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 있잖아
시리즈 오늘의 젊은 작가 28 | 분야 오늘의 젊은 작가 28, 한국 문학
“과거의 난 그랬다.
잘해 주기만 하면 돌멩이도 사랑하는 바보였지.
하지만 열네 살이 된 지금은 다르다.”
누구도 좋아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열네 살
소년의 눈에 비친 이상하고 아름다운 세상
정용준 장편소설 『내가 말하고 있잖아』가 민음사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열네 살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 다니며 언어적, 심리적 장애를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말을 더듬는 인물은 그간 정용준 소설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지만 이번 소설에서는 그 내면 풍경을 열네 살 소년의 목소리로 들려줌으로써 언어적 결핍에서 비롯된 고통과 고투의 과정을 한층 핍진하게 보여 준다. 언어를 입 밖으로 원활하게 표현할 수 없는 심리적 재난과도 같은 상황으로 인해 소년은 가족은 물론이고 학교, 친구 등 자신이 속한 세계로부터 배제된 채 유령처럼 겉돈다. 스스로를 깊이 미워하면서, 또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들을 향한 희미한 복수를 다짐하면서.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등단 이후 10여 년의 시간 동안 황순원문학상, 한무숙문학상, 문지문학상, 젊은작가상 등 굴지의 문학상을 석권하며 고유한 시선과 자리를 만들어 온 정용준 작가가 오랫동안 구상, 집필, 퇴고한 이야기다. “타인의 삶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허물어 가는 섬세한 감정적 파동의 기록은 누군가를 진심으로 이해한다는 것의 궁극적인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는 말은 황순원문학상 수상 당시 어느 심사위원의 평가이지만, 이는 정용준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말인 동시에 그 정점이라 할 만한 이번 소설에 대한 정확한 예언이기도 하다. 세상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은 소년이 언어 교정원에서 만난 사람들과 관계를 짓고 마음속에 길을 내며 세상과 연결되는 자신만의 문을 만들어 가는 과정은 타인의 삶에 대한 다정한 이해를 경유해 자신의 삶에 대한 뜨거운 긍정으로 이어지는 길고도 짧은 여정이다. 이 여정을 함께하는 독자들에게 정용준이라는 세 글자는 잊을 수 없는 감동으로 각인될 것이다.
■ 세기말에 우리는
“1999년 10월의 마지막날. 늦은 오후 왕십리는 황량했다. 이슬비가 내렸고 사람들은 옷깃을 세운 채 움츠리고 걸었다.” 소설 속 어느 하루의 풍경이지만 세기말에 우리 사회는 정말 이슬비 내리는 늦은 오후 어느 황량한 길 위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밀레니엄 버그가 발생해 엘리베이터가 멈출 거라고 했고 인터넷이 멈춰 전산이 마비될 거라고 했으며 은행이 털릴 수도 있다고 했다. 비행기가 추락할 거라는 얘기도 있었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종말이 올 거라 믿는 사람도 있었다. 다가오는 2000년을 앞두고 갖은 예언들로 들떠 있던 그때, 어떤 자리는 IMF가 할퀴고 간 폐허 위에 흉터를 드러내고 있었고 사람들은 말을 잃은 듯 침묵하고 있었다. 그때 그 시절, 세상이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도,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사회도 모두 실어증의 시대를 지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IMF 키즈’로서 정용준 작가가 그리는 세기말의 풍경이다.
■ 외로운 열네 살 인생
‘나’는 1급 말더듬이다. “넌 왜 사냐? 쓸모없고 말도 못 하고 친구도 없고 늘 괴롭힘만 당하잖아. 왜 살아?” ‘나’에게는 말하는 데 어려움을 느낀다는 것 말고도 골치 아픈 일투성이다. 학교에서 외톨이인 건 둘째 치고 국어 선생이라는 자가 걸핏하면 일어나서 책을 읽으라고 시켜 대는데 ‘나’는 그 일방적인 행위에 석연치 않은 저의가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두운 법. 진짜 적은 가까이에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엄마다. 엄마는 ‘나’와 달리 잘해 주는 사람과 금방 사랑에 빠져 버리는 바람에 상처도 많이 받는다. 언제나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엄마는 집에 오면 술을 마신다. 엄마의 상냥한 목소리가 듣고 싶으면 ‘나’는 114로 전화한다. 전화 안내원으로 일하는 엄마의 친절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전 애인과 다시 만나는 중인데, 심지어 그 애인과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나’는 걸핏하면 ‘나’를 무시하는 그 애인이라는 작자를 죽이고야 말겠다고 다짐한다.
■ 언어 교정원에서 만난 세계
“고장 난 사람들만 모아 둔 창고 같은 곳일까?” 엄마의 손에 이끌려 마지못해 찾은 언어 교정원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곳 같다. 온 동네 이상한 사람은 다 모여 있는 것 같다가도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그야말로 각양각색. 이내 쓰러질 것 같은 할머니, 얼굴이 빨간 남자 어른, 인상이 차가운 여자 어른,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과 항상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왜소한 남학생, 허공에 타자를 치듯 쉴 새 없이 손가락을 움직이며 불안하게 앉아 있는 청년, 까만 뿔테 안경 너머 묘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더벅머리 아저씨. 그러나 이런저런 교정원을 전전한 나에게 이번만큼은 다를 것 같다는 느낌이 온다. 말하기 연습, 자기 이야기하기 연습, 이름 바꾸기, 자신감 갖기 연습…… 연습을 거듭하는 사이 달라지는 건 말하기 기술만은 아니다.
