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사나이

원제 Der Sandmann

E.T.A. 호프만 | 옮김 신동화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1년 12월 10일 | ISBN 978-89-374-6396-9

패키지 반양장 · 변형판 132x225 · 212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인간 심리의 비밀스럽고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독일 낭만주의 작가 호프만

 

환상 문학, 공포 소설의 선구자 호프만의 정수가 담긴 신비로운 단편 소설집

 

몽환과 현실을 넘나드는 낯설고 기이한 이야기, 매혹적이고 섬뜩한 환상의 세계

 

“휘 — 휘 — 휘! — 불타는 원 — 불타는 원아! 돌아라, 불타는 원아—

즐겁게 — 즐겁게! — 나무 인형 휘 예쁜 나무 인형아, 돌아라—.”

 

 

▶ 안개와 꿈으로 이루어졌으며 환상적 인물들이 등장하는 이 세상이 아닌 세계, 이것이 호프만의 세계다.

─ 슈테판 츠바이크

 

▶ 호프만은 문학에서의 섬뜩함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대가다. ─ 지크문트 프로이트

 

편집자 리뷰

■ 환상소설의 선구자 E.T.A. 호프만, 꿈과 현실을 오가는 삶과 작품

   매혹적이면서 섬뜩한 환상의 세계로 초대합니다

 

환상 소설과 공포 소설의 선구자이자 독일 낭만주의 대표 작가,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기괴함과 섬뜩함, 유머와 풍자로 독자를 매혹하는 E.T.A. 호프만의 단편 소설집 『모래 사나이』가 민음사세계문학전집 396번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호프만이 남긴 수많은 단편 소설 중 총 세 작품을 선정하여 수록했다. 「모래 사나이(Der Sandmann)」는 호프만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단편이며, 뒤를 잇는 「이그나츠 데너(Ignaz Denner)」는 한국어로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는 으스스한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팔룬의 광산(Die Bergwerke zu Falun)」은 오래전에 한 차례 번역된 적이 있으나 국내 독자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작품이다. 독일 낭만주의의 대표 작가인 호프만은 환상과 광기와 불안을 소재로 삼아 작품 속에서 환영과 유령과 도플갱어와 악마를 소환한다. 낯설고 섬뜩하고 기이한 소설들은 이성적이고 무미건조한 현실의 법칙을 뒤흔들고, 꿈과 현실 사이를 곡예하듯 오가며 환상적인 마법의 왕국이 우리 삶의 일부임을 매혹적으로 증명해 낸다.

어느 날 불길한 청우계 장수 코폴라를 만나며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고 점차 광기에 빠져드는 나타나엘의 이야기를 그린 「모래 사나이」. 선과 악의 사투와 뒤엉킴을 숨 막히게 보여 주는 「이그나츠 데너」. 외딴 숲에서 사냥터지기로 아내와 가난하게 살아가는 안드레스네 집 문을 두드리는 낯선 남자 이그나츠 데너, 아내의 병을 고쳐 주고 돈과 보물을 건네는 그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스웨덴 팔룬의 광산에서 있었던 실화를 모티프로 한 애절하고 환상적인 사랑 이야기 「팔룬의 광산」. 어머니를 잃고 세상에 환멸을 느끼는 젊은 선원 엘리스 앞에 나타난 한 늙은 광부. 엘리스는 늙은 광부의 조언에 따라 팔룬의 광산으로 가 광부가 되고 신비로운 땅속 세계에 완전히 매혹되고 마는데…….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1776~1822)은 19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 낭만주의 작가이다. 1776년에 대학자 칸트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호프만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두각을 드러냈지만 법조인 가문인 외가의 전통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법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다. 호프만은 생애의 많은 시간을 작곡가, 악장, 음악 비평가 등으로 활동하며 음악에 엄청난 열정을 쏟았다. 스스로를 무엇보다 음악가로 여기며 끊임없이 성공을 꿈꿨고 야심차게 작곡한 오페라 「운디네(Undine)」를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기도 했다. 반면 문학 작업은 음악만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 일필휘지로 빠르게 연이어 소설을 써 내려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호프만에게 성공을 안겨 주고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그의 문학 작품들이다.

