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몸으로 한 몸인 새떼 : 32년 비행의 기록

“시로 덮인 한 권의 책”(장정일, <시집>)을 읽기 전 들리는 곳이 있다. 시인의 약력이 소개된 앞표지의 뒷면. 이곳에서 독자들은 변화무쌍하며 결코 시들시들하지 않은 시들을 만나기 전 준비운동을 한다. 쓰읍하 쓰읍하. 언제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무엇을 공부했는지, 어디로 등단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무슨 상을 수상했는지 몇 줄 안 되는 이곳에서 우리는 시인에 대한 사전정보를 얻는다. 여기까지만 읽어선 아직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내 마음 속 시인. 일상에서 우리는 센티멘털한 말에 대해 시(인) 같다고 하는 반응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평소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라도 교과서와 대중매체, 일상 속에서 접하는 시를 접해 시를 읽든 읽지 않든 마음 속 시인의 이미지를 품고 있을 것이다. 당신의 시인은 어떤 목소리를 가지고 있나요? 당신의 시인은 어떤 시인에 가장 가까운가요?

 

 

 

김수영. 제가 좋아하는 블로거 한 분의 마음 속 시인은 김수영이었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불온했기에 자유로웠고, 날카롭게 비판하되 약자가 아닌 강자에게 맞섰기에 차갑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른이었고, 무엇보다 시인이었습니다. 시인다운 시인이란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으나 끊임없이 자신을 창조해내는 존재론적 시간 속에 살았다는 점에서,삶과 시의 일치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추구했다는 점에서 참으로 ‘진실’한 시인이었음에는 틀림없습니다.

 

 

 

여기 김수영의 시 정신을 계승한, 혹은 김수영이 추구했던 그 어떤 세계를 자신의 방식대로 추구했다. 여기 31명의 시인이 있다. 정희성부터 손미까지 짧지 않은 역사만큼이나 그 층위를 이루는 겹은 다면적이며 깊다. 이 온몸으로 한 몸인 새떼의 비행을 함께 할 수 있어서, 김수영이라고 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의 창공을 수놓은 새들의 발자국과 함께 걸을 수 있어서 독자로서 행복했다.

 

 

 

여기서부터는 시 선집에 묶인 시 중 특히 얘기하고 싶은 몇몇을 뽑아 얘기하고자 한다.

 

 

 

 

 

정희성 - <겨울꽃>-이길용 화백의 그림에 부쳐

 

 

 

 

엉겅퀴여, 겨울이 겨울인 동안

네가 벌판에 서 있어야 한다

바람 속에서 바람을 맞아야 한다

머지않아 천지에 봄이 오리니

엉겅퀴여, 네가 엉겅퀴로 서 있지 않을 때

이 땅에 내가 무엇으로 서 있겠느냐

엉겅퀴여, 나의 목마른 넋이여(필자 강조)

