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꼽이여 거기 오래 남아 있거라

연령 15세 이상 | 출간일 2014년 7월 23일

0. 들어가며

 

최근 yes24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외국작가 투표를 했는데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1위를 차지했다. 자국 프랑스보다 한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그 이유가 묻자 이 대머리 아저씨는 ’한국인의 미래지향성’을 치켜 세웠다. 은혜로운 찬사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진실이 아님을 알고 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개미라는 소설의 탁월함이란 내재적 요인을 제외하고 외재적 요인으로 꼽는 것이 87년 민주화가 이뤄지고, 거대담론, 대문자 정치/사회를 다루는 ’무거운’ 소설들이 퇴조했는데, 이후 90년대 인기를 끈 외국작품이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와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고 한다(쿤데라를 검색하던 도중 도움이 될 만한 정보가 많이 담긴 기사 일부를 인용한다.

 

“우리가 쿤데라라는 이름을 입에 올릴 때 우선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1990년대라는 정치 사회적·문화적 변환기(주지하다시피 국외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이 몰락하고, 국내적으로는 정치 투쟁의 장이 소멸되어 갔던)에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한국의 문학인들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작가였다는 점이다. 즉, 결과론적으로 볼 때, 이 두 작가는 당시 문학인들에게 참여 문학(민중·민족 문학)과 깨끗이 결별할 수 있는 훌륭한 알리바이를 제공했다 하겠다.” -출처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67573 프레시안. 작성자 : 조영일 문학평론가.

 

그리고 과학소설, 그러니까 말하자면 ’순수’문학이 아닌 장르문학 작품 <개미>가 한반도 남쪽을 강타했다. 복잡하면서도 정교한 플롯과 추리소설의 구조를 갖추고 있어 흡입력이 뛰어나고, 백과사전식 지식을 겸비하고 있어 소소하게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이후 발표한 작품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늘날까지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베르베르(한 기사에서 열린책들 사옥을 베르베르 덕분에 지을 수 있었다고 할 정도니 말 다 했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개미 이후로 창조의 샘이 말랐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나무까지 좋았다, 그래도 파피용까지는 괜찮았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열심히 베르베르의 신간을 사 모은 덕분에 15권 가량 컬렉션을 갖추고 있으면서 공급이 너무 많아 중고책방에 팔지도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읽을 땐 재밌지만 막상 다 읽고 나면 별로 남는 게 없는… 중학교 정도에 베르베르를 만나고, 고등학교 땐 실존주의에 빠졌어야 했는데…이런 표현이 적당할 지 모르겠으나 배부른 푸념이다.

 

1. 밀란 쿤데라, 그의 리스트와 그가 사랑한 리스트

 

밀란 쿤데라. 한국인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짐작이 되지 않지만 한때 작가들 사이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게 유행이던 시절도 있었다고 하고(빨간책방에 따르면 김중혁 소설가는 군대에서 이 책을 탐독했다고 한다. 군대에서 읽었으면 더 쫄깃했을 것 같은 ’연애’소설 ^^), 최근 밀란 쿤데라 전집(잠깐 자랑을 하면 이번 민음사 패밀리 세일을 통해 밀란 쿤데라 전집을 장만했다~ 오픈한 지 3시간 정도밖에 안 지난 상태에서 생은 다른 곳에와 소설의 기술이 동나는 바람에 구멍이 조금 뚫려 있긴 하지만 ㅜ)이 출간된 것까지 보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작가, 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도 절대 잊을 수 없는 바로 그 제목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작가도 이 절묘한 제목이 아까웠는지 다른 작품 <불멸>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지금 자네가 쓰는 게 정확히 어떤 건가?”

“소설 속의 소설이요, 내가 써 본 것 중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가 될 거야. 자네 역시 그 이야기를 읽고 슬퍼할 걸세.”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이 구절이 말해주는 시사하는 바는 쿤데라의 소설작업이 일정한 문제의식 아래 꾸준히 이뤄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쓴 작품의 제목들을 열거해보면 좀 더 이런 경향이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느림, 농담, 우스운 사랑들, 이별의 왈츠, 정체성, 향수, (소설의 기술), (배신당한 유언들), (커튼), (만남), 무의미의 축제까지. 이 제목들이 밀란 쿤데라의 개성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불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 <생은 다른 곳에>, 연애소설의 냄새가 풍기는 <이별의 왈츠>, <우스운 사랑들>, 정치소설의 냄새를 희미하게 짐작해볼 수 있는 <정체성>, <향수>까지.