빛으로 상징되는 계몽주의의 이성과 합리성에 반발하며 자아의 주관성과 초자연적인 것, 꿈과 예감을 강조한 것이 초기 낭만주의였다면, 호프만은 인간 심리의 비밀스럽고 어두운 면에 주목한 후기 낭만주의의 작가로 분류된다. 호프만은 환상 문학, 공포 소설, 추리 소설의 선구자로서 에드거 앨런 포, 니콜라이 고골,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빅토르 위고, 오노레 드 발자크, 샤를 보들레르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그의 삶과 작품을 소재로 삼은 슈만의 피아노곡 「크라이슬레리아나」(1838),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1881), 차이콥스키의 발레 「호두까기 인형」(1892) 등을 통해 음악사에도 호프만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호프만의 기이한 소설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적 현실을 뒤흔든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현실 감각을 잃고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 버린 낭만적 자아를 경계하고 풍자하기도 한다. 
바로 이 점이 호프만의 탁월함이자 독특함이다.”(옮긴이의 글에서)

 

■ 「모래 사나이」: 작가 호프만의 정수를 보여 주는 섬뜩한 걸작

 

「모래 사나이」는 작품집 『밤의 풍경들』의 첫머리에 실린 단편으로 호프만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 주인공 나타나엘이 어느 날 불길한 청우계 장수 코폴라를 만나며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끔찍한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결국 광기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린 이 이야기는 오늘날 독자에게도 여러모로 기괴하고 충격적이면서 흥미로운 구석이 많다.

이 작품은 그동안 무수한 해석을 낳았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소논문 「섬뜩함(Das Unheimliche)」에서 제시한 분석이다. 프로이트는 아이들의 눈을 뽑아 가는 섬뜩한 모래 사나이의 이미지에 주목하여 이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으로 풀이한다. 즉 눈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거세 불안과 연결 짓는 것이다. 이때 나타나엘의 눈을 뽑으려는 코펠리우스와 그것을 말리는 나타나엘의 아버지는 분열된 아버지상, 곧 나쁜 아버지와 좋은 아버지를 상징하며 이 대립 관계는 코폴라와 스팔란차니 교수를 통해 반복된다. 그리고 스팔란차니의 딸로 불리는 올림피아는 작품 속 구도상 나타나엘과 동일성을 가지는데(코펠리우스-아버지-나타나엘/ 코폴라-스팔란차니-올림피아) 때문에 그녀에 대한 나타나엘의 사랑은 나르시시즘적이라고 분석한다.

눈 모티프는 일반적으로 인식의 문제와도 연관된다. 인간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때 가장 중요한 매개체가 바로 시각이다. 예민한 나타나엘은 눈과 관련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정신적 혼란과 불안을 겪는다. 청우계 장수 코폴라가 내놓은 안경들은 이러한 나타나엘을 경악과 공포에 몰아넣으며, 나타나엘이 구입한 망원경은 그의 눈을 홀려서 자동인형인 올림피아를 진정한 영혼을 가진 아름다운 여인으로, 반대로 인간인 클라라를 생명 없는 나무 인형으로 보게 만든다.

 

이제야 비로소 나타나엘은 올림피아의 너무나도 아름다운 얼굴 생김새를 알아보았다. 
오직 눈만이 이상하게 굳고 죽은 듯 보였다. 하지만 망원경을 점점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흡사 올림피아의 눈에서 젖은 달빛이 떠오르는 듯했다. 마치 이제야 시력이 점화된 듯 눈빛이 
점점 더 생기를 띠며 타오르는 것처럼 보였다.(43쪽)

 

원래대로라면 사물을 더 똑똑하고 명확하게 인식하게 도와야 할 망원경이 여기에서는 오히려 눈을 흐리며, 외부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여 주는 대신 내면의 망상을 증폭하는 역할을 한다. 또 하나 중요한 모티프는 자동인형이다. 기계론적 유물론이 확산되고 과학기술이 발달한 18세기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나 인간의 형상을 모사한 기계들이 다수 발명되었다. 자크 드 보캉송의 ‘플루트 연주자’나 ‘소화하는 오리’, 그리고 ‘체스를 두는 터키인’ 등이 그 예다. 이러한 자동인형에 관심을 가지고 「자동인형(Die Automate)」이란 단편을 쓰기도 한 호프만은 「모래 사나이」에도 자동인형 올림피아를 등장시킨다. 그런데 나타나엘이 보기에 올림피아는 차갑고 ‘산문적인’ 클라라나 일반인들과 대비되는 고결하고 ‘시적’인 마음씨와 감수성을 가진 남다른 아가씨다. 이를 통해 호프만은 과도한 환상에 빠져 판단 능력을 상실한 몽상적 낭만주의자를 풍자하는 동시에 자동인형이나 다름없을 만큼 딱딱하고 무미건조한 계몽주의적 사고방식을 비판한다. 올림피아의 정체가 탄로 난 후 사람들이 보이는 우스꽝스러운 반응은 작가 호프만의 날카롭고 유머러스한 면모를 잘 드러낸다.

