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진심-조해진
많이 울면서, 그리고 그 감정들을 고스란히 느끼면서 읽은 책. 인물의 대화, 독백, 그 구절 하나하나가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따듯해지기도 했다. 이름의 뜻을 찾아 떠난 문주처럼 다양한 한자로 서울의 지명, 그 사람의 이름의 뜻을 보여주며 풀어나가는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내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감정을 갖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 빛바랜 기억 속, 복희식당의 불을 켜고 그 아프지만 따듯했던 그 시절을, 복희와 복순을 떠올렸을 연희의 모습이 마음아프다. 문주, 복희, 연희, 수자… 한 동안 이름들이 계속 마음에 남을 것 같다. 진실을 알아도 혹은 알기 전까지도 증오와 원망을 계속 가지고 살았을 문주가 결국 모든 걸 찾아낼 수는 없었지만, 행복으로 우주와 함께하기를 응원하고 서영, 소율, 은의 영화가 상영되는 날, 함께 가서 울고 웃고 싶다.

- 문득 기관사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나를 흘겨보던 눈길, 내가 밥상 앞에 앉을 때마다 한 번씩 크게 내쉬던 한숨, 내 쪽을 흘긋거리며 기관사를 나무라던 목소리, 그러나….. 그러나 그녀는 저녁마다 나를 씻겨 주었고 자주 시장에 데려갔으며 동네 아이들이 내게 손가락질하며 거지라거나 고아라고 놀려 대면 어디서든 달려와 그들을 멀리 쫓아냈다. 그녀가 계속해서 코를 훔치며 내 머리칼을 땋아 주던 날도 기억의 프레임 안으로 들어왔다. 마당 한구석에서 내내 줄담배를 피우던 기관사가 이제 가자며 내 손을 잡자 그녀가 돌연 날 부둥켜안았다. 새 원피스가 그녀의 눈물로 젖어 갔으므로 그때 나는 다만 그것만을 염려했던 것 같다. 무조건 잘 살아, 잘 살아야 한다. 그녀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직 이별의 이미를 몰랐으면서도 이제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못하리란 건 그 순간 나는 분명하게 예감하고 있었다.
- 뭐든지, 다, 에브리, 에브리… 럭키하고 또 럭키한 그녀가 선택한 단어들에는 체온이 있었고, 그제야 나는 내가 고향에 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틀 전 밤, 서울에서의 첫날, 나는 그렇게 복희를 만났다.
- 내가 마지막으로 본 그의 손은 아무것도 쥐지 않았고, 붉거나 창백하지도 않았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면서도 아무런 변화가 없던 손, 그건 더없이 확실한 이별의 증표였다.
- 유창하게 설명하는 복희를, 그녀가 수수부꾸미를 알아듣기 쉬운 단어로 풀어내기 위해 고심했다는 게 짐작됐으므로, 나는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아기 가졌을 땐 무거운 거 드는 거 아니야.” 식당을 나서며 복희는 타이르듯 말했고, 나는 순간적으로 격하게 흔들리는 내 감정의 결을 해석할 수 없었다. 네가 받게 된 가장 처음의 배려, 그리고 내가 간절히 기다려 온, 너를 향한 타인의 환대……
- 두 개의 비닐봉지를 들고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대단해. 복희에게서 받은 스티로폼 상자와 마트에서 사 온 식료품을 냉장고 안에 넣으며 나는 속삭였다. 앙리가 살아 있었다면 내게 해주었을 말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바로 그 얼굴로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나나, 나를 할아버지로 만들어 주다니, 정말 대단해.
- 기관사와 그의 어머니는 몰랐겠지만, 나는 자주 동그랗게 웅크리고 앉아 다른 신발들에 섞여 있는 섬돌 위의 내 운동화를 가만히 내려다보곤 했다. 그럴 때면 달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먹은 듯 이유 없이 든든해지곤 했는데, 그 든든함의 다른 이름은 아마도 소속감이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 가져 본 감정이었다.
- 통화를 마친 뒤에야 리사가 우주의 생물학적 아버지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닷새 전에 내 전화를 받은 날부터 그녀는 내게 용기를 주고 싶다는 마음을 기준으로, 하고 싶은 말과 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정리했을 것이다.
- 복희가 내 삶에 개입한 배우라면 내게도 복희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보호, 그건 앙리와 리사, 그리고 정우식 기관사가 내게 취한 태도이자 행동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하나의 생명을 외면하지 않고 자기 삶으로 끌어들이는 방식.
- 연희는 그런 차별이 일상으로 행해지던 직장에서 바로 그 차별의 대상인 백복순과 친구를 넘어 가족이 된 것이다.
- 백복희로 태어났지만, 스테파니로 살아온 나와 넘버 원 닮은 여자. 우리의 닮은 구석은 눈매나 입매만은 아닐 터였다. 삶의 어느 장면에서 우리는 같은 자세로, 같은 표정으로, 같은 생각을 하며 투명한 벽 앞에 서 있곤 했을 것이다. 얼굴의 일부가 아니라 생애의 접힌 모서리가 절박하게 닮은 사람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엄마의 평안을 빕니다. 언제까지라도 변하지 않을 저의, 진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