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아류라는 감정에서 벗어나고 싶다.\" 카프카의 소외와 프로이트의 강박이 창조한 섬뜩한 세계

찌꺼기

원제 Remainder

옮김 황소연 | 톰 매카시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0년 4월 30일 | ISBN 978-89-374-8304-2

패키지 반양장 · 신국판 변형 145x210 · 360쪽 | 가격 13,000원

책소개

사고 보상금으로 100억이 넘는 거금이 생겼다. 그런데 감정은 메말라 가고 행동거지는 부자연스러워졌다. 영화 속 배우처럼 매끄럽게 움직일 수는 없을까? 과거 환희를 느끼던 순간으로 돌아갈 순 없을까? 백만장자가 못 할 일이 있겠는가! 「트루먼 쇼」에서처럼 거대한 세트장을 만들어 피아니스트, 요리사, 오토바이광 등을 상주시키고 희미한 기억 속의 장면들을 똑같이 재연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점점 가짜라는 느낌에 시달린다. 이번엔 강도를 높여 드라마틱한 갱들의 복수전과 희대의 강도 사건들을 반복적으로 재연하는 놀이에 빠져든다. 그래도 여전히 진짜가 아닌 아류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블레이드 러너」의 복제 인간처럼 진짜가 되기를 갈망한다. 어떻게 해야 진짜가 될 수 있을까?
▶ 이 위협적인 섬뜩함은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큼 걸출하다. ─《인디펜던스》▶ 신선하리만치 별스럽고 지적인 모험. ─《가디언》▶ 음울한 유머와 특유의 냉담한 내러티브, 그리고 체계적인 주제의 확대가 돋보이는 소설, 단순한 두뇌 퍼즐 이상을 선사하는 작품, 흥미로운 만큼이나 충격적인 철학 소설. ─《뉴욕 타임스 북 리뷰》▶ 정밀함, 초현실주의적 논리, 교활한 위트가 있는 소설. ─《옵저버》

편집자 리뷰

★ 현대인이 숭배하는 돈, 백만장자의 미치광이 잔혹사
 
로또는 현대 인간의 욕망을 압축적으로 상징한다. 여기 로또로 인해 파괴되는 인간의 정신을 상징하는 섬뜩한 인간상이 있다. 주인공은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에 맞아 정신을 잃다가 깨어 보니 기억은 가물가물하고 몸은 말을 듣지 않는다. 그의 변호사는 환호를 질렀다. ‘그들’로부터 850만 파운드라는 거금을 받아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조건은 “사고의 본질과 세부 사항을 공개적으로 발설해서도 안 되고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입에 지퍼를 채우라”는 말이다.
 
하지만 떼돈이 굴러 들어오는 그 순간에 그는 무덤덤하다. 좋아서 춤을 춰도 모자랄 판에 50만 파운드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8만 있다면 더 좋을 텐데.” 하고 그는 생각한다. 50만 파운드는 그에게 돈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더더기요 잔해요 파편일 뿐이다. 이것은 분명 정상적인 생각은 아니다. 미치광이 잔혹사의 서곡이 울린 것이다. (옮긴이의 글)
 
독자는 1인칭 시점인 주인공의 생각과 동선을 차분하게 따라가면서 그에게 일어난 일들과 그의 모든 주변 인물들을 숙지하게 되지만, 정작 이 백만장자의 이름조차 알지 못한다. 그 많은 돈을 갖고도 제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는 일개 하찮은 인간일 뿐이다.
 
당신이 백만장자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주인공은 어느 날 너무나 생생한 데자부와 맞닥뜨리고는 그 기억의 한 조각을 그대로 재연하기로 맘먹는다. 기억 속의 건물과 사람들을 그대로 재연하는 데 몰두한다. 비슷한 건물을 구입하고 거기에 재연자들을 상주시키고 기억 속의 장면들을 그대로 반복적으로 재연시킨다. 마당에서는 오토바이광이 오토바이를 수리하고 있고,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리며, 아래층에서는 주부가 간을 요리하는 냄새가 올라와야 한다. 그리고 그 재연물과 똑같은 모형을 만든다. 간 요리 부인 인형을 손에 집어 들고 뒤뚱뒤뚱 걸어 내려가 오토바이광 인형을 만나게 하면, 실제로 간 요리 부인이 밖으로 나와 마당에서 오토바이광을 만나 이야기를 한다. 주인공은 이처럼 꼭두각시 놀리듯 자신만의 왕국에 군림하게 된다.
 