그리고 우리는 이 체코 출신의 프랑스어권 작가의 개인적 소설사에 대해 아주 상세히 꿰뚫고 있다. 프랑수와 라블레, 세르반테스, 스턴, 레프 톨스토이,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토마스 만, 하세크,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블로흐, 로베르트 무질, 사무엘 베케트, 비톨트 곰브로비치… 계획 - 체계 - 소설사 3無 독서를 해온 나에겐 꽤 큰 충격이었다. 불멸의 고전부터 현대의 고전, 동시대의 뛰어난 작품들까지… 좋은 작품들을 너무 많고, 읽을 시간은 부족하기 때문에 책의 명성을 뒤쫓다 보면 꽁무니만 따라다니다 지칠 수밖에 없다. 쾌락형 독서를 지향하거나 넓이를 추구하는 독서를 지향하는 사람이라면 크게 상관없을 지도 모르겠지만 ’깊이’를 추구하는 사람에겐 심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나만의 소설사 만들기. 이는 자기문제 의식에 천착하지 않고, 자기 세계를 구축하지 못한 사람은 해내기 힘든 과제이다. 위의 기사에서 조영일 문학평론가가 역설하는 리스트의 중요성도 이와 맥을 함께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리스트가 어떻게 구축될 지 잘 모르겠지만 밀란 쿤데라는 이미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2. 쿤데라와 나.

 

밀란 쿤데라 에피소드 1 : 친구의 소개로 참석하게 된 모임에서 매력적인 여성과 귀갓길을 동행한 일이 있다. 지하철 역에서 방향이 달라 헤어지기 직전의 나눈 대화이다.(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상상의 힘을 빌려 재구성한 대화임을 밝혀둔다)

 

나 : 처음 만나는 사람한테 던지는 질문이 있어요.

여인 : 뭔데요?

나 :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가요?

여인 : 왜 그 질문을 하는데요?

나 : 무슨 작가/작품을 좋아하는지 알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잖아요.

여인 : 그래서 ~~씨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인데요?

나 : 사실 이 질문을 생각하고 나서 스스로에게 물어봤는데 답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그래도 꼽자면 카프카, 카뮈, 밀란 쿤데라 정도.

여인 : 한국 작가 중엔 없어요?

나 : 소설은 박민규(이 시점에서 아직 김연수를 다 안 읽은 걸로 기억), 시는 황지우, 김경주 좋아해요.

여인 : 이 작가들을 좋아하는 ~~씨는 어떤 사람이죠?

나 :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 문학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요. 마지막은 라깡이 한 말 베꼈어요. 혹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어보셨어요?

여인 : 아뇨.

나 : 거기서 제가 제일로 좋아하는 구절 중에 하나가 있는데 뭔지 아세요? 아, 안 읽어보셨다고 했지.

여인 : 얘기해줘요.

나 : 남자 주인공 집에 여자 주인공이 처음 가는데 거기서 책장에 수많은 책들이 꽂힌 걸 보고 이 남자는 믿어도 되겠다 생각하는 장면이 나와요. 책을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함부로 행동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안심한 거죠.

여인 : 책 소장량과 책에 대한 사랑이 비례한다고 볼 수 있을까요?

나 : 음… 비례할 확률이 높다 정도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여인 : 그쵸. 확률적으로.

나 : 책을 사랑하고 마음에는 한 번뿐인 삶에서 한 번밖에 살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깃들어 있는 것 같아요.

여인 : 한 번밖에 살지는 않겠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나 : 사르트르는 탄생과 죽음 사이에 선택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선택의 순간에 직면하잖아요. 뭔가를 선택하는 동시에 다른 뭔가를 선택하지 않죠. 한 권의 책을 읽기로 선택하는 순간 그 책을 읽는 동안 만큼은 그 한 권을 제외한 모든 책을 읽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죠. 사랑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를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 사람을 제외한 전 인류를 사랑하지 않게 되는 거죠.

