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일 2011년 3월 18일

우리는 왜 그것이 아름다운가를 절대로 설명할 수는 없다. 즐거움은 어떤 말의 무기력증을 유발시킨다. - 롤랑 바르트 <이미지와 글쓰기> 中

 

 

 

하드커버의 양 끝은 두껍고, 그 속에 낱장의 종이들은 상대적으로 얇다. 하드커버의 첫 장이 탄생이라면 마지막 장은 죽음이며, 그 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낱장들은 우리가 일상이라 부르는 삶의 기록일 것이다. 책과 삶의 흔한 유비를 굳이 사용한 건 소리에 있다.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 때문에 테레자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등장인물처럼 이 소리로 인해 책과 삶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한 쌍으로서 무대에 다시 오른 것이다. 쿵(실제로 살과 살이 맞부딪칠 때 나는 ‘짝’ 소리에 더 가깝다). 하드커버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나는 쿵 소리를 들으면 이런 상상이 떠오르곤 했다. 관의 뚜껑을 닫힌다. 러시아의 영상시인 타르코프스키의 책 ‘봉인된 시간’을 상기하며 그 쿵 소리와 함께 인생의 한 부분, 그것도 내면으로 침잠해 보낸 깊고 진한 시간이 책 속에 봉인되길 바랐다. 이걸론 뭔가 부족하다 싶어 주문을 외웠다. 주문이라 이름 붙여놓았지만 실상 책의 배면에 손을 가볍게 올려놓고 책의 내용과 나의 감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모든 책을 읽고 주문을 외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책은 읽자마자 바로 독후감을 쓰고 싶게 만드는 반면 어떤 책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러는 것처럼 말 걸기를 주저하게 되고, 주변을 나도 모르게 서성이게 만들었다. 전자는 내 안에 있는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내고 활성화시키는 책이라면 후자는 내 밖에 있는 세계를 안으로 끌고 오는 책이었다. 읽고 나면 내면이 어지럽혀지고 불편해지는 책, 그런 종류의 책은 로쟈 이현우 님의 말씀처럼 새롭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세상을 보는 관점을 바꿔주는 한마디로 좋은 책이었다. 그리고 나는 대개 좋은 책을 좋아하지 않았다. 좋은 책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있으려면 어떤 의미에서 좋은 사람이 돼야 했다. 책이 앎이 아닌 삶의 차원으로 체화됐을 때 지식의 확장이 아닌 영혼의 울림으로 다가올 수 있었다. 한마디로 다르게 살아야 했다. 삶을 재발명해야 했다. 나는 자기혁명이나 창조적 파괴 같은 단어를 쉽게 썼지만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고민은 진지하게 해본 적이 없었다. 제 발로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 그래야만 하는 당위가 없었기에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회피했다. 껍데기의 삶이었다.

 

그 껍데기를 찢고 심장을 관통하는 화살 같은 책들에 대해 나는 주문을 외웠다. 더 깊숙이 파고들어 뼈에 새겨지라고, 절대 빠지지 않는 강철쐐기로 남아 있으라고. 줄거리, 등장인물의 이름, 주제의식 그런 건 필요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 느낌을 최대한 오래 간직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주문은 필연적으로 안으로 향해야 했다. 입술 언저리를 맴돌다 몸속으로 추락했다. 말 되어지지 않는 말이었고, 침묵의 말하기였다. 주인공의 이름, 바다나 별 같은 자연의 얼굴들, 자유나 사랑 같은 인간적인 언어를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해서 발음했다. 그때만큼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았다. 발화만으로 충분했다. 내 옆에 상대방에게, 어디에 있는지 모를 작가에게 전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것은 온전히 나를 위한 말이고 음악이었다. 말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허기가 아닌 온기였다. 빛에너지가 왜 열에너지를 포함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진 과학자와 다르게 난 이 열에 대해 묻지 않았다. 설명할 수 있더라도ㄹ명될 수 없는 영역에 모셔두고 싶었다. 간직하고 싶었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설명될 수 없는 성절의 것이라면, 그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적어보기로 한다.

