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시인선34]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하다
시리즈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0주년 기념) 34 | 분야 세계시인선 34
“투르게네프는 투르게네프이기 때문에 읽는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탄생 200주년 기념 출간! 시인 투르게네프의 정수 산문시 83편 국내 최초 완역!
● 시로 시작하여 시로 마무리한 시인 투르게네프 산문시 83편 국내 최초 완역
19세기 러시아 대문호 투르게네프의 탄생 200주년을 맞아 민음사 세계시인선 34번으로 투르게네프 산문시집이 출간되었다. 국내 처음으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83편 전편을 원어에서 완역한 이번 시집은 투르게네프의 탄생일인 11월 9일에 맞추어 독자들에게 선보이게 되었다. 『첫사랑』, 『아버지와 아들』 등 19세기 러시아의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투르게네프의 소설들은 우리나라 청소년 필독 도서로 오랜 세월 널리 사랑받아왔다. 그러나 한편 투르게네프는 자신의 문학적 경력을 시로 시작한 시인이기도 하다. 이 산문시집은 그의 말년에 창작된 것으로, 거장이 남긴 마지막 작품들이다. 투르게네프 특유의 인간에 대한 연민과 동시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예리한 시선, 그리고 환상적 이미지, 이 모든 것들이 길게 말하지 않고도 본질을 꿰뚫는 대가의 솜씨로 이 한 권의 시집에 완성되어 있다.
어미 새가 새끼를 구하기 위해 돌진했고,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새끼를 구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몸뚱이는 공포로 벌벌 떨었고, 어미 새의 가냘픈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버렸다. 어미 새는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이다!
(……)
생각해 보니, 사랑은 죽음보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강하다. 삶은 사랑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움직인다.
― 투르게네프, 「참새」에서
●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했던 청년 윤동주가 사랑했던 시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러시아 문학은 다른 어떤 외국문학보다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중 투르게네프는 이광수, 톨스토이와 함께 당시 조선에서 가장 많이 읽혔던 3대 작가 중 하나였다. 투르게네프 산문시의 쉽게 읽히는 시어와 거기에 담긴 삶의 지혜와 통찰은 일제강점기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투르게네프는 프랑스의 보들레르, 말라르메, 랭보, 프랑시스 잠 등의 산문시에서 영향을 받았고, 그의 산문시는 다시 한국 근대문학 형성기에 전통의 정형시를 벗어나 새로운 형태의 근대적인 시를 모색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지금 네가 믿는 것에 환멸이 올 수 있음을 잘 알잖아? 그 믿음이 기만이고, 젊음을 헛되이 파멸시킨다는 것을 언젠가 알게 되잖아?”
“그것도 알아요. 그래도 저는 들어가고 싶습니다.”
“들어와라!”
여자가 문지방을 넘어서자 — 그녀 등 뒤로 무거운 막이 내려졌다.
“바보 같은 년!” 누군가가 뒤에서 이를 갈았다.
“성녀다!” 응답하는 소리가 어디선가 울려 퍼졌다.
― 투르게네프, 「문지방」에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중 가장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은 바로 「거지」였는데, 1910년~1930년 사이 최소 12회 반복하여 번역되었다. 가난이라는 시대의 현실 앞에서 민중에게 손 내밀고자 하는 공감과 연민의 휴머니즘이라는 주제는 당시 지식인들의 영혼에서부터 공명을 이뤄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공명은 투르게네프의 시를 번역하고 탐독하는 데 그치지 않고 또 다른 창작으로 이어졌다.
가지고 나온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거지는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내민 손이 힘없이 떨린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한 나는 떨리는 그의 더러운 손을 꼭 잡았다…….
“형제님, 미안하오,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못했소.”
거지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그의 파리한 입술에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차디찬 내 손가락을 꼭 잡아 주며 속삭였다.
“형제님, 저는 괜찮아요.
이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형제님, 그 역시 적선이지요.”
그때 나는 이 형제한테 내가 적선 받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투르게네프, 「거지」에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라고 노래했던 윤동주 역시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탐독하고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동주가 남긴 「투르게네프의 언덕」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투르게네프의 산문시 「거지」를 오마주한 것이다.
자신을, 남을, 모든 사람을, 짐승을, 새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불행한 자들과 행복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불행한 자들보다 행복한 자들을 더 불쌍히 여기노라.
개선장군들과 위대한 화가들을, 사상가들과 시인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살인자들과 희생자들을, 추악함과 아름다움을, 압제자와 학대받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노라.
이 연민의 정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이 불쌍함 때문에 살고 싶은 마음조차 없는데…… 연민에 권태까지 더해진다.
오, 권태여, 지루함이여, 모두가 혼합된 연민이여! 인간은 더 이상 내려갈 수 없다.