 

이제 많은 남자들은 자신의 애인이 나무 인형이 아니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에게 박자에 어긋나게 노래하고 춤추라는 둥, 낭독 중에 수를 놓고 뜨개질을 하고 애완견을 
데리고 놀라는 둥 이런저런 일을 요구했다. 무엇보다도 그냥 듣고 있지만 말고 가끔은 말도 하라고, 
정말로 사고와 감정이 바탕이 된 말을 하라고 요구했다. (……) 티파티에서 사람들은 예의 의혹에 
대처하기 위해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주 하품을 했고 재채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58쪽)

 

그 밖에도 세 통의 편지와 서술자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구조, 흡사 도플갱어와도 같은 코펠리우스-코폴라의 존재, 나타나엘이 겪은 일이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일까 하는 의문, 분열된 자아와 광기의 문제 등 「모래 사나이」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와 생각할 거리를 독자에게 던져 준다. 이 작품이 고전으로 남아 지금까지 계속해서 읽히는 이유다.

 

■ 「이그나츠 데너」: 선과 악이 뒤엉킨 싸움

 

「이그나츠 데너」는 작품집 『밤의 풍경들』에서 「모래 사나이」에 이어 수록된 단편이다. 다층적인 구조를 가진 「모래 사나이」와 달리 「이그나츠 데너」의 이야기는 일직선으로 단숨에 죽 진행된다. 먼 옛날을 배경으로 경건하고 선한 사냥꾼 안드레스와 사악한 도적 두목 이그나츠 데너가 벌이는 대결 구도가 그 중심축을 이룬다.

찢어지게 가난한 안드레스는 상인으로 가장한 이그나츠 데너의 도움을 받아 중병에 걸린 아내를 살리고 곤궁한 처지에서 벗어나 안정적인 생활을 누린다. 하지만 데너가 도적 떼의 수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안드레스는 어쩔 수 없이 도적 떼에 협조하여 위험천만한 범행에 가담하게 된다. 이 일로 약점이 잡힌 안드레스는 이후 데너의 유혹과 협박에 의연하게 맞서나 그 결과 온갖 끔찍한 일과 고초를 겪는다. 안드레스는 도적이자 살인자로 몰려 감옥에 갇히고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해서도 독실한 신앙심과 진실한 태도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결국 누명을 벗는다. 반면 악의 화신인 데너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만다.

그런데 이러한 결말을 놓고서 이 작품이 단순히 악에 대한 선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그린다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기에 안드레스는 너무도 큰 대가를 치른다. 첫째 아이는 살해당하고, 아내 조르지나는 병으로 죽고, 안드레스 자신은 수감 생활과 모진 고문으로 반죽음 상태가 된다. 하늘의 뜻인지 단순한 우연인지, 만일 형장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무고함을 입증해 줄 증인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영락없이 죽고 말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안드레스가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도록 방치한 것은, 그래서 데너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게 만든 것은 애초에 그가 충실하게 섬기는 주인 바흐 백작이다. 바흐 백작은 생명의 은인인 안드레스에게 보답한답시고 그를 황량한 숲으로 보내 놓고서 충분한 경제적 지원을 제공하지 않는다. 비록 음험한 속셈에서지만 안드레스를 실질적으로 도와주는 것은 오히려 악당 데너이다. 또한 정의로운 판결로 억울함을 풀어 주고 진상을 밝혀야 할 법원은 선한 안드레스의 편이 되기는커녕 비인간적이고 끔찍한 고문으로 자백을 얻어 내려 할 뿐이다. 그럼에도 안드레스가 끝까지 양심을 지키고 진실을 주장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이 소설은 선과 악을 뚜렷이 대비시키면서도 그 뒤엉킴을 보여 주면서 ‘이 세상에서 선을 추구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라는 의문을 던진다.