여인 : 하지만 전 남자친구를 사랑하면서 부모님을 동시에 사랑하는 데요.

나 : 정말이요?

여인 : 네, 그럼요.

나 :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고요? 잘 생각해보면 실제로 사랑의 느낌은 한 곳에서 올 것 같은데요.

여인 : 듣고 보니 그럴 지도 모르겠네요.

나 : 마음의 방이 두개인 사람도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진 못할 거예요.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옮기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

여인 : 그 시간이 눈 깜짝할 새라면 동시에 사랑한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나 : 뭐, 어쨌든 제가 얘기하고 싶었던 건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인생을 연습한다는 거예요. 실전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선택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를 최소화시키기 위해 남의 인생을 계속 훔쳐보려는 거죠.

여인 : 오늘 얘기 즐거웠어요.

나 : 저도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에피소드 2 : 밀란 쿤데라 혹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대한 한 마디들.

남자 1 : 나는 요즘 소설은 잘 안 읽게 되더라고. 읽을 땐 재밌는데 별로 남는 게 없는 느낌이랄까.

남자 2 :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는 읽을 만해. 문체가 철학적이야.

남자 3 : 남자들이 여자들 앞에서 잘난 척하기 좋은 책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잖아.

 

나 : 혹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봤어?

친구 : nope! 허나 하도 이야기를 많이 들어 다 읽은 것 같은 기분.

 

에피소드 3 : 애정하는 지인과의 대화(역시 재구성)

 

지인 : 저는 연애는 별로인 것 같아요?

나 : 아니, 왜요???

지인 : 연애하면 좋긴 좋은데, 남는 게 없는 것 같아서 허무해요.

나 : 그럼 사랑은요?

지인 : 사랑은 연애랑 좀 다른 것 같아요.

나 : 어떻게 다른데요?

지인 : 사랑은… 음… 논리적으로 설명하긴 힘든데 느낌상으로 상대방을 위하고 희생하는 측면이 강한 것 같아요.

나 : 사랑은 이타적이고, 연애는 이기적이고 이런 건가?

지인 : 꼭 그렇다고 볼 순 없는데 그런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요즘엔 사랑은 그냥 호르몬 작용 아닌가? 이런 생각도 많이 들고.

나 : 저도 스무 살 즈음에 그런 생각에 빠져서 허무주의 같은 거에 엄청 시달렸었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고요.

지인 : 왜요?

나 : 음… 말로 설명하긴 힘드니까 나중에 거기에 대해 글쓴 거 보내드릴게요. 아 그리고 연애 말인데. 연애가 밥 먹고, 영화 보고,여관 가고 틀에 박혀서 관습화되면 소모적인 측면이 있긴 한데 그 가벼움 안에서도 진실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좋은 의미의’즐김’으로 연애를 본다면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지인 : 연애가 나쁘다는 건 아닌데 전 그냥 지금은 별로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어요.

나 : 그러면 한 번 밀란 쿤데라라는 작가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읽어보세요. 그 작품이 사랑에 있어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에 천착한 소설인데…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지인 : 이름은 들어보긴 했는데.

나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중의 하나기도 하고요.

 

3. 축제의 서막 : 대문자 정치와 오줌.

 

무의미의 축제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칼리닌그라드의 칼리닌과 요제프 스탈린이었다. 그 중에서도 한 명만 꼽자면 칼리닌이었는데, 그 이유는 차이콥스키, 톨스토이, 푸시킨 등 쟁쟁한 러시아를 빛낸 위인들을 제치고 별 다른 이유 없이 자기 이름을 딴 도시를 갖게 된 기구한 운명 때문이었다. 레닌그라드, 스탈린그라드와 달리 아직까지 그 이름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겉보기에 이런 명성과 어울리지 않는 속좁은 방광, 불협화음을 내는 전립선의 U(rine) 코드가 감성을 웃음과 연민을 자아냈다. 비슷한 체험을 한 경험이 있는데 바로 김영하 작가가 극찬한 바르가스 요사의 정치소설 <염소의 축제>에서 나신의 소녀 혹은 여인을 앞에 두고, 도미니카를 지배하고도 자신의 방광/전립선만큼은 지배하지 못한 독재자 트루히요가 떠올랐다. 독재자와 오줌보. 기형도 시인이 ’질투는 나의 힘’이라 말했던 것처럼 정치적 지도자에 오른 사람 중에 심한 결핍/컴플렉스를 갖고 있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만나볼 수 있었는데 ’무의미의 축제’를 통해 오줌형 캐릭터의 체계를 정립할 수 있게 됐다. 칼리닌이 아닌 스탈린이 그랬다면 더 의미?가 있었겠지만 대문자 정치의 서사에서 오줌이 등장함으로써 역사/정치적 배경이 소설의 무대에 매끄럽게 안착할 수 있었으리라. 보잘것없는 것 - 핍진성의 사물 - 사랑의 소재 - 소설의 질료.