겨울이 겨울인 동안

네가 엉겅퀴로 서 있어야 한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어찌 보면 별거 아닌 동어반복으로 보이는 이 문장을 몇 번 들어본 적 있다. 존재/존재자의 개념을 배우지 못했더라면 엉겅퀴를 호출하는 시적 화자의 목소리(이 목소리가 시인의 목소리로 들리는 건 나뿐만이 아닐 거라 생각된다)가 이렇게 아프게 들리진 않았을 것이다. 겨울이 겨울인 동안 바람 속에서 바람을 맞으며 엉겅퀴는 서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 당위적 소명을 드러내는 어조에서 느껴지는 건 어떤 목적의 달성을 위해 고통에 대한 인내를 강요하는 단호함이 아니라 자기중심(中心)을 잃지 않기 위해 고통에 대한 인내를 말하는 결연함이다. 엉겅퀴와 함께 호명되는 것은 다름 아닌 나의‘목마른’ 넋이다. 나는 자연스레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을 연상했고, 어렵지 않게 이 겨울을 한국정치사의 춥고 암울한 시대로 읽어낼 수 있었다(이 독법이 언제나 옳은 독법이라 생각되지 않긴 했지만). 목마르고, 춥고, 아마도 배고플 텐데 서 있으라 한다. 서 있어야 한다고 한다. 쓰러져누워서 이 목마르고, 춥고, 배고픈 시절이 지나가기를 바라는 게 차라리 자연스러워 보이는데 “겨울이 겨울인 동안 네가 벌판에 서 있어야 한다”가 반복해서 말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겨울에도 꽃이 피나?’ 꽃은 질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꽃은 꽃이라서 꽃을 피운다. 겨울이라고 꽃이 풀이 되진 않는다. 목마르고, 춥고, 배고픈 시절에도 꽃은 꽃이다. 그리고 어쩌면 꽃이 자기정체성 혹은 단독자로서 삶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다면 꽃이 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기회주의적 태도로는 피상에 닿을 수 있을지언정 본질에 이르는 데 실패하고 말 것이다. 생로병사-생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그 사이 죽음의 과정이라 볼 수 있는 죽음과 병이 있다. 이 연대기에서 고통만 읽어낸다면 삶의 텍스트는 고통으로 가득 찬 비관적 색체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꽃을 보라. 꽃의 아름다움은 비단 색체적 향락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씨앗에서 새싹이 돋아 꽃을 피우기까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고, 그 고통을 견뎌내고-어쩌면 견뎌냄의 방식으로 이겨냈기 때문에(모든 고통은 아니지만 어떤 고통은 오직 견디고 버티는 인내를 통해서만 이겨낼 수 있는 게 아닐까) 꽃을 피워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꽃에게 꽃의 의미는 무엇일까? 혹자는 단순히 종족번식을 위한 진화의 전략으로 아름다움을 택했다는 설명을 채택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감정을 느낄 지도 모른다. 인간이 생존이 아닌 삶을 말하고, 인간다움에 대해 탐구하는 건 종족번식의 본능적 명령 이외에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를 테면 아무 쓸모없는 아름다움 따위. 고통을 회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서 긍정이 느껴져서, 그 높고 곧은 정신의 이상이 느껴져서 “서 있어야 한다”의 선언에서 어떤 근원적 생명력, 엘랑 비탈을 보았다. 바로 이 지점에서 김수영의 시 정신이라 부를 수 있는 무엇을 느꼈던 것 같다. 잘은 모르지만, 그래서 더 탐구하고 싶은 시…

 

 

 

 

 

 

 

 

 

 

 

 

 

 

이성복

 

 

 

 

김수영문학상 제2회 수상자는 다름 아닌 이성복 시인이다. 좀 전에 동영상으로 이성복 시인의 목소리를 듣고 와서 그런지 이 이름 석 자가 참 먹먹하다. 시집의 뒤표지에 실린 ‘문학, 불가능에 대한 불가능한 사랑’을 한동안 참 많이 인용하고 떠벌리고 다녔다. 어떤 근원적 슬픔이 와서 혹은 예감해서 방황하고 아파하던 시기에 그 글이 많은 힘이 되었다. 말이 나온 김에 글을 같이 읽어보자.

 

“도대체 불가능에 관한 모든 논의는 헛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저도 잘 압니다. 그러나 한 번 불가능의 얼굴을 본 사람은 스스로 불가능이 되기까지 잊을 수가 없다고 합니다. 또한 그것이 제 똥을 주무르는 치매환자의 미소처럼 그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견딜 수 없는 향락을 가져다준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가 알아버린 그 불가능의 입구는 생-사-성-식의 불길한 화환과 불후의 먹이사슬로 둘러싸여 있고, 그 속에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못 나오는 심연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오직 인간과 가까이한 죄로 자손 대대로 천형 받은 짐승들처럼, 우리 또한 불가능이 애지중지 기르는 가축들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비록 천형을 피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천형 받은 줄은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문학이 소중한 것은 검은 보자기 속 어둠으로 들어가 스위치를 누르는 사진사처럼 한 순간, 한 순간 불가능을 기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홀로 문학이라는 암실에서 불가능과 마주하는 일은 고요한 시체 안치소에서 시트를 들치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 이상으로 끔찍합니다. 지금 제가 어두워야 불가능이 드러나고, 제가 사라져야 문학이 삽니다. 비록 제가 문학적으로 살지 못해도 저는 문학을 믿습니다. 그처럼 제가 비록 불가능을 잊는다 해도, 불가능이 저를 기억할 것입니다.”

