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기 전에 미리 영화로 그 내용을 맛보기로 음미해봤다.
옛날 1947년도 흑백영화로 봤는데 사실 내용의 진전이 너무 빨라 주인공들의 심리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특히 여주인공 엠마가 바람나는 장면들에서 어떤 전조도 보이질 않고 그저 눈만 마주치다 심각한 관계로 빠져들고 괜히 고함만 질러대고 해서 성질 고약한 여인이구나 생각했었다.
책으로 만난 보바리 부인 또한 내 입장에서는 백퍼센트 공감이 가는 인물로 나오진 않는다. 한마디로 욕심쟁이 그녀랄까.
사실 나의 입장에서 보자면 엠마의 남편 샤를르만큼 완벽한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그녀는 왜 밖으로만 눈을 돌린 걸까.
의사란 직업에 착실히 일하고 집도 있겠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뭐든 다 오케이하는 남편을 두고 말이다.
그것도 말만 뻔지르르하고 부자인 척만 하는 로돌프나 사랑에 목말라 아첨에 가까운 비굴함을 보이는 레옹 같은 남자들 보단 성실하고 이해심 많은 남자 쪽이 훨씬 나을 것 같다.
그녀가 그렇게 바람이 나고 빚을 내 물건을 사들인 이유가 다 ‘권태’라는 단어로 정리하는데 소설 속의 시어머니 말대로 일을 안 해서 생기는 병이 아닐까 한다.
먹고 살기 힘들고 하루가 어찌 돌아가는지 바쁜 나날을 보낸다면 그녀처럼 소설과 귀족들의 삶을 짬뽕해서는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펴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플로베르가 이 소설을 4년 반이란 기간 동안 고통의 단말마를 지르며 썼지만, 그 시대의 공중도덕과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이유로 피소되었다. 하지만 도덕적 교훈을 담은 내용으로 인정한 법정이 무죄를 선고했다. 어느 부분의 묘사가 그런지 세심히 살펴보니 초입의 샤를르가 엠마를 묘사하는 그 유명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다.
하얀 칼라 사이로 흰 목덜미가 보이고, 도톰한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윤기 나는 머릿결을 두개골 곡선을 따라 가르마를 내어 관자놀이 쪽으로 굽이돌며 목뒤에서 풍성하게 쪽진 머리를 하고, 저고리 단추 두 개 사이에 코안경을 걸고 있다.
지금에서야 그저 그런 상세 인물묘사쯤으로 봐야겠지만 그 당시에는 이런 묘사를 처음 접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글을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읽었겠지 생각하니 그저 웃음이 나온다.
이 책에서 여러 표현이나 묘사도 볼만하지만 특이한 식물 이름도 발견했다. 벽 사이에 핀다는 계란꽃이나 고양이의 신경안정제로 쓰인다는 고양이풀 캣닢이다. 고양이가 우울증상이 있거나 힘이 없거나 할 때 요 허브의 일종인 캣닢을 먹이면 활발하게 변한다고 한다. 보바리 부인도 그런 허브나 먹어보지 왜 비소를 삼켜서 자살까지 갔는지 안타깝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