사악한 존재로서 동일인인 듯 아닌 듯 혼동을 일으키는 트라바키오-데너는 흥미롭게도 「모래 사나이」의 코펠리우스-코폴라와 대응을 이룬다. 이 두 쌍 모두가 이탈리아 출신이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음울한 북쪽의 독일인들에게 따뜻한 남국 이탈리아는 예술과 미의 본고장이자 환상과 마법의 나라로 동경의 대상이면서 낯섦과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호프만은 트라바키오-데너를 통해 비밀스러운 악의 근원으로 독자를 이끌고 마법, 악마, 살인, 음모, 광기, 피가 난무하는 이야기로 충격을 안기면서 이른바 ‘공포 낭만주의(Schauerromantik)’의 정수를 보여 준다.

 

■ 「팔룬의 광산」: 두 세계의 만남이 보여 주는 처연한 아름다움

 

작품집 『세라피온 형제들』에 실린 「팔룬의 광산」은 실화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1677년 스웨덴 팔룬의 광산에서 한 젊은 광부가 결혼식을 앞두고 실종되었다. 긴 세월이 흐르고 1719년에 갱 속에서 황산염수 속에 고스란히 보존된 광부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늙은 약혼녀는 청년의 모습을 한 옛 약혼자와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다. 이 사건은 독일의 여러 작가에게 영감을 주어 문학 작품으로 탄생하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요한 페터 헤벨의 짧은 단편 「뜻밖의 재회」(1811)다. 호프만은 이 매력적인 에피소드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변형시켜서 「팔룬의 광산」이라는 또 하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 소설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의 대조다. 주인공 엘리스 프뢰봄은 원래 배를 타고 탁 트인 바다를 누비던 선원인데 갑작스럽게 어머니를 잃고서 크나큰 상심에 빠지고 바다 위 생활에 환멸을 느낀다. 이때 유령 같은 늙은 광부가 나타나 엘리스에게 광부가 될 것을 권하며 광산 일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가치 있는지를 설파한다. 늙은 광부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엘리스는 찬란한 햇빛과 푸르른 하늘로 묘사되는 바다/지상을 떠나 어두운 지하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무시무시한 암석과 까마득한 깊이에 압도되어 두려움을 느끼지만 강력한 여왕이 지배하는 지하 세계에 점차 매혹된다. 이때 지상과 지하는 현실과 환상/꿈을 상징하며, 엘리스가 땅속의 신비롭고 경이로운 세계를 동경하다 죽음을 맞는 상황은 그야말로 ‘낭만적’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자연의 근원을 탐구하는 작업으로서 광업에 관심을 가졌다. 가령 작가 노발리스는 광물학과 지질학을 공부하고 광산 감독관으로 일했으며 그의 대표작이자 낭만주의 문학의 상징적 텍스트인 『푸른 꽃』(1802)에도 광산과 광부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팔룬의 광산」은 이러한 맥락 속에 있는 작품이다. 늙은 광부 토르베른은 엘리스에게 광산 일의 가치를 다음과 같이 설파한다.

 

눈먼 두더지가 맹목적인 본능으로 땅을 파헤친다면, 인간의 눈은 가장 깊은 지하에서 갱내등이 
비추는 희미한 불빛 속에서 사물을 더 환히 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 마침내 인간의 눈은 점점 
더 힘을 얻으며, 저 위 구름 위에 숨겨진 것의 반영을 경이로운 암석 속에서 인식할 수 있을지도.(149쪽)

 

토르베른에게 광산 일은 단순히 광물을 캐내고 이윤을 얻는 작업이 아니라 더 고귀한 것, 더 본질적인 것을 인식하고 발견하는 내면적 과정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초월적 세계를 추구하는 낭만주의적 자세를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엘리스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호프만은 작품의 모티프가 된 실제 사건의 결말을 그대로 따른다. 결혼식 날 지하에 영원히 잠들어 버린 엘리스와 지상에 홀로 남겨진 약혼녀 울라는 수십 년이 흐른 후 극적으로 재회한다. 이 장면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서로 대립되는 두 세계의 만남을 보여 준다. 여전히 젊은이의 모습을 간직한 엘리스와 주름투성이 꼬부랑 할머니가 된 울라, 이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 분리되어 있던 지하 세계와 지상 세계, 환상과 현실, 죽음과 삶, 과거와 현재가 다시금 하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합일의 장면은 처연하면서도 더없이 아름답고 가슴 벅차다.