 

 

 

 

처음에 부분인용하려 했으나 결국 전문을 옮겼다. 하나도 버릴 수 없는 슬픔이여서 그런지 하나도 버릴 게 없다. 특히 그 슬픔이 아름답게 수놓아진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시인이 <세월에 대하여> 남긴 기록은 아프지 않게 아프다. 피가 줄줄 흐르는 상처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기보다 상처로 인해 뚫린 구멍을 보여준다. 감각이 마비돼 피부에 구멍이 숭숭 뚫려도 고통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의 평화가 이런 느낌일까. 다른 작품에서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고 적었던 시인에게 세월의 풍경들은 “대부분 환영”이었고, ‘구멍으로부터 돌아온’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세월이란 말이 주는 아득함, 고통스런 터널을 지나고 있음을 발견했을 때 자신이 아직 절반도 미처 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 드는 막막함, 그 막막함을 몸으로 밀고 나왔을 때 아직도 거기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답답함, 그 답답함에서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할 것 같은 뼈아픈 예감. 우리 각자의 경험은 교과서나 역사서에 기록되지 않은 개별의 역사를 담고 있다. 한 세월을 통과한 이들이 간직하고 있는 무한히 다양한 풍경. 이성복이 펼쳐 보이는 세월의 풍경에는 흐흐 웃는 아버지가 있고, 환한 날에 잠자는 누이가 있고, 동시상영관에 죽치고 있는 친구가 있고, 사랑이 있다. ‘네가 잠자는 두 어 평의 방’인 나, 남들처럼 두어 번 연애에 실패한 나, 노는 사람이나 놀리는 사람이나 그리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했던 나, 비좁고 습기 찬 문간을 지나가야 했던 나.

 

 

 

 

우리가 과거에 대해 말할 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알 수 있는 부분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따라 허구의 판타지가 될 수도 있고 진실한 고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성복의 시를 읽으면 이미 한 번 슬픔으로 초벌된 목소리에 아프고, 그 슬픔을 담담하게 꺼내놓음으로써(‘이야기된 고통은 고통이 아니다’) 묘하게 형성된 그리움의 정서에 위안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래여애반다라의 인터뷰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시로서 각인시키고 싶은 것은 말할 수 없음, 어찌할 수 없음, 속수무책, 속절없음이다. 얼마 전에 블로그를 봤더니 하… 이 사람 참 헛소리 안 하고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히면서 갉아먹으면서 왔다. 그 얘기 듣고 눈물이 펑펑 쏟아졌어요.‘ 래여애반다라 해설을 보면서도 계속 괜찮지 않게, 안녕하지 못하게 살아주신 당신의 괜찮지 않음, 안녕하지 못함에 고마움을 표하는 이의 마음이 전해져서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고독으로, 슬픔으로, 괜찮지 않음과 안녕하지 못함으로 연대하는 조금은 쓸쓸하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을 것 같은 강인함이 느껴지는 마음들의 풍경을 이성복의 시에서 봐왔고, 지금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아프고 아파서 끝내 정든 그리움으로 남겨질 시간을 그의 시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황지우

 

 

 

 

