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소설 예술의 진수 – 토마스 만친화력에서 괴테가 시도하고 있는 문학과 자연과학의 접목이야말로 18세기 괴기소설, 모험소설과의 단절이자 현대소설로의 결정적 첫걸음이었다. </SPAN
인간 관계에서 화학 법칙을 발견하다.
불멸의 시성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쓴 소설 『친화력』이 민음사에서 번역·출간되었다. 민음사는 그간 괴테의 전집 발간을 목표로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를 펴낸 바 있고 이번에 발행된 『친화력』은 그 일곱 번째 권이다.
이 글은 원래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에 삽입될 단편소설로 구상되었으나, 집필 과정에서 2부로 구성된 장편소설로 확대, 발전된 것이다. 네 명의 남녀 사이의 분리와 결합 과정이 ‘친화력’이라는 화학적 현상과 유추 관계에 의해 서술되고 있는 이 작품은, 소재와 이야기 방식, 도덕성의 측면에서 당시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괴테가 이 책을 발표했을 때, 아이엔베르크M. von Eyenberg의 말을 빌리자면, “마치 흉년에 빵집에 몰려들 듯이” 서적상들이 쇄도할 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괴테 자신이 ‘진기한 제목’ 이라고 시인하고 있듯 이 소설의 제목 ‘친화력(Die Wahlverwandtschaften)’은 화학 용어이다. 즉, 서로 다른 원자들끼리 원래의 결합을 버리고 새로이 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내려는 성질을 가리키는 말이다. 괴테는 이러한 자연 법칙을 인간 관계에 접목하여 인간들 사이의 반응을 묘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원래 사이 좋은 부부였던 에두아르트와 샤로테 사이에, 에두아르트의 친구인 대위와, 샤로테의 친구 딸인 오틸리에가 끼여들면서 이 네 사람이 일으키는 반응이 이 소설의 중심을 이룬다. 곧, 각각의 친화력에 따라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샤로테와 대위 사이에는 애정이 싹트게 된다. 그러나 자제력이 강하고 생각이 깊은 샤로테와 대위는 곧 자신들의 애정을 다스리는 반면, 맹목적으로 애정에 빠져드는 성향을 지닌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새로 발견한 사랑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처럼 \’친화력\’은 화학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사이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 같은 착안에 기반해서 괴테는 이 소설에서 사건의 전개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과학자적인 냉정함과 실험 정신을 가지고 집중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소설 『친화력』은 독일문학사상 \’현대 소설\’로의 결정적 첫발을 내딛은 작품이라고 뒤늦게 평가받고 있기도 하다.
“이 작품에는 한 줄이라도 내가 체험하지 않은 것은 없지만, 한 줄이라도 체험 그대로 쓴 것도 없다. ” – 괴테
그러나 실제로 이 작품이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그 속에 괴테 자신의 경험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를 떠나 예나에 체류하게 된 괴테는 18세의 민나 헤르츨리프(Minna Herzlieb)를 만나, 갑작스러운 애정을 품게 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가 60세. 사실 그는 그녀를 10세 정도부터 알고 있었는데, 몰라볼 정도로 성숙하고 아름다워진 모습을 대하고 새삼스러이 정열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 것이다. 스스로도 위험하다고 느낄 정도의 이 위험한 열정에 놀란 그는 되도록 그녀의 집을 멀리하였으며 곧 그곳을 도망치듯 떠나버렸다. 그때의 경험이 『친화력』에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가 도덕적인 측면에서 세간의 비난을 살 만한 애정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괴테는, 남녀 사이에는 불가항력적인 ‘친화력’이 있어 격렬한 애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는, 그 자신의 실제적인 경험을 드러내고 있다. 그 애정의 끝이 죽음인 것으로 이 작품을 끝맺으면서도 괴테 자신은 도덕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단지 맹목적인 격정을 다스리고 정화해서 행복한 삶으로 향해야 한다는 따뜻한 휴머니즘을 내보일 뿐이다.
『친화력』은 자유로운 연애와 이혼이라는 낭만주의적 요소를 기본 주제로 한다. 그러나 ‘친화력’이라는 불가항력적인 자연 법칙과 인위적인 도덕 법칙, 자유로운 사랑을 향한 열정과 자제할 줄 아는 분별력 이 두 가지 사이에서 등장인물을 방황케 함으로써 그 조화를 모색한다. 그러면서도 인간 상호간의 마음의 깊이를 투영해 주는 특유의 시적인 언어와 엄격한 작품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한마디로 『친화력』은 낭만주의를 넘어서는 노년기 괴테의 대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하겠다.
<줄거리> 에두아르트와 샤로테는 각각 다른 사람과 사별한 끝에 만나 결혼한 부부이다.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에 에두아르트는 마땅한 할일이 없어 괴로워하는 친구, 대위를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성으로 부른다. 한편 샤로테는 기숙학교에 맡겨 놓은 친구의 딸 오틸리에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듯해 안타까워하다가 그 사실을 알게 된 에두아르트의 권유로 오틸리에도 집으로 데려온다. 그리하여 서로 만난 네 사람은, 처음엔 에두아르트와 대위, 샤로테와 오틸리에가 친하게 지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관계에 변화가 생겨난다. 즉, 샤로테와 대위,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 사이에 애정이 싹트고 만 것이다.
샤로테와 대위는 자제심이 많고 사려 깊은 인물들이라 그냥 스쳐가는 사랑으로 생각하고 애정을 억누르지만, 에두아르트와 오틸리에는 새로 발견한 사랑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오틸리에와 헤어질 것을 부인에게 종용받은 에두아르트는 오틸리에를 성에서 떠나보내지 말라고 한 후 자신이 떠난다. 그러고는 자신이 살아남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자신들의 사랑을 허락하는 것이라고 믿고 위험한 전쟁터로 떠난다. 대위 또한 일거리를 찾아 성을 떠나게 된다.
남은 샤로테는 에두아르트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낳고 오틸리에는 보모역을 착실히 하며 마음을 잡으려 한다. 그러던 중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온 에두아르트는 이제 자신의 사랑을 가로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믿고 소령에게 부탁하여 자신과 오틸리에가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대위는 샤로테를 만나러 떠나고 몰래 자신의 성 근처를 헤매던 에두아르트는 산책 나온 오틸리에를 만나 사랑을 속삭이지만, 돌아가는 길에 오틸리에는 안고 있던 아기를 물에 떨어뜨려 죽이게 된다. 자기를 잊은 과도한 열정의 결과로 벌을 받은 거라고 생각한 오틸리에는 결국 삶의 의지를 잃어버리고 식음을 전폐, 죽음에 이르고 에두아르트 역시 뒤따라 죽는다.
1부2부해설/ 인간 관계의 실험실로서의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