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에서 들뢰즈는 <아테네와 예루살렘의 전쟁>을 펼쳐 보인다. 즉 희랍인들이 고안한 <변증법>에 유태인들의 <기호 해독>이 맞서게 된다. 누가 들뢰즈의 발견을 돕는가? 바로 유대 혈통의 프루스트이다. 철학자들이 공동의 로고스라는 태양 아래에서 보편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노력하는 동안에, 이 한심한 소설가는 사교계를 드나들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허송세월이 바로 그의 천직이었다. 프루스트는 이집트 학자처럼 세월의 지하 무덤 속에 씌어진 상형 문자들을 해독해 나갔다. 야릇한 행복을 주는 마들렌 과자, 부정한 애인의 거짓말, 남색가들 사이의 수상쩍은 눈짓 등 이 모든 기호들 속에 일생을 낭비해 가며 해독해 내야만 하는 <진리>가 들어 있었던 것이다.
1 들뢰즈 철학에서 이 책이 차지하는 중요성
들뢰즈 철학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니체와 철학』이 출판된 1962년부터 『천 개의 고원』이 출판된 1980년 사이의 19년 동안 형성되었다. 『프루스트와 기호들』의 최초의 판본은 『니체와 철학』이 발표되던 무렵인 1963년 등장했으며, 이 책의 마지막 개정판에 추가된 원고들은 『천 개의 고원』 첫 부분이 씌어지던 시기에 같이 씌어졌다. 요컨대 들뢰즈는 자기 철학의 출발부터 마감에 이르는 전 기간 동안 『프루스트와 기호들』을 개정 증보해 왔던 셈이다. 들뢰즈의 저술 활동에 있어서 유일무이한 이런 이례적인 개정 증보 과정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이는 들뢰즈가 자기 철학의 시작, 전개, 완성에 이르는 전 과정 내내 프루스트에게 자문을 구하며, 프루스트에게서 영감을 얻어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사실 『차이와 반복』, 『앙띠오이디푸스』, 『천 개의 고원』 등을 통해 피력된 그의 철학의 핵심적 사상이 이미 프루스트론에서 확인된다. 가령 고전 철학에 맞서는 새로운 사유의 형태(새로운 사유의 이미지)의 구상은 『차이와 반복』의 가장 핵심적인 주제 가운데 하나인데, 이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는 들뢰즈가 『프루스트와 기호들』에서 프루스트를 해석하며 이미 구상한 것이다. 이러한 점은 “새로운 사유의 이미지, 혹은 오히려 사유를 감금하고 있는 이미지로부터 사유의 해방을 나는 이미 프루스트에게서 발견하려고 시도했다”(『차이와 반복』의 영문판 서문)라는 들뢰즈 자신의 말에서 증명되기도 한다.
2 들뢰즈 문학 연구의 집대성, 그리고 프루스트 연구의 고전
또한 이 책은 들뢰즈 문학 연구의 집대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들뢰즈는 몇몇 작가들에 대해 단편적인 논문을 쓰기도 했지만, 책 한 권 전체를 할애해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한 것은 프루스트론과 카프카론 둘 뿐이다. 이 가운데 카프카론에서 주로 동원되는 것은 오로지 그의 후기 철학, 특히 『앙띠오이디푸스』의 개념과 이론들이다. 반면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들뢰즈 철학의 초기부터 후기에 이르는 긴 기간 동안 개정 증보되며 형성된 책이므로, 들뢰즈 문학 비평의 전 기법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들뢰즈가 어떻게 문학 작품을 분석해 나가는지, 그가 꾸며낸 비평의 요령 전부를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의 독해는 필수적일 것이다.아울러 이 책은 20세기 최대의 작가인 프루스트에 대한 많은 연구서들 가운데서도 독보적이다. 지금껏 프루스트 연구서는 많았지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부분 부분에만 제한되는 특정한 주제에 초점을 두고 씌어진 연구서가 대부분이었다. 방대하기 짝이 없는 이 소설이 작품 전체를 통관하는 비평적 안목을 쉽게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전체’의 구성과 주제를 취급한 거의 유일무이한 책이다. ‘기호 해독’이라는 하나의 주제 아래 이 소설 전체가 일관되게 해석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프루스트 연구사에서도 이 책은 기념비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 개정판, 무엇이 바뀌었나?
『프루스트와 기호들』은 7년여 전인 1997년에 처음 번역 소개되었다. 이 책의 번역 이후 벨기에 루뱅 대학에서 들뢰즈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옮긴이는 이번 개정판에서, 들뢰즈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며 축적한 새로운 연구성과들을 적극 반영하였다. 본문 중 번역을 더욱 부드럽게 하기 위해 많은 단어들이 교체되었으며, 들뢰즈의 개념들과 이론들을 소개하는 긴 역자주들도 새롭게 수정되었다. 무엇보다도 그간의 새로운 연구성과에 기반한, 165매 가량의 완전히 다시 씌어진 역자 해설이 추가되었다. 이 역자 해설은 들뢰즈의 철학과 문학론 전반을 소개하고, 그 안에서 차지하는 프루스트론의 의미를 밝힌 논문으로서, ‘들뢰즈’와 ‘문학’의 관계를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반가운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질 들뢰즈 Gilles Deleuze(1925~1995)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후 파리 8대학에서 미셸 푸코의 뒤를 이어 교수 생활을 하다가 1987년 은퇴했다. 일찍부터 철학사를 해석하는 뛰어난 역량과 독특한 관점을 인정받았다. 근대적 이성의 재검토라는 1960년대의 큰 흐름 속에서 서구 사상의 2대 전통인 경험론과 관념론을 새로운 차원에서 종합하는 시도를 보여주었으며, 현대 학문과 예술에 철학적 깊이를 더하는 활발한 작업을 통해 철학의 울타리를 넘어서는 광범위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1968년에 국가박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한 『차이와 반복』에서는 해체론적 전통이 도달한 일정한 높이 위에서 고전적 형이상학을 부활시켰으며, 1972년에는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저술한 『앙띠 오이디푸스』를 통해 기존의 정신분석에 반기를 들고 니체적 시각에서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통합하여 20세기의 고정관념을 깨뜨렸다. 주요 저서로는 『니체와 철학』, 『칸트의 비판철학』, 『베르그손주의』, 『스피노자와 표현의 문제』, 『의미의 논리』, 『천 개의 고원』, 『감각의 논리』, 『영화 1.운동-이미지』, 『영화 2.시간-이미지』, 『푸코』,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 『철학이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
제3판 서문 역자 서문 일러두기 제1부 기호들 기호의 유형 기호와 진실 배움 예술의 기호들과 본질 기억의 이차적 역할 계열과 그룹 기호들의 체계에서 복수성 사유의 이미지 제2부 문학 기계 앙띠 로고스 통과 관 찾기의 충위들 세 가지 기계 문체 광기의 현존과 기능, 거미 부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