황지우 시인을 유독 좋아하는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블로그의 황지우의 시를 옮겨 적었습니다. 황지우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시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지만 느껴지는 정서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녀가 느낀 황지우 시의 정서, 느낌, ‘황지우적’임은 무엇이었을까 저는 궁금했습니다.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부터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게 눈 속의 연꽃,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까지 읽고 나니 그 느낌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그의 시는 정치적이고, 관념적이고, 무엇보다도 서정적이었습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말한 소격효과를 내는 새로운 미학적 형식을 추구하는 모더니즘적인 시에서 뼈아픈 후회 같은 개인적 고백이 드러나는 서정적인 시, 80년 광주의 이야기를 담은 정치적인 시, 사막을 순례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담은 관념적인 시… 조각, 미술평론까지 예술 전반에 대한 그의 화려한 편력은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그가 마음 앞에서 작아질 때, 남들에게 보여주기 싫을 작아진 모습을 보여줄 때 그에 대한 애정이 한층 깊어졌습니다. 학생들에게 포이에르바하를 파는 자신을 책망하는 모습에서 지식인의 가식이나 허위에 대한 혐의를 지울 수 있었고, 아내에게 미안해하는 모습에서 한 여자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진심을,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 이의 쓸쓸한 뒷모습에서 거룩함을 포착해내는 깊은 시선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을,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순탄히 않은 길을 꿋꿋이 걸어온 시인의 삶을 보며 진실한 삶의 태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위인전은 그 인물의 혁혁한 업적을 통해 그에 대한 존경심이 생긴다면, 문학은 그가 살아온 삶의 기록에서 느껴지는 한 인간의 영혼을 통해 그에 대한 사랑이 생기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장정일

 

 

 

 

햄버거에 대한 명상. 참 독특한 제목이다. 무슨 내용을 담고 있을까? 이 정도가 이 시집에 대한 최초의 기억이다. 이 시집의 이름은 사실 김경욱 작가의 소설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장정일 작가가 시인일 줄 몰랐던 시절의 이야기다.시간이 흘러 장정일 작가가 시를 썼다는 사실과 시귀(詩鬼)가 들어올 때 시를 썼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리뷰어 당첨 소식을 접하고 나서 도서관에서 바로 말로만 듣던 시집을 대출했다. 이전에도 인터넷 서점에서 장바구니를 들락날락거렸던 전력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벼르고 벼르던, 이를 테면 대청소 같은 해묵은 계획을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결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이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리던 불온한 정신의 출현이었던가. ‘맛이 좋고 영양 많은 미국식 간식’을 명상하는 것만으로 머릿속에 불온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니! 시인의 솜씨에 감탄했다. 개인적으로 신이현 작가의 ‘숨어 있기 좋은 방’을 읽은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의 불온성을 비교하며 읽을 수 있어서 흥미로운 독서경험이기도 했다. 침을 맛깔나게 뱉는 그의 혀에서 다시금 시가 쏟아지게끔 독자로서 희망하게 되었다.

 

 

김기택

 

 

 

 

대놓고 윤리를 문제 삼는 시. 김기택 시인의 시집 ‘소’를 자신의 팟캐스트에서 읽으며 덧붙인 김영하 작가의 말이다.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시집을 읽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내게 시집을 읽는 시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이 언어를 통해 시인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했다. 주제를 파악하고, 시어의 의미를 추출해내는 국어교육에 길들여진 내게 시집은 수수께끼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끝까지 읽어본 시집은 아마도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었던 것 같다. 질투는 나의 힘, 대학시절, 빈 집, 엄마 걱정 같은 시를 읽으며 굳어있던 마음이 처음으로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포도밭 묘지 같은 시 앞에서 이해할 수 없는, 커다란 장벽을 느꼈다. 후에 김기택 시인을 만나고 그를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시와 좀 더 일찍 화해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직구를 연상시키는 그의 시의 가장 큰 힘은 묵직한 사유에서 길어 올린 은유의 날카로움이라고 생각한다.