 

■ 본문 중에서

 

나는 마치 인간의 얼굴들이 주위에 보이는 것 같았어. 그런데 얼굴들에 눈은 없고—그 대신 소름 끼치는, 깊고 검은 구멍이 나 있었어. “눈을 줘, 눈을 달라고!” 코펠리우스가 둔중하게 울리는 목소리로 소리쳤어. 나는 격심한 경악에 확 사로잡혀 비명을 질렀고 은신처에서 바닥으로 뛰쳐나왔어. 그러자 코펠리우스가 나를 붙잡았어. “작은 짐승!—작은 짐승이로구나!” 그가 이를 드러내 보이며 염소처럼 떠는 목소리로 말했어!—그러고는 나를 낚아채서 화덕 위로 던졌고 그 바람에 불꽃이 내 머리카락을 그을리기 시작했어. “이제 우리한테는 눈이 있어.—눈—아이의 예쁜 눈 한 쌍.” 코(16쪽)

 

그는 계속해서 안경을 꺼내 놓았고 그 바람에 탁자 전체가 기이하게 반짝이고 번쩍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눈이 쳐다보고, 경련하듯 움찔대고, 나타나엘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는 탁자에서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다. 코폴라는 계속해서 안경을 놓았고 불타는 눈빛들이 점점 더 격렬하게 뒤섞이면서 핏빛 광선을 나타나엘의 가슴으로 쏘았다. 그는 미칠 듯한 경악에 사로잡혀 고함을 질렀다. “그만! 그만, 이 끔찍한 사람 같으니!”(42쪽)

 

어느새 그는 아직 춤추자는 청을 받지 않은 올림피아 옆에 바짝 서 있었고 간신히 몇 마디 더듬더듬하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올림피아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그는 자신의 몸이 끔찍한 죽음의 한기로 전율하는 것을 느꼈다. 그가 올림피아의 눈을 응시하자 그녀의 눈은 그를 향해 사랑과 동경을 한껏 발했고 이 순간 마치 차가운 손에서 맥박이 뛰고 생명의 핏줄기가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타나엘의 안에서도 사랑의 쾌감이 더욱 불타올랐다.(47쪽)

 

나타나엘은 회랑에서 이리저리 미쳐 날뛰었고 공중으로 껑충껑충 뛰면서 소리를 질렀다. “불타는 원아, 돌아라—불타는 원아, 돌아라.” —격렬한 외침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가운데서 변호사 코펠리우스가 거인처럼 우뚝 솟았다. 그는 막 이 도시에 와서 시장으로곧게 뻗은 길을 걷던 차였다. 사람들은 미쳐 날뛰는 자를 제압하기 위해 위로 올라가려 했다. 그때 코펠리우스가 웃으면서 말했다. “하 하—기다리시오. 틀림없이 스스로 내려올 게요.” 그러고는 나머지 사람들처럼 위를 올려다보았다. 돌연 나타나엘이 굳은 듯 멈춰 서더니 아래로 몸을 숙였고 코펠리우스를 알아보고는 앙칼지게 소리쳤다. “하! 예쁜 눈깔—예쁜 눈깔.” 그리고 난간 너머로 뛰었다.(61-62쪽)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짙은 증기가 두 사람에게 훅 밀려왔다. 조르지나는 단숨에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는 벌거벗은 채로 사발 위에 누워 있었고 아이의 피가 사발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이어서 그녀가 본 것은 하인이 도끼를 쳐들어 데너를 향해 휘두르고, 데너가 도끼를 피한 뒤 하인에게 달려들어 드잡이를 벌이는 모습이 전부였다. 이제 마치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창 바로 앞에서 들리는 듯했고 그녀는 의식을 잃고는 바닥에 쓰러졌다.(101쪽)

 

안드레스는 공포와 두려움과 피로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형체가 건네는 플라스크 안에서 자기 아이의 피가 붉은색의 작은 불꽃을 튀기며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안드레스는 비록 자신이 치욕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영원한 복락을 이루기 바란다고, 자신을 뒤쫓고 영원한 복락을 앗아 가려 하는 사탄의 마수로부터 자기를 구해 달라며 하느님과 성자들에게 열렬히 기도했다. 그러자 형체가 감옥 안이 날카롭게 울리도록 웃더니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안드레스는 마침내 멍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났고 잠자리에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110쪽)

 