근대 이후 ‘개성’이 중요시되면서 남과 ‘다른’ 것이 미덕이 된 현대에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가르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어렵게 되었다. 미래 가장 촉망받는 직업 가운데 하나가 정신과 의사이며, 우울증은 너무 흔한 것이 되어서 이제 우울증을 비정상으로 넣기가 망설여질 정도다. 『찌꺼기』의 주인공은 과연 미쳐 가고 있는 것일까? 그를 미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 가짜라는 느낌, 아류라는 열등감에 시달리는 인간
 
주인공은 사고 이후 모든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에 시달리며 시종일관 진짜에 집착한다. “가희 ‘진짜 집착증’이라 할 만하다.”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보통 사람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는 동작마저 그의 의식 세계로 밀고 들어온다. 그는 당근을 들어 올리는 단순한 동작을 의식의 차원에서 수없이 반복 연습한다. 뇌와 말단기관 사이를 연결하는 새로운 명령 체계를 만들기 위해. 순환과 연결, 이 두 가지는 그가 다시 보통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생각이 많으면 피곤한 법인데, 주인공은 아마도 정상인보다 몇 배는 더 피곤하지 않았을까? 생각 없이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진짜’에 대한 갈망. 이것은 실제 일어난 사건을 재연하고 싶은 그의 욕망에 불을 붙이고, 그 욕망은 실제와 융합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그를 지배하게 된다. 한편, 이런 순환과 연결이라는 과제를 수행하던 주인공의 내부에는 어느덧 물질에 대한 혐오감이 싹튼다. 물질은 그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그런 혐오감은 물질에 대한 정복의 의지를 낳는다. 점차 실제와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그는 정복의 의지를 활활 태우며 장애물인 물질과의 투쟁에 나선다. 그렇다면 주인공에게 나머지는 어떤 의미일까? 파편, 군더더기, 자투리, 잉여물, 조각, 토막, 찌꺼기. 나머지는 그에게 불완전한 물질이자 무용지물이며 혼란이다. (옮긴이의 글)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으로 유명해진 필립 K. 딕의 SF 고전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는 일찍이 사이보그들의 정체성을 다루면서 무엇이 더 인간적인가에 대한 질문을 통해 인간성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찌꺼기』의 주인공은 사이보그가 아니면서도 필립 K. 딕의 안드로이처럼 모든 일상적 행동에서 자연스러워지기 위해 애쓰지만, 무엇으로 진짜는 보장받을 수 있을까?
 
주인공의 재연 놀이는 강도가 점점 높아 간다. 결국 희대의 강도 사건을 모방하기에 이른다. 비행기 격납고를 빌려 취지크 거리에 있는 은행을 그대로 재연한 후 무엇이든 훔쳐 내는 것으로 유명하나 지금은 범죄심리학을 강연하고 있는 에드워드 새뮤얼스를 만나 은행 강도 사건을 실제처럼 재연한다. 그러나 여전히 가짜라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진짜가 될 수 있을까. 급기야 격납고가 아닌 취지크에 있는 진짜 은행에서 재연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실제 은행원과 고객들을 상대로 한다는 것뿐.
 
그것은 한 번도 일어난 적이 없었다. 게다가 실제 사건이 아니라 연출된 연극이었다. 비록 진짜 현장에서 하는 연극이기는 했지만 아직은 한 번도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었다. 언제나 그것은 다가올 예정이자 우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맴도는 미래였다. 나와 다른 재연배우들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종교의 광신도였다. 우리는 우리의 신이 나타날 날을, 우리 앞에 현신할 날을, 우리를 구속(救贖)할 날을 고대하며 인내했다. 우리의 행위는 봉헌 의식이자 소망의 몸짓이었다. (열여섯 번째 장)
 
 
 
★ 첨단기술이 지배하는 꼭두각시 왕국에 군림한 파라오
 
주인공이 혼자만의 세계에서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조정하는 데 몰두할수록 현실과는 동떨어져 간다. 친구였던 캐서린이 짐바브웨에서 날아왔지만, 그는 재연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캐서린과 에로틱한 순간을 망쳐 버린다. 주식에서는 분산 투자를 하지 않고 통신과 첨단 기술에만 100퍼센트 투자한다. 자신만의 왕국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통신과 첨단 기술만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첨단 기술의 사고로 인해 자신의 머리 위로 수상한 것이 떨어졌는데도 말이다.
 