차라리 부러워하는 마음이라도 있다면…… 진짜 좋을 텐데!
그래, 나도 돌을 부러워한다!
― 투르게네프, 「불쌍히 여기노라……」에서
● “투르게네프의 시적 촉수는 언제나 그 풍경을 찢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세목들에 가장 민감한 바람과 풀잎처럼 반응한다.” ―김행숙
투르게네프 특유의 “꿀과 기름처럼 완벽하게 유연하고 세련된 문장”으로 러시아의 풍경,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하는 예술적 특징은 그의 시적 내면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또한 그의 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그의 산문시집에서도 역시 19세기 러시아의 가혹한 농노제 아래 일어났던 어두운 이야기들을 고발했던 리얼리즘 소설 대가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울었습니다. 손바닥으로 땅바닥을 치며 울었습니다. ‘이 욕심쟁이 땅 귀신! 아내를 잡아먹다니…… 나도 잡아먹어라! 아, 마샤!’”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마샤!”라고 한 번 더 불렀다. 고삐를 쥔 채,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 옆으로 털어 버리고 어깨를 추어올렸다.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썰매에서 내릴 때, 나는 15코페이카를 더 주었다. 그는 양손으로 모자를 잡고 나에게 공손하게 인사했다. 회색빛 안개로 둘러싸인 텅 빈 정월의 눈길은 매섭게 추웠다. 그는 말을 몰고 천천히 걸어갔다.
― 투르게네프, 「마샤」에서
산문시집의 투르게네프의 목소리는 대체로 슬프고 다정다감하지만, 때때로 냉정하고 신랄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산문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인생의 막바지에 이른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삶의 불가해함에 대한 체념과 죽음에 대한 공포, 그리고 한편으로는 바로 그것이 선물처럼 가져다 줄 화해와 용서에 대한 기대이다. 투르게네프의 산문시를 읽는 것은 바로 독자들에게 투르게네프가 자신의 인생을 비춘 등불에 나의 얼굴을 비춰보고 그것이 역시 마찬가지로 보통의 부끄럽고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나는 겁이 나 미사여구를 피한다. 그러나 미사여구에 대한 두려움 역시 일종의 불만이다.
그렇게 복잡한 우리 생활은 이 두 외래어 사이를, 불만과 미사여구 사이를 오가며 헤맨다.
― 투르게네프, 「미사여구」에서
그분의 얼굴은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다. 보통 사람들과 같은 그런 얼굴이다. 눈은 약간 위쪽을 주의 깊게 조용히 보고 있다. 입술은 다물었지만, 굳게 다문 것은 아니다.
(……)
다시 한번 힘을 냈다…… 역시 모든 사람들과 똑같은 얼굴이 보였다. 낯선 윤곽이긴 하지만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얼굴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슬퍼졌고, 잠에서 깼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바로 그런 얼굴, 보통 사람과 비슷한 얼굴, 그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 투르게네프, 「그리스도」에서
마을
대화
노파
개
맞수
거지
그대 들어라! 어리석은 자의 심판을
만족한 사람
처세술 1
세상의 종말
마샤
바보
동방의 전설
두 편의 사행시
참새
해골들
노동자와 흰 손
장미
Yu. P. 브레브스카야 부인을 추모하며
마지막 만남
문지방
방문
필요, 힘, 자유
자선
벌레
양배추국
하늘빛 왕국
두 명의 부자
노인
신문기자
두 형제
에고이스트
신의 향연
스핑크스
님프
적과 친구
그리스도
바위
비둘기
내일, 내일!
자연
그의 목을 달아매라!
무엇을 생각할까?
장미는 얼마나 아름답고 신선했던가
항해
N. N.
멈추어 주오!
수도사
또 싸울 날이 올 것이다!
기도
러시아어
만남
불쌍히 여기노라
저주
쌍둥이
지빠귀 1
지빠귀 2
둥지도 없이
잔
누구의 죄인가?
처세술 2
뱀
작가와 비평가
누구와 싸워야 하나
오, 나의 젊음! 오, 나의 생기!
K에게
높은 산들 사이를 걸었다
나 죽으면
모래시계
밤중에 일어나
혼자 외로이 있을 때
사랑으로 가는 길
미사여구
단순
브라만
그대가 울었지
사랑
진리와 정의
자고새
NESSUN MAGGIOR DOLORE
수레바퀴에 치여
응애, 응애
나의 나무들
작가 연보
작가에 대하여 : 가장 서구적인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작가 (조주관)
작품에 대하여 : 시로 시작하여 시로 끝내다 (조주관)
추천의 글: 투르게네프가 산문시를 쓰는 시간, 우리가 투르게네프를 읽는 시간 (김행숙 시인)
독자 평점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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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줄평
밑줄 친 문장
우리도 말해야 한다. “나를 때려라! 그러나 배부르고 건강하게 살아라!” (그대 들어라! 어리석은 자의 심판을 18)
…(전략)… 누구든 무엇이든 옆에서 칭찬을 하면, 바보는 모두 비난 하나로 응수했다.