 

4. 무의미의 축제 : 배꼽의 시대의 개막

 

알랭은 배꼽에 대해 곰곰히 생각한다…?! 배꼽은 참 묘하다. 신체 기관이 대부분 바깥으로 돌출돼 있는데 배꼽은 참호를 파고 숨은 군인처럼 배 안 쪽에 웅크리고 있다. 완만한 배의 곡선에서 갑자기 나타나는 벙커bunker. 긁으면 때가 나오는 기분이 묘해지는 부위. 섬세하게 쓰다듬으면 또 다른 묘함을 느끼게 하는 부위. 항문과 성기 다음으로, 아니 어쩌면 항문 다음으로, 경우에 따라선 항문보다 더 보기 귀한 신체 부위. 숨어 있는, 태초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탄생의 징표, 원초적 상처의 흔적, 에로티시즘의 처녀지. 쿤데라는 알랭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허벅지, 가슴, 엉덩이는 여자들마다 다 형태가 달라. 그러니까 이 황금 지점 세 개는 단지 흥분만 불러일으키는 게 아니고, 그와 동시에 한 여자의 개체성을 나타내 준다고. 사랑하는 여자의 엉덩이를 못 맞힐 수는 없잖아. 수없이 많은 엉덩이 중에서도 자기가 사랑한 엉덩이는 알아볼 것 같아. 그렇지만 배꼽을 가지고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여자라고 말할 수는 없어. 배꼽은 다 똑같거든.(p138)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천 만 분의 1의 차이를 탐색하고자 수없이 여자들과 몸을 섞었던 토마시가 연상되는 대목이다. 한 글에서 철학자 양운덕은 토마시를 ’차이의 철학자’라고 설명했다. 차이가 사라진다면, 차이가 부정되면 대체불가능이란 사랑의 근본적 속성도 부정된다. 한동안 재밌게 봤던 <마녀사냥>에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 여성이 보낸 사연이었는데 자신이 외국으로 6개월 정도 체류하고 있는 동안 한국에 남아 있는 남자가 바람을 폈다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남자가 자신과 똑 닮은 여성을 사귀었고, 그것 때문에 남자에 대한 분노/배신감이 많이 중화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은 남자가 자신이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자신과 똑 닮은 ’아바타’를 통해 자신에 대한 외로움을 달랬으리라 추측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사고방식의 기저에는 외모를 자신의 본질적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기술복제시대를 넘어 가히 외모복제시대에 진입했고, 점점 더 진입하고 있는 시점에서 외모의 아우라… 지켜지길 바라지만 미래전망이 어두워 보인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생각해볼 만한 것은 여성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의 인격, 내면보다 외모를 중시하고 사랑했다는 결론에 이르는데 그걸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럽게 용인하고 있는 여성의 태도가 내겐 조금 문제적이다. 대체가능과 대체불가능의 영역이 모호하게 섞여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작동하는가, 그리고 완성되는가.

알랭의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자.

 

“이 네 가지 황금 지점은 각각 하나의 에로틱한 메시지를 나타내. 그러면 배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에로틱한 메시지는 뭘까?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말했다. “한 가지는 분명해. 허벅지나 엉덩이, 가슴하고는 다르게 배꼽은 그 배꼽을 지닌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고, 그 여자가 아닌 어떤 것에 대해 말한다는 거야.”

“뭐에 대해서?”

“태아.”

“태아라, 그렇지.” 라몽이 인정했다.