 

‘아름다운 것은 따뜻하다’

 

아름다운 것이 왜 따뜻한지 지금 설명할 수 있는 근거 중 하나로 막무가내로 ‘그것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를 꺼내들어본다. 논리적으로 설명(이해)할 수 없는 불가능의 영역이 있다. 이를 때면 법정에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였다고 설명하는 한 사내. 그는 자신의 행동이 타인에게 설명되길 요구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뿐이고, 검사의 질문을 존재에 비춰 투명하게 진실한 답변을 끌어내어 보여줬을 뿐이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자신이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는 듯. 진실은 무력하고 무용하지만 아무도 해치지 않는다, 우리는 진실을 통해 자신에게 당당할 수 있기에 오직 진실 속에 구원과 희망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 남자가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그가 보여준 삶이 그랬을 뿐이다.

 

나는 아름다운 문학 앞에서 언어를 잃은 벙어리였다. 절반은 아름다움의 불가항력적 힘 때문이었지만 절반은 자의적 선택이었다. 그 아름다움에서 이유를 찾는 순간, 그 이유를 발화하는 순간 아름다움이 휘발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이동진 평론가가 자주 인용하는 구절처럼 ‘모든 한정은 부정’이기 때문에 존재 자체에 대한 절대적 긍정의 상태를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그런데최근 좋은 기회가 생겨 청강한 황현산 선생님의 만해 한용운 선생에 대한 강의에서 생각변화의 계기가 생겼다). 이 감정이 의심스럽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어딘가 처녀성에 대한 삐뚤어진 생각과 닮은 구석이 있었고, 얼마든지 표현을 통해 사랑을 재확인하고 더 심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표현에 인색하다 못해 표현하기를 거부한 원인은 내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고, 그 사랑을 온전한 언어로 표현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뫼르소를 좋아했지만 뫼르소만큼 이방인을 좋아했는지에 대해선 의문부호를 가지고 있다. 뫼르소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방인은 좋아하는 ‘척’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공과 작품에 별개의 감정을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랬다고 남들에게 말한다면 이상한 사람-이방인으로 찍힐 지로 모른다는 두려움에 나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했을 것이다. 세계문학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고등학생 때의 나는 고독을 싫어했고(무지는 일방적 기피의 형태로 나타난다), 진실이 ‘좋은 것’인 줄 알고 있었지만 때때로 거짓말이 편안한 삶에 유용하다는 삶의 진실을 터득하고 있었다. 설사 그것이 진실한 삶이 아닐지라도 그건 내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약 4년이 흐른 지금 많은 것이 달라졌다. 4년 전 봉인된 시간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것을 한순간에 알 수 있었다. 책에서 느껴지는 공기, 분위기 자체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고독은 훨씬 구체적이고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고, 태양은 대지에 한층 더 가까워졌으며, 허무가 품은 텍스트는 몰라보게 두꺼워졌으며, 뫼르소는 위인전의 인물처럼 존경의 대상이 아닌 가끔 안부를 물으며 상호작용하는 우정의 대상으로, 진실한 친구로 변모해 있었다. 책을 최대한 깨끗이 읽었던 예전(앞서 언급했던 처녀성의 맥락과 같이)과 달리 오늘날의 나를 통과한 책은 상당히 더러워졌다.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되는 어려운 문장이나 미문美文이 아닌 평문平文처럼 보이지만 담담하게 진실을 포착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세기의 명작이기에 으레 읽어야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예전과 달리 요즘 나의 고민거리, 그러니까 ‘지금, 여기’의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혹은 질문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책을 찾아가는 변화 또한 눈에 띠었다. 흘러간 시간 속 세워둔 이정표가 과거와 현재와의 정밀한 비교를 가능하게 했다. 나는 두 번의 시간을 봉인함으로써 다층적 시제를 갖게 된 셈이었다. 두 시간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을 것이다. 평행우주처럼.

김연수 작가를 통해 배운 것이 하나 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 생에서 다시 한 번 살 수 있다. 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지만 그 속에 든 순간은 매번 새롭게 주어진다고, 삶의 길이는 정해져 있지만 삶의 깊이는 그 순간을 어떻게 살아내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은 생의 기로에서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한 나침반, 하나의 방향을 갖는 것과 같다고, 더 많은 방향을 갖는다고 해서 꼭 멀리가리란 보장은 없지만 방향을 갖고 있지 않으면 그쪽으로 영영 갈 수 없다고, 결국 이야기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을 조금이라도 자유롭게 만든다고, 자신의 삶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도록,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도록 한다고 말이다.