주인공은 재연을 할 때마다 황홀경에 빠져 들다가 끝내는 종종 기절한다. 의사는 주인공의 집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하면서.
 
흔히 트라우마에 대한 반응으로 체내에서 자생적으로 오피오이드(마약 성분과 유사한 화학 전달물질)가 분비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몸이 자체 진통제를 처방하는 겁니다. 아주 강력한 진통제죠. 문제는 그 쾌감에 있습니다. 그 강한 쾌감 때문에 신체가 그것을 더 갈망하게 되는 것이죠. 트라우마가 강할수록 진통제도 강하기 때문에 재분비에 대한 욕망이 더 강해집니다. (본문 열세 번째 장)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데는 주인공의 오른팔 나즈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즈는 어느새 주인공의 프로젝트에 전심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이렇게 많은 정보를 다룬 적이 없었거든요.”라며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준 것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기술과 정보에 대한 관리와 통제는 이 세대의 새로운 종교가 되었다.
 
그의 눈은 이제 다시 반짝이고 있었다. 그랬다. 나즈는 광신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숭배 대상은 종교가 아니라 관리와 절차였다. 그는 흠뻑 취해 있었다. 내 프로젝트가 그의 앞에 터놓은 정보 관리의 도로를 타고 환희를 향해 앞으로 내달리는 중독자. 나의 집행인. (열세 번째 장)
 
주인공은 생존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나자 다른 욕구에 몰두한다. 통제, 정복, 권력의 욕구. 하지만 그는 돈을 얻은 대신에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는 변별력을 잃어버렸고, 머릿속에 존재하는 이미지와 자신의 욕구에만 집착하면서 점차 미쳐 간다. 그는 자신의 재연극에 투입되었던 모든 사람들을 없애 버리기로(그는 ‘증발’이라는 표현을 쓴다.) 결심하고 나서 욕조에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파라오였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나의 충실한 노예였다. 나는 그들이 나를 따라 내 마지막 항해에 동참하는 최초의 일원이 되도록 허락함으로써 그들에게 보답할 것이다. 물에서 수증기가 피어올라 벽의 금을 지나 위로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백성들이 모두 위로 들어 올려지고, 추출되어,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안의 성자들처럼 틀에 갇혀 영원히 각자의 동작을 수행하는 모습을 그렸다. (본문 열다섯 번째 장)
 
권력의 정점에 선 주인공은 자신의 위치를 영원히 고정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욕구를 채워 주는 백성(?)들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그 상태 그대로 사라지는 길밖에 없다. 그래서 다 함께 증발하기로 결심한다. 실로 권력은 무서운 마약이다. … 조직심리학자 데이비드 맥클랜드(David C. McClelland)의 성취동기 이론에 의하면, 인간에게는 남을 통제하고 자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게끔 하려는 권력 욕구가 기본적으로 있는데, 이는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서 존경 및 자아실현이라는 상위 욕구에 해당된다. 니체는 모든 것이 권력 의지의 산물이라고 했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바람이다. 그런데 그 마음 안을 들여다보면 ‘더’ 잘 먹고 ‘더’ 잘살고 싶다, ‘남들보다’ 더 잘살고 싶다는 욕심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이 ‘더’와 ‘남들보다’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권력이며, 그 권력의 핵심에는 돈이 있다. (옮긴이의 글)
 

이 소설의 마지막 30쪽, 즉 주인공의 심리 탐구에서 갑자기 사건 중심으로 호흡이 빨라지다가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8자를 그리며 오도 가도 못하는 황당한 결말은, 20세기라는 ‘심리학의 시대’를 통과한 독자에게도 가히 충격적인 물음을 던진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작가 소개

황소연 옮김

연세대학교 의류환경학과를 졸업하고 출판 기획 및 영어를 한국어로,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일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서머싯 몸의 『인생의 베일』, 『더티 잡』, 『찌꺼기』, 『파랑 피』, 『점퍼 3』, 『말리와 나』, 『믿음의 엔진』,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입니다』, 『호오포노포노의 비밀』 등이 있다.

톰 매카시

1969년 출생.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을 모델로 만든 INS(International Necronautical Society)에서 활동하고 있다. 『찌꺼기』는 먼저 프랑스에서 실험문학을 출간하는 작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는데, 입소문을 통해 높은 평가를 얻자 영국과 미국의 대형 문학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저서로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문학비평서인 『땡땡이와 문학의 비밀』이 있으며, 현재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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