 

 

 

 

시인은 ‘얼굴’을 ‘차갑고 무뚝뚝하고 무엇에도 무관심한’ 물체라고, ‘내 얼굴이 생기기 전부터 있었음직한 그 튼튼한 폐허’라고 말한다. 그는 김영하 시인의 표현대로 좋은 눈을 바탕으로 관찰한 사물과 풍경의 껍질을 벗겨낸다. 그의 언어는 단순히 피부를 벗겨내는데 그치지 않고 영혼을 벗겨내 어떤 심연에 도달하다. 이를 테면 ‘얼굴 뒤로 뻗어 있는/ 얼굴의 기억이 지워진 뒤에도 한참이나 뻗어 있는 긴 시간’을 보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세계로 돌아오기 위해 ‘한동안 눈을 깜빡’이며 ‘서류 속의 숫자에 초점을 맞춰’야 했다. 그는 현란한 수사를 동원하거나 언어를 꼬거나 하는 기교를 부리지 않는다. 정제된 언어로 하나의 질서를 이루고 있는 단단한 세계 속 혼란을 끌어내 우리 앞에 갖다놓는다. 잠들어있는 건 질서 속 혼란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이다. 야성에 덧대어진 보호막이 찢겨나가면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어떤 맨 얼굴이다. 현상을 패턴화하는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허상, 질서화된 혼란이 해체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본질을 볼 수 있게 된다. 자신의 ‘귓구멍을 단단하게 틀어막고 있는 고요’가 ‘사실은 거대한 소음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처럼, 이 간단해 보이는 간단하지 않은 뒤집기에서 오는 불쾌감의 쾌감! 소처럼 계속 써주시길.

 

 

 

 

 

유하

 

 

 

 

어린 친구들에게 영화감독으로 친숙할 이름 유하. 무림일기는 내게 하나의 신세계였다. 시도 재밌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려준 작품. 저속한 언어가 아닌 재기 넘치는 풍자의 언어로 강자를 ‘발라버릴’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약자의, 언어를 무기로 삼는 이의 저항방식이라는 것을 유하를 통해 유쾌하게 배웠다. ‘모든 금지된 것들을 열망’했던 시인의 청춘은 하나의 ‘해적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세상은 교과서를 배워야 하는 곳이고, 교과서가 알려주지 않는 빨간 책을 금지하는 곳이니 우리는 ‘등록 거부한 세상’을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이 아닐까. ‘보이지 않는 길의 노래를 가르쳐’준 ‘애꾸눈’을 가지기 위해서. 금기를 어겨 운명의 심판을 받은 비극의 주인공처럼 뒷골목을, ‘비열한 거리’를 누군가는 비틀거리며 서성여야만 갈 수 있는 길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허송세월’일지라도, 그래서 ‘세상에서 영영 분실될’ 지도 모르는 불안한 길일지라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샛길로 빠지는 재미를 알아버린 자는 그 불온한 신발을 애용하게 되는 것을.

 

 

 

 

 

나희덕

 

 

 

그곳이 멀지 않다

 

 

 

바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 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 주었다

 

 

 

 

아무리 헤매도 돌아올 곳이 있어 다행이다. 죽음이 나를 찾지 못한다면 영영 헤매게 될 텐데 몸이 있어 죽음 앞에서 헤매지 않고 돌아와 누울 곳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쓸쓸한 육신을 위로해주기도 하니 죽음이 꼭 혼자만의 일은 아닌 듯하다.