 

재밌는 점은 이방인의 이름 또한 바뀌었다는 점이었다. 이인. 남들과는 다른 異人이면서 1, 2부의 두 명의 뫼르소를 지칭하는 二人. 사실 내게 이방인이란 이름은 어떤 성역이었다. 롤리타가 롤리나 리타가 되면 ‘롤.리.타.’의 아우라가 사라지듯 이방인은 이방인이 때에만 비로소 지중해의 태양과 짙은 고독과 허무, 고결한 뫼르소의 영혼을 연상시킬 수 있었다. 이방인은 고유명사이자 대명사였고, 세 음절이면서 동시에 한 음절이었다. 이기언 교수의 해설을 읽고 이방인이 왜 이인이 돼야만 했는지 납득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이방인이 주는 복합적인 느낌의 한 단면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방인에서 이인으로 ‘방’이 빠지면서 왔던 당혹감, 상실감은 반대로 이방인에서 공간이란 감각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알려줬다. 다른 공간의 사람. 공간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은 문화라기보다 기후의 차이, 언어라기보다 정서의 차이, 성격이라기보다 체질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었다. 지중해의 태양과 한국의 태양이 다른 것처럼 다른 질감의 자연에서 살아온 우리(나와 뫼르쇠)는 서로에게 이방인(외국인이 아니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결정적 차이를 횡단하게 만든 힘은 허무에 대한 감각 혹은 이해였다. 프랑스인이든 한국인이든 지중해적 인간이든 한반도적 인간이든 우리는 인간이란 운명의 굴레에서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는 점에서 같았다. 권태와 허무는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피할 수 없기에 근본조건이라 명명했다. 허무에 이르는 경험은 개개인마다 다른 개별적이고 상대적이겠지만 허무 자체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다. 그렇다면 허무한 사람끼리는 서로의 허무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지만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을 짐작하는 데 있어서 비슷한 주파수를 공유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경험해본 이는 알 것이다. 뫼르소는 여전히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몰라보게 선명해져 있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 간의 거리를 좁힐 수 있었다. 거기에서 나는 희망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와 내가 공유한 주파수(밑줄~)에 대한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인지도 모른다. 양로원에서 전보가 왔다. “모친 사망. 명일 장례. 삼가 조의.” 이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p9-

 

 

 

난 결코 삶을 바꾸지는 못하며, 어쨌거나 모든 삶이 똑같고, 지금의 내 삶이 조금도 싫지 않다고 대답했다. -p49-

 

 

 

나는 내가 남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절대적으로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런 게 다 별로 쓸데없는 짓이었고, 난 게을러서 그만두고 말았다. -p74-

 

 

 

불가능의 얼굴을 본 자의 초연함 혹은 태만함이다. 죽음이란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초연하고, 그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바꾸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태만하다. 인간에게 죽음은 불가능하다. ‘사느냐 죽느냐’ 선택에 상관없이 누구나 언젠가 죽기 때문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생을 채우길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써 죽음을 선택한다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미 주어진 죽음을 앞당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에서 선택했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니까 죽음이 가능하려면 인간이 스스로 이 세상에 태어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죽음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미래에 쓰일 것이 아니라 과거에 쓰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카뮈는 이 질문에 대해 시지프의 신화로 철학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인간은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바위를 정상에 올려야 하는 시지프와 같다. 이 부조리 속에서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부조리를 받아들였을 때 부조리는 더 이상 악惡하지 않다. 그것은 그저 삶일 뿐인 것이다. 이 부조리한 삶을 부조리하지 않게 살아내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 이것이 니체의 운명애이며 바위를 계속 굴려야 하는 영원회귀 속 실존이다. 하지만 이 ‘부조리하지 않게’가 얼마나 많은 저항을 요구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다음을 보자.

