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길엔 일어날 수 없는 일은 없다.
아니 모든 일이 다 일어난 뒤 혁명은 완성된다.”
■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조선의 흥망성쇠, 새로운 세기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소설의 탄생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은 민음사와 김탁환 작가가 새롭게 기획한 ‘소설 조선왕조실록’의 첫 작품이다. ‘소설 조선왕조실록’은 지난 스무 해 가까이 치밀하고 정확한 고증, 방대한 자료 조사에 독창적이고 탁월한 상상력과 단정하고 아름다운 문체를 더해, 역사소설의 새 지평을 연 김탁환 작가가 새로운 세기, 새로운 시대에 걸맞도록 조선 500년 전체를 소설로써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어제의 역사가 오늘의 역사로 다시 쓰이듯, 선인들의 삶을 다룬 어제의 소설 역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오늘의 소설로 다시 쓰여야 한다.
총 60여 권으로 출간될 예정인 ‘소설 조선왕조실록’이 다룰 조선 500년은 다만 흘러간 어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에 이르기까지 오늘의 삶을 향한 뜨거운 질문의 기원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인 이광수를 비롯하여 김동인, 박태원, 박종화 등의 작가들이 조선을 다뤄 왔으나, 21세기 독자들과 만나기엔 문장 감각도 시대 인식도 접점을 찾기 어렵다.
한편, 오늘날 조선을 다루는 많은 소설이나 드라마들은 말단의 재미만 추구하면서 역사로서의 품격이 사라지고 예술적 풍미를 잃은 작품이 적지 않다. 역사소설의 현대성은 사실의 엄정함을 주로 삼고, 상상의 기발함을 종으로 삼되, 시대의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하고 국학계의 최신 연구 성과를 두루 검토한 후 그에 어울리는 예술적 기법을 새롭게 선보이는 과정에서 획득된다.
‘조선왕조실록’이 궁중 사건만을 다룬 기록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두를 포괄하는 기록이듯이, ‘소설 조선왕조실록’ 역시 정사와 야사, 침묵과 웅변, 파괴와 생성의 세계를 넘나들며 인생과 국가를 탐험할 것이다. 아직 작가의 손이 미치지 못한 인물과 사건은 신작으로 발표하고, 이미 관심을 두었던 부분은 기존 작품을 보완 수정하여 펴내, 거대한 퍼즐을 맞추듯 조선을 소설로 되살리는 작업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조선의 흥망성쇠를 파노라마처럼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할 것이다.
■ 가슴에 새로운 세상을 품은 광활한 인간 정도전을 만나다
나라의 잘잘못을 평하는 훈수꾼들은 언제나 많으나, 미리 계획한 대로 한 국가를 부수고 한 국가를 세운 혁명가는 드물다. 고려 말 조선 초를 살다 간 정도전은 백성을 위한 나라를 열망했고,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다. 뼈를 깎는 자기 혁신과 민본주의, 부국강병의 의지는 21세기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특별한 울림을 준다.
정도전은 지금껏 수많은 논저와 작품에서 거듭 다뤄졌다. 그러나 혁명가의 일상에 관한 세밀한 묘사와 영혼에 대한 깊은 탐색은 부족했다. 『혁명, 광활한 인간 정도전』은 큰 나라를 향한 충성심만 가득하고 자주의 의지는 전혀 없는 고려의 왕들, 도적 떼에게 도읍지를 빼앗긴 나약한 군인들, 내세를 팔아 장사하는 종교인들, 법을 사사롭게 굴려 자기네 곳간만 채우는 관리들과 싸우며, 정치와 예술 혹은 의로움과 아름다움이 길항하고 화해하는 대장정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책사로 흔히 정도전과 한명회가 꼽힌다. 하지만 둘은 전혀 다른 인간이다. 한명회는 제도와 사상에 대한 고민은 없이, 수양대군을 용상에 앉히는 데만 집중한 반면, 정도전은 법, 제도, 종교, 국방, 도읍지, 조세, 교육 등 가장 사소한 것에서 가장 거대한 것에 이르기까지, 새 세상의 전망과 방안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김탁환 작가는 정도전의 고민을 정도전의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나열하기보다 생의 가장 빛나면서도 아픈 지점을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는 순간(1392년 3월 17일)부터 정몽주가 암살당하는 순간(1392년 4월 4일)까지, 고려라는 불꽃이 스러지고 조선이라는 동이 튼 그 18일의 광활하고 내밀한 비망록이 완성되었다. 그 하루하루를 진중함과 유쾌함이 공존하는 정도전만의 미적 감각으로 응축하였다.
그의 일기 속에는 맹자에 기반한 성리학적인 혁명, 백성을 위한 국가 건설의 염원이 가득하다. 깊고 진지한 고뇌가 생생히 정도전의 일기를 들여다봄으로써 혁명가는 어떻게 단련되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귀양살이를 가서 만난 민초들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로 가득하다. 그는 스스로를 자조하며 지배층의 허위의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백성들의 지혜에 경탄하며 큰 깨달음을 얻는다.
이 소설은 편년체와 정도전의 일기로 하루를 구성함으로써, 편년체를 통한 외면적이고 공식적인 세계, 일기체를 통한 내면적이고 비공식적인 세계를 동시에 구현한다. 뿐만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다양한 실험을 담고 있다. 그 당시 신진 사대부들이 애용하던 다양한 문체(편지, 가전체, 동물우화, 전(傳), 여행기 등)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하나의 문체만을 고집하지 않고, 그날그날 깨달음에 가장 합당한 문체를 선택하는 유연함을 보임으로써, 역사가 어떻게 문학적 옷을 입게 되는가를 보여 준다. 군더더기 없이 단정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를 통해 정도전의 번민과 고독이 절절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