어느새 지붕이 무너지고 내부 목조가 활활 타오르며 벽 쪽으로 기울었으며 위층의 두꺼운 들보들만이 아직 맹렬한 불에 맞서고 있었다. 그런데 트라바키오의 열두 살짜리 아들이 팔에 작은 상자를 끼고 그 희미하게 타는 들보들 중 하나를 따라 걷고 있었다. 이 광경에 군중은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를 질러 댔다. 그 모습은 단 한순간이었으며 높이 치솟는 불길 속으로 돌연 사라져 버렸다.(125쪽)

 

내가 조언 하나 하지, 엘리스 프뢰봄! 팔룬으로 가게나. 가서 광부가 되게. 자네는 나이도 젊고 몸도 건장하니까 틀림없이 금방 훌륭한 수습 갱부가 될 테고 이어서 정식 갱부로, 갱부 감독으로 그리고 계속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갈 거야. 자네는 호주머니에 두카텐이 두둑하니 그걸 투자하고 일을 해서 추가로 돈을 벌면 아마 조그만 집과 땅을 장만할 테고 광갱에 지분을 소유하게 될 걸세. 내 조언을 따르게, 엘리스 프뢰봄. 광부가 되게나!(148쪽)

 

그는 찬란하기 그지없는 금속 나무와 식물 들이 있는 낙원을 보았다. 불꽃을 번쩍이는 돌들이 과일과 꽃처럼 나무와 식물에 매달려 있었다. 그는 처녀들을 보았고, 강력한 여왕의 고귀한 얼굴을 보았다. 여왕이 그를 붙잡아 아래로 끌어내려 품에 안았다. 그때 불타는 한 줄기 빛이 순식간에 그의 내면에서 번쩍였고, 그의 의식 속에는 마치투명하게 번뜩이는 푸른 안개의 파도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뿐이었다.(172-173쪽)

 

건실한 용광로 감독관이자 조합장인 페르손 달시에는 오래전에 죽었고 그의 딸 울라 역시 오래전에 사라져 버렸고 이제 팔룬에 사는 자 중 이 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프뢰봄의 불행한 결혼식 날 이후 족히 오십 년이 흘렀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광부들이 두 수직갱 사이에 구멍을 뚫으려던 중 300엘레 깊이 지하의 황산염수 속에서 한 젊은 광부의 시신을 발견했다. 땅 위로 옮겨서 보니 그 시신은 화석과 같았다.(180쪽)

 

목차

모래 사나이 7

이그나츠 데너 63

팔룬의 광산 140

 

작품 해설 183

작가 연보 196

작가 소개

E.T.A. 호프만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1776~1822)은 19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 낭만주의 작가다. 1776년에 대학자 칸트의 도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호프만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 미술 등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두각을 드러냈지만 법조인 가문인 외가의 전통에 따라 법학을 전공하고 법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예술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생애의 많은 시간을 작곡가, 악장, 음악 비평가 등으로 활동했으며, 야심 차게 작곡한 오페라 「운디네」를 무대에 올려 호평을 받기도 했다. 반면 문학은 음악만큼 진지하게 여기지 않아 일필휘지로 빠르게 연이어 소설을 써 내려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호프만에게 성공을 안겨 주고 오늘날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남은 것은 그의 문학 작품들이다. 특히 삼십 대 후반인 1814년 출간한 『칼로풍의 환상작품집』으로 뜻밖에 작가로서 성공을 거두고 명성을 얻는다. 이 밖에 『밤의 풍경들』(1816/1817), 『세라피온 형제들』(1819~1821), 장편 소설 『악마의 묘약』(1815/1816), 『브람빌라 공주』(1820), 『수고양이 무어의 인생관』(1819/1821) 등 호프만의 작품들은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기괴함과 섬뜩함, 유머와 풍자로 독자를 매혹한다. 그는 낮에는 성실하고 공명정대하며 유능한 법관으로서 상관의 인정을 받으며 국가에 봉사하고, 밤에는 예술가로서 창작 활동을 하고 단골 술집에서 폭음과 장광설을 즐기는 기인 같은 이중생활을 하다 1822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신동화 옮김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했으며, 한국문학번역원 번역아카데미 특별과정을 수료했다. 현재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실패한 시작과 열린 결말/프란츠 카프카의 시적 인류학』, 알프레트 되블린의 『무용수와 몸』, 토마스 만의 『괴테와 톨스토이』, 레오 페루츠의 『9시에서 9시 사이』와 『심판의 날의 거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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