시대의 권력자였던 세 개의 유방을 지닌 신화적인 여성. 당시에는 모든 여성들이 아우아라고 불렸다. 당시 남자들은 아우아의 젖을 먹고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였다. 아우아가 하늘에 있는 늑대에게서 불을 훔쳐와 날것을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남자들은 아우아의 통치 아래서 평화롭게 살아갔다.
2) 비가: 철기 시대의 통치자. 고라니와 물소가 많이 줄어들어, 모든 남자들은 어부가 되어야 했다. 비가는 남자들이 잡아온 대구와 철갑상어, 청어 등을 요리해 주었고, 아직 기장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늪에서 자라는 풀씨를 빻아 넣어서 물고기 수프를 만들어 냈다. 이후 비가에 의해 최초로 순무 재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민족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3) 메스트비나: 포메라니아인들의 여사제. 원시적인 신앙을 갖고 있던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러 온 아달베르트 주교에게 호박 구슬이 들어간 생선 수프를 끓여 주었다. 그후 금욕주의자였던 주교는 육욕에 불타 그녀에게 덤벼들곤 했다. 그녀도 그를 흠모했지만, 생선 대가리를 버드나무 가지에 매달고 행진하는 종교 의식을 방해하자, 쇠로 만든 국자로 그의 머리통을 내리쳐 죽여 버렸다.
4) 몬타우의 도로테아: 14세기 전성기 고딕 시대, 사람들로부터 성녀로 추앙을 받았다. 넙치의 꾀임에 빠져 넙치와 성관계를 맺기도 했다. 결혼 생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오직 종교적인 열정으로만 불타오르는 편타고행자였다. 일년 내내 기름기 없는 사순절 요리만을 했다. 집안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그녀로 인해 <설거지는 누가 하나> 하는 문제가 생겨났다.
5) 마르가레테 루쉬: 성 비르기트 수녀원의 원장. 뚱보 그레트라고도 불린다. 아무 남자나 침대로 불러들이는 자유분방한 수녀. 거위 털을 뽑으면서 교황, 군주, 기사, 농부 등 진리를 표방하고 다니면서 서로를 찌르는 모든 남자들을 비웃었다. 종교적인 문제로 사형 선고를 받은 아버지를 위해 회향 열매와 후추로 양념한 내장 요리를 만들었고, 훗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으로 귀족 페르버를 침대 위에서 엄청난 몸무게로 눌러 질식시켜 죽였고, 수도원장 예쉬케는 자꾸 먹여서 살을 찌워 죽게 했다.
6) 아그네스 쿠르비엘라: 화가 묄러와 시인 오피츠의 위해 헌신적으로 요리를 해 주며, 그들의 난로에 불을 지펴 주었다. 불과 열네 살 때 육십대 후반의 노인 묄러를, 열여덟 살 때 삼십대 후반의 오피츠를 만났다. 넙치는 아그네스를 통해 그들의 예술혼에 불을 지피려 했다고 변명한다. 훗날 마녀로 지목되어 불에 타 죽었다.
7) 아만다 보이케: 감자를 닮은 여자. 도처에 기근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 기장을 대체하여 프로이센에 감자를 들여왔다. 언제나 감자 껍질을 줄줄 벗기며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다. 감자 튀김, 감자 팬케이크, 감자 샐러드 등 각종 감자 요리를 개발했다. 프로이센 왕국의 추카우에서 요리사로 일하면서 매일 농업 노동자들을 위해 식사 준비를 했다. 빈민 구제 수프를 만든 럼포드 백작과 오랫동안 식량 문제를 주제로 편지 왕래를 했다.