■ 가까스로 말하기, 마침내 글쓰기
사람들에게는 모두 자기만의 언어가 있다. 『내가 말하고 있잖아』는 말하기를 어려워하던 한 소년이 말하기의 어려움을 기술적으로 극복하는 데에서 나아가 진짜 자신의 언어를 찾아가는 과정을 다룬 한편의 성장 소설이자 문학에 대한 메타포이기도 하다. 영화 「일 포스티노」에서 봤던 아름다운 우정과 시에 대한 비유들이 소설의 모습으로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낙서는 일기가 되고 일기는 소설이 된다. 눈물이 쏟아지려 하면 사탕을 입에 넣던 소년은 이제 눈물에 섞인 감정을 노트 위에 쏟아 낸다. 노트위에 쏟아 내고 나면 눈물은 이야기가 된다. 수많은 밤과 낮을 건너 완성된 이야기가 이제 당신 앞에 도착했다.
■추천사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일의 지난함에 대해. 언어 장애를 불러일으키게 된 정서적 방임 혹은 정신적 신체적 폭력에 대해. 어리고 유약한 존재들에게 가해지는 부모를 비롯한 어른들의 부주의함에 대해서도 새삼 숙고하게 해 주는 이 소설은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에서 소년과 같은 힘겨움을 안고 매일매일 아프고도 충만한 기록을 이어 나가고 있을 어떤 고독하고도 단단한 마음을 떠올려 보게 한다. 그 마음들로 인해. 그 마음들과 함께. 그 마음들 곁에서. 이상한 위로를 받는 동시에 말없는 응원을 보내고 싶어지는 것. 그것이 이 소설의 작고도 큰 미덕이라 하겠다. -이제니(시인)
■본문 발췌
“지금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좋지 않다. 안녕하시냐고? 아니. 하나도 안녕하지 않다. 하나도.”
“나는 친절한 사람을 싫어하겠다. 나는 잘해 주는 사람을 미워하겠다. 속지 않겠다. 기억해.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내 편은 아무도 없어. 그러니까 바보 멍청이 이 똥 같은 놈아.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
“하늘 끝까지 헹가래질하다가 마지막에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웃게 만든 다음 울게 만들 거잖아. 줬다가 뺏을 거잖아. 내일이면 모른 척할 거잖아. 이해하는 척하면서 정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말뿐이잖아. 결국 다 그렇잖아. 그러니까 당하면 안 된다. 그땐 진짜 끝나는 거야. 끝.”
“말을 잘하게 해 주는 곳이 아니야. 말을 하게 해 주는 곳이지. 용기가 없는 사람에게 용기를 내라고 할 순 없는 법이거든. 용기가 부족한 사람에게는 용기를 내라고 할 수 있지만 용기란 게 눈곱만큼도 없는 사람에겐 그렇게 말해선 안 돼. 당연하지. 낼 용기가 없으니까. 힘없는 사람에게 힘내라는 말도 이상해. 힘이 있었으면 힘냈겠지. 안 그래?”
“넌 지금 용기도 없고 힘도 없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너에게 이렇게 말할 거야. 천천히 말해. 차분하게 말해 봐. 떨지 마. 용기를 내!”
“할 수 있어. 내가 이 말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그 선생은 알았을까?”
“사람들은 줄줄 말을 참 잘해. 써도 써도 넘치는 말의 바다 같은 것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는 그런 게 없어. 플라스틱 수조 같은 곳에 한 모금 정도의 물만 바닥에 남아 있거든. 완전히 텅 비어 있는 사람도 있어. 수조가 깨진 사람도 있고 수도꼭지가 고장 난 사람도 있어.”
“아무것도 누구에게도 기대하지 말고 기대지도 말자.”
“처방전은 내 손에 나무로 깎은 엄지 크기만 한 하마를 올려놨다. 머리에 열쇠를 연결할 수 있는 작은 고리가 있었다… 위대한 동물이야. 겉보기엔 돼지나 소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순하고 멍청할 것 같지만 아니야. 강하고 누구에게도 당하지 않아. 아프리카에서 가장 무서운 동물은 사자나 코끼리가 아닌 바로 하마란다. 하마 같은 사람이 되렴. 약해 보여도 강할 수 있어. 맘만 먹으면 누구든 이길 수 있고.”
“이상하게도 탁구는 공격적으로 달려드는 선수보다 셰이크핸드를 쥐고 방어하면서 경기하는 선수들이 더 많이 승리해. 세계적인 선수들도 대부분 셰이크핸드이고. 잘 새겨들어. 잘 방어하는 것, 공격하지 않더라도 일단 부드럽게 넘기는 것, 그게 중요한 거야. 계속 잘 방어하는 건 공격보다 훨씬 강한 공격이거든.”
“이런 이야기를 왜 하는지 모르겠는데 암튼 부모들이란 그렇단다. 잘해 주다가도 때리고 사랑하는 말로도 상처를 주곤 하지. 그러니까 네가 이해해. 다 그러려니 해. 그리고 미워해. 마음껏 미워해. 괜찮아. 일기에 죽이고 싶다고 마음껏 써도 되고. 그런데 그걸 말로 행동으로는 하지 마.”
내가 말하고 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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