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벌레만도 못한 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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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의 뜻은 얼마나 비인간적이고 폭력적인가. 벌레만도 못하다는 것은 인간의 죄악스러움 중 어느 정도에 미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던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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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간적인, 패륜적인 범죄자 이외에도 냉철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밥벌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인간 이외의 취급을 받기 십상이다. 그저 어딘가 붙어서 단물을 쪽쪽 빨아먹는 ‘기생충’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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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로 변신해 버린 그레고르를 통해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을 비춰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과연, 인간의 탈을 쓰고 최소한의 윤리의식을 포기한 자가 벌레인가, 인간이 되고 싶었으나 사회적 또는 위치적 형편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인간의 역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자가 벌레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그 불분명한 경계 어디에서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 채 전부 코너에 몰아넣고 처리해야 할 ‘집단적 벌레’로 취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다정하지도 않고, 세세히 진단하지 못하는 사회적 규범이란 효율성을 따지는 원래 그런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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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모습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속은 시꺼먼 벌레이거나 혹은 속은 그런대로 인간적이나 겉이 흉측한 벌레인, 이 둘을 구분하기란 어지간히 판단할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그레고르는 억울하다. 최소한의 자신 역할을 다했을 뿐인데, 흉측한 모습 때문에 폭력을 당하고 죽음으로 내몰렸다. 실상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않는 비생산적인, 생계를 망치는 ‘ 벌레’였기 때문이다. 과연 효율성으로만 인간의 가치를 판단한다면 지금 무섭게 위협하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서 인간의 값어치는 얼마나 인정받고 존속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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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을 떠올린다. 궁지로 내몰린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숙주를 찾아 기생하다가 결국 모두 파멸된다. 여기에서는 과연 누가 벌레이고 누가 인간인가. 상위 숙주 밑에 기생하는 기생충? 또는 그 기생충에 붙어있는 하위 기생충? 그 상위 숙주는 인간이라고 할 수 있나? 그역시 어느 누군가에게 붙어사는 또 다른 모습의 기생충(벌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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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스스로가 자괴감이 들 정도로 하찮을 때가 있다. 그렇다고 쉽게 자신과 타인을 ‘벌레라는 인간 실격의 구렁텅이’까지 내몰지 말지어다.
작품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음에, 오늘날 나의 모습과 타인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겸허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