 

 

 

 

 

김경주

 

 

 

 

얼마 전 여행을 했습니다. 이국이었습니다. 연인들의 뒤편이었습니다. 격렬한 입맞춤 뒤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고 얘기하고 다시 입을 맞췄습니다. 서로 자기 옆에 있는 사람에게 ‘꼴리는’ 듯했습니다. 상대방을 향한 마음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을 때 서로의 타액을 교환하며 살을 쓰다듬는 듯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음. 그 이기심이 아름다워 당신들은 정말 아름다운 연인이라고 말을 전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 서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두 사람이 격렬한 사랑행위에 지쳐 각자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지치지 않고 서로에게 계속 꼴렸고, 사랑을 했고 결국 식지 않고 술집으로 걸어가는 그들을 저는 붙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충분했으므로 잉여의 자막을 덧붙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게 처음 ‘내 고통에는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했을 때 저는 고통 앞에서 속수무책 어쩔 줄 몰라 하는 무기력한 논리의 양들을 떠올렸습니다. 오늘 저는 고통이란 충만한 힘으로 가득 찬 당신을 생각합니다. ‘오늘 중얼거리던 이방은 내가 배운 적 없는 시제에서 피는 또 하나의 시제’ 고통은 하나의 시제가 되는 걸까요. ‘내 몸의 이역들이 울음들’이라면 울음을 갖는 것은 내 몸에 내가 갈 수 없는 외로움을 키우게 되는 일인 걸까요. 당신이 덮었던 이불 속에 들어가 대책 없이 자라고 있는 머리카락과 속눈썹 곁에 체온을 놓아두었습니다. 이 체온의 수명이 다하기 전에 당신을 앓았던 슬픔의 구름을 지나 제 울음에 닿고 싶습니다. 당신의 슬픔을 통과하는 동안 빚어진 시차 속에 제 울음을 놓아두고 싶습니다. 바람이 불면 정확하게 슬퍼질 수 있도록 편지를 씁니다. 그곳에도 바람이 부나요?

 

 

 

 

 

황인찬

 

 

 

 

구관조 씻기기

 

 

 

이 책은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새를 다뤄야 하는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비현실적으로 쾌청한 창밖의 풍경에서 뻗어

나온 빛이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춘다

 

 

 

도서관은 너무 조용해서 책장을 넘기는 것마저

실례가 되는 것 같다

나는 어린 새처럼 책을 다룬다

 

 

 

“새는 냄새가 거의 나지 않습니다. 새는 스스로 목욕하므로 일부러 씻길 필요가 없습니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읽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이 책을 집어 든 것은

어째서였을까

 

 

 

“그러나 물이 사방으로 튄다면, 랩이나 비닐 같은 것으로 새장을 감싸 주는 것이 좋습니다.”

 

 

 

나는 긴 복도를 벗어나 거리가 젖은 것을 보았다

 

 

 

 

 

빛은 삽화로 들어간 문조 한 쌍을 비추고 있고, 나는 새를 사랑하는 사람이 새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를 다룬 책을 소리 내어 읽고 있고, 거리는 젖어 있다. 새를 키우지도 않는 내가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도서관에서 소리 내어 책을 읽지 않았다면, 거리가 젖은 것을 볼 수 있었을까 혹은 보았을까, 보지 못했을까? 알 수 없다. 단지 나는 이상한 믿음을 갖곤 있다. 우연에는 어딘가 필연적인 부분이 있다고. 새를 키우지도 않는 이에게 새를 사랑하는 이가 새를 어떻게 다뤄야하는지를 적은 책을 읽게 만든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 설명되지 않는 신비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새를 어떻게 다룬 책을 읽자? 새를 키우지 말자? 책을 소리 내어 읽자? 해설을 쓴 박상수 시인은 황인찬이 이 시집에서 일상의 이미지에서 신성함을 포착해낸다고 말한다. 그에게 시 쓰기는 신성을 회복하는 정화의 작업인 것이다.

 

그의 시를 읽고 나는 씻겨 졌는가. 모르겠다. 단지 아무 설명 없이 태어나 있는 내게 빛이 들어온다. 지금 여기 빛에 내가 있다.

 

온몸으로 한 몸이 되어 나온 한 권의 시집, 32명의 시인. 32년 간의 비행.  이들과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있어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