 

 

 

그러자 검사는, 아주 다급하게 그리고 열정적ㅇ로, 자기는 신을 믿으며, 어떤 인간도 신께서 용서하지 않을 만큼 죄인은 아니라는 게 자기 신념인데, 그러기 위해선 인간이 뉘우침을 통해서 모든 걸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는 영혼이 빈 어린아이와도 같아야 된다고 말했다. -p76-

 

 

 

검사는 분기탱천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는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모든 인간이 신을 믿으며, 심지어 신의 얼굴을 외면하는 이들조차도 신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게 그의 신념이었고, 만일 그걸 추호라도 의심해야 한다면, 그의 삶은 더 이상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p77-

 

 

 

“그렇습니다. 본 검사는 저 인간이 범죄자의 마음가짐으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기 때문에 기소하는 바입니다.” -p104-

 

 

 

진실만을 논해야 하는 법원에서 일개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과 편견이 활개를 치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이 검사의 말이 상식적이라는 점이다. 상식에서는 옳고 그름보다 다수/소수가 더 중요하다. 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고, 이 상식이 틀렸을 때 소수의 정의는 다수의 폭력에 의해 철저히 침해당한다. 이는 민주주의의 맹점이기도 하다. 뫼르소가 죄를 저지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죄를 부정하려는 게 아니다. 단 법원이 정의의 법칙 아래 진실을 밝히는 자리라면 법관은 그의 죄에 맞는 합당한 죗값을 도출해야 할 것이다. 뫼르소가 일반적인 문법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는 점,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점에 의해 그의 죄가 왜곡되고 확대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재판은 부조리하다.

친구는 내게 뫼르소가 어머니를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알려준 적이 있다. 프랑스어로 엄마와 바다의 발음이 거의 유사하거나 같다고 했다. 그러니까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 바로 다음날 바다에 간 것은 슬픔을 표현하고, 어머니를 추모하는 뫼르소만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 자주 쓰이는 ‘웃프다’는 표현처럼 인간은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는 기묘한 동물이다. 기쁨의 눈물을 흘릴 수 있고, 슬픔의 웃음을 지을 수 있는 모순덩어리란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한번쯤 그래본 적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의 영어제목인 ‘the outsider’는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는 중심에 편입돼지 못하고 테두리를 떠도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중심 (0,0)의 좌표에서 가장 멀리 나아간 존재이기도 하다. 사회의 통념을 무작정 따르지 않고, 내면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였다.

로쟈 이현우 선생님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강의에서 이런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러시아어로 죄는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 다르다. 러시아어로 죄는 한 발짝 더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자신의 생사를 결정짓는 법원에서조차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거짓말로 얻은 삶은 거짓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아니면 단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던 것뿐일까? 후에 사형선고를 받고나서 뫼르소를 보면 그도 분명히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죽음을 두려워했지만, 거짓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만큼 삶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한 결정이었으리라. 삶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진실하든 거짓되든 되는 대로 삶을 살아야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삶을 사랑했기에, ‘자신이 싫어하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었기에 진실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대가가 죽음이라 하더라도.

 

중요한 건 사형수에게 한 번의 기회를 주는 것이었다. 한 번 가운데 한 한 번만으로도 많은 것들을 해결하기에 충분했다.(…)내가 판단하기에 단두대의 결점은 단 한 번의 기회도, 절대적으로 단 한 번의 기회도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p119-

 

 

 

훗날 ‘단두대에 대한 성찰’에서 다시 나타나듯 그는 사형 제도를 비판한다. 사형제도는 사형수에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에 인간이 현생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살시켜 버린다. 뫼르소는 이 죄를 통해 결정적 성찰에 이르게 된다(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다). 이방인의 마지막 대목을 살펴보자.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도 엄마에 대해 눈물을 흘릴 권리가 없었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느꼈다. 마치 그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몰아내고 희망을 비워주기라도 한 듯이, 별들이 가득하고 징조들로 가득 찬 이 밤과 마주하자, 난 처음으로 세계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의 문을 열었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비슷하고, 마침내 그토록 형제같이 느껴지자, 난 행복했었고, 여전히 행복하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게 완성되기 위해서는,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기 위해서는, 내게 남은 소원이 있었다.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주기를. – p131-

 

 

 

그는 삶을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한다. 죄에 대한 반성을 통해 다시 태어난 것이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한 것으로 보인다. 밤하늘의 별빛이 그의 죄를 씻어냈는지도 모른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건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에 대해 후회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신에게 떳떳했기에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 하늘에 비추어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기에 하늘의 별빛을 보며 행복할 수 있었다. 뫼르소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비틀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말을 바꿔야겠다. 그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삶에서 보여준다. 이렇게

 

 

 

나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