8) 조피 로트촐: 혁명적인 시대 분위기에 맞게 진취적으로 살고 싶어했다. 평생 자코뱅당의 음모에 연루되어 종신형을 받은 프리츠만 바라보며 독신으로 지냈다. 사십 년이 지나 석방된 프리츠를 위해 약초 맛을 낸 식초에 절인 송아지머리, 살구버섯을 곁들인 돼지 복부살, 붉은 포도주에 담근 토끼 내장 요리 등을 내놓았다. 추카우 근방 숲에서 자라는 모든 버섯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훗날 나폴레옹 밑에서 총독을 했던 라프 장군을 위해 요리를 해 주다가 독버섯 요리로 음모를 꾀하기도 했다.
9) 레나 슈투베: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첫 남편이 1870-1871년의 보불전쟁에서 죽고 난 후, 빈민 급식소 일을 맡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프를 나누어 주며 사회주의의 꿈을 키웠다. 파업수당을 관리하기도 했으며, 두번째 남편이 1914년 향토 방위군으로 차출되어 간 후 빈민 급식소를 비롯하여 야전 취사차, 노동자 구호소 등에서 계속 수프 배급 일만 했다. 「프롤레타리아식 요리책」을 썼으나 출판되지는 못했다.
10) 지빌레 미일라우: 1960년대 <아버지의 날>, 남자 흉내를 내는 극단적인 페미니스트 여자 친구들과 놀러갔다가 그녀들에게 플라스틱 인공 성기로 윤간을 당했다. 그들에게서 떨어져 나와 숲속을 헤매던 중 폭주족 남자들에게 윤간을 당하고, 폭주족들의 오토바이에 치어 죽었다.
11) 마리아 쿠츠초라: 현재 <나>의 친척. 그단스크의 레닌 조선소에 있는 구내식당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메뉴를 제공하였다. 물가 인상 반대와 노동자치제를 위한 파업 도중 약혼자 얀이 돼지고기 양배추 요리가 가득 든 배에 총을 맞아서 죽고 난 후 돌처럼 차가워졌다.
귄터 그라스
1927년 10월 16일 폴란드의 자유시 단치히에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2차 대전 중에 청소년기를 보낸 작가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고 1944년-1946년 공군보조병, 전차병 등으로 참전했다가 미군에 의해 전쟁 포로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뒤셀도르프 예술대에서 수학하였고 1954년 서정시 대회에서 입상하여 전후 청년 문학의 대표적 집단인 <47그룹>에 가입했다. 같은 해 무용수 안나 슈바르츠와 결혼하였고 1958년 처녀작인 『양철북』 초고를 <47그룹> 모임에서 낭독하여 그해 47그룹 문학상, 이듬해 뷔히너 상, 폰타네, 테오도르 호이스 상 등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에는 독일 사민당에 입당하여 빌리 브란트를 위해 선거 운동을 벌이는 등 정치 활동을 하였고 1961년에는『고양이와 쥐』, 1963년에는『개들의 시절』을 발표하였다. 이로써『양철북』의 맥을 잇는 <단치히 3부작>을 완성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 이스라엘 등지에서 작품 낭독을 해 왔고 1976년에는 하버드대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장편『넙치』(1977),『텔그테에서의 만남』(1979),『암쥐』(1986),『무당개구리 울음』(1992) 등과 같은 대작을 발표하여 독일 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조명을 받았다. 1995년에는 독일 통일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작품『아득한 평원』을 출간하여 논쟁을 불러일으켰으며 1999년에는 그의 전 생애를 갈무리하는 장편『나의 세기』를 발표하였다. 같은 해 스웨덴 한림원은 1970년대 이후 노벨 문학상 후보로 거듭 지목되었던 그라스를 20세기의 마지막 수상 작가로 선정하였다. 2002년 지난 57년간 금기시되어 온 독일인의 참사를 다룬 문제작『게걸음으로 가다』를 발표하였다.
다섯째 달여섯째 달일곱째 달여덟째 달아홉째 달
- 작품 해설- 셋째 유방 | 제3의 길을 찾아서 (김재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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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모래 속에 온몸을 푹 파묻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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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ostein | 2019.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