가끔 비난조로 덧붙였다.
“아직도 권위를 믿나요?”
지인들이 바보에 대해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다혈질이고 신경질적인 친구야! 그런데 머리는 참 좋구먼!”
다른 사람들까지 거들었다. “말을 잘하고! 참 재능 있는 사람이오!”
일찍이 권위에 반항하여 소리치던 바보가 지금은 스스로 권위가 되어 버렸다. 청년들은 그를 숭배하면서도 두려워한다. …(후략)…
(바보 38)
개가 서서히 다가갔을 때, 갑자기 가까운 나무에서 가슴털이 검은 어미 참새 한 마리가 개의 콧등 앞으로 돌멩이처럼 날아들었다. 그러고는 모든 털을 곤두세우고 애처로운 소리로 필사적으로 울어 대면서, 이빨을 드러내고 주둥이를 벌리고 있는 개를 향해 두어 번 덤벼들었다.
어미 새가 새끼를 구하기 위해 돌진했고,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새끼를 구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작은 몸뚱이는 공포로 벌벌 떨었고, 어미 새의 가냘픈 목소리는 거칠게 쉬어 버렸다. 어미 새는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이다!
그렇다! 웃을 일이 아니다. 이 영웅적인 작은 새에 대해, 그 사랑의 충동과 돌진에 대해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사랑은 죽음보다, 죽음의 공포보다 더 건강하다. 삶은 사랑에 의해서만 유지되고 움직인다. (참새 49~50)
주인이신 천상의 신의 한 여인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여인 쪽으로 데려갔다.
“은혜 여인!” 첫 번째 여인을 가리키며 신이 말했다.
“감사 여인!” 두 번째 여인을 가리키며 신은 이렇게 덧붙였다.
두 사람의 미덕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표정을 지었다. 빛이 창조된 이래 수천 년이 흘렀지만, 두 사람은 난생 처음 만난 것이다.
(신의 향연 84)
‘이분이 정말 그리스도일까!’ 나는 생각했다. ‘너무 평범해, 이런 보통 사람이! 그럴 리 없어!’
그러자 갑자기 슬퍼졌고, 잠에서 깼다. 그때 비로소 나는 깨달았다. 바로 그런 얼굴, 보통 사람과 비슷한 얼굴, 그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의 얼굴이라는 것을
(그리스도 93~94)
여기서 나는 다른 일이 생각났다… 언젠가 러시아에서 두 사람의 농부들, 아비와 아들의 무서운 싸움을 직접 목격했다. …(중략)…
“녀석한테 자식을 갖게 해요. 그 녀석이 제 엄마 앞에서 제 애비의 흰 수염에 침을 뱉을 거요!”
아들은 입을 열려고 하다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얼굴이 창백해져서 나가 버렸다. (저주 124)
나는 내 마음에 빛과 아름다움을 더하려 노력한다.
이미지와 비유를 찾아 헤맨다. 문장을 완성시키고, 단어의 음향과 화음을 다듬는다.
조각가나 금은방의 세공사처럼, 나는 직접 독을 따라 넣을 황금 잔을 열심히 조각하고 깎으면서 온갖 장식을 새긴다. (잔 134)
당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과 싸우라. 그가 당신을 이길 것이다…
그러나 패배해도 당신은 얻는 것이 있을 수 있다.
실력이 동등한 사람과 싸워 보라.
누가 승리하든 적어도 당신은 싸움에 만족할 것이다.
머리가 가장 부족한 자와도 싸워 보라…
승리를 바라지 말고 싸우라.
당신은 그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어리석은 자와도 싸워 보라. 명예도 이익도 얻지 못하리라.
그러나 가끔 즐길 수 있지 않겠는가?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와는 절대로 싸우지 말라! (누구와 싸워야 하나... 140)
...(전략)... 화려한 제복의 두 하인이 사륜차를 뒤에서 밀고 있었다.
“참 잘 와 주었네.” 친구는 무덤 속에서 부르는 목소리로 나를 반겼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내 땅이네,
천년 수령의 나의 나무 그늘로 정말 잘 와 주었네!”
그의 머리 위로는 천년 묵은 아름드리 떡갈나무가 울창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 천년의 거목이여, 들었는가!
다 죽어 가는 벌레가 당신의 뿌리 밑을 기어 다니며
당신을 가리켜 나의 나무라 부른다네!’
바로 이때 미풍이 지나가며 거목의 울창한 나뭇잎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늙은 떡갈나무가 내 생각이나 환자의 자만에
상냥하고도 조용한 웃음으로 답하였다. (나의 나무들 165~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