그리고 알랭이 말했다. “예전에 사랑은 개인적인 것, 모방할 수 없는 것의 축제였고, 유일한 것, 그 어떤 반복도 허용하지 않는 것의 영예였어. 그런데 배꼽은 단지 반복을 거부하지 않는 데서 그치지 않고, 반복을 불러. 이제 우리는, 우리의 천년 안에서, 배꼽의 징후 아래 살아갈 거야. 이 징후 아래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같이, 사랑하는 여자가 아니라 배 가운데, 단 하나의 의미, 단 하나의 목표, 모든 에로틱한 욕망의 유일한 미래만을 나타내는 배 가운데 조그맣게 난 똑같은 구멍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섹스의 전사들인 거라고.” (p138~139)

 

이쯤 되면 우리는 소설 뒤표지에 적힌 문장이 어떤 의미인지 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보잘것없는 것을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사랑은 사랑스러운 것에서 오지 않는다. 보잘것없는 것, 그것을 향해 기울이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사각에 핀 꽃, 그러니까 사랑은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는 문학에 평생을 걸어 거장의 반열에 올랐고, 아마 몇몇 작품들은 불멸의 고전의 지위를 누릴 테지만 그가 죽으면 그 명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의 모든 빛들은 죽음의 가정 앞에 빛이 바래고 만다. 하지만 죽음을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러니까 삶 다음에 죽음이 있고, 삶과 죽음을 구분해서 생각하지 않고, 삶과 죽음이 서로 대립되지 않는 한 쌍이라는 것을, 이 모순을 받아들인다면 삶/죽음은 의미/무의미의 틀에 갇히지 않는 선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서로 떨어져야 했던 알랭과 어머니의 화해처럼. 생은 다른 곳에서 와서 다른 곳으로 가지만 생이 있는 곳은 오직 지금 여기 내 앞이다. 아니 지금 여기의 나 (0,0,0,0)자체에 있다. 다른 곳으로 떠나는 생에게 ’잘 놀다 갔다’고 천진한 웃음의 작별인사를 건넸던 천상병 시인처럼 삶/죽음과 화해한 이는 무의미의 축제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함께 읽어보자.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5. 축제가 끝나고 난 뒤 : 배꼽에게

 

배꼽과의 눈맞춤. 최근의 일이다. 지하철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책을 읽고 있던 내 앞에서 한 여인이 옷매무새를 정리하려는 듯 상체를 뒤로 젖혔고 불현듯 배꼽과 눈이 마주쳤다. 여인은 부끄러운 듯 성급하게 배꼽을 가렸고, 나와 배꼽의 해후는 순식간에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배꼽은 참 여성적인 신체기관이란 생각이 든다. 바깥으로 공격적으로 돌출되어 있지 않고 안으로 둥글게 무언가를 품고 있는 듯한 배꼽. 사전을 찾아보니 배꼽에 이런 뜻도 있었다. 열매의 꽃받침이 붙었던 자리. 배꼽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배꼽은 어머니-자궁이란 태초의 세계와의 이별/부재를 현시하면서 무엇보다 삶에 대해 말한다. 그러니까 배꼽은 심보선 시인이 ’인중을 긁적거리며’에서 그렸던 인중처럼 카오스에서 존재를 출현하게 하는 최초의 사랑의 입맞춤의 자국일 지도 모른다. 그저 있음(Il y a). 배꼽을 보며 존재자 이전의 존재의 세계를 상상해본다. 존재자 없는 존재, 어쩌면 존재 없는 존재. 진화의 단계상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기관화된 신체의 성장을 거치지 않고 태초의 박테리아, 무성생식, 자신을 둘로 나누기 위해, 찢어버리기 위해, 자신을 죽임으로써 더 큰 자신을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때로 돌아가본다. 아니 어쩌면 그 이전, 빅뱅… 혹은 빅뱅 이전…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그녀의 배꼽에 살포시 손가락을 올려놓아보고 싶다. 그렇게 배꼽과 배꼽이 맞닿을 수 없다는 근원적 한계/그리움을 달래보고 싶다.

 

 

 

 

p.s 2002년 즈음 배꼽티가 유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약 12년 만에 배꼽의 시대가 돌아왔다. 배꼽의 특성상 이 시대가 오래가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꼽이여 거기 오래 남아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