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니콜라 마티외]


가족들은 지하 세계에 간신히 억눌러 담아 온 고통과 분노를 육중한 보도블록 위로 밀어내며 꾸역꾸역 살아갔다. 앙토니로 말하자면 이 모든 것보다 훨씬 더 우월한 자기 모습을 상상했다. 멀리 떠나기를 꿈꾸었다. 1992년, 프랑스 북동부에 위치한 에일랑주. 갑작스레 산업화가 해제되어 버리면서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어른들은 술과 함께 길거리를 나뒹굴었다. 경제적으로 폐허가 되어 당장 살길은 막막했고 암담했다. 1994년과 1996년. 에일랑주는 여전히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정의 불화와 이혼은 이제 너무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1998년.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으로 도시는 불타올랐다. 탈공업화가 되기 전, 활기찼던 과거로 돌아간 듯이. 92년부터 98년에 이르기까지의 세월 속 에일랑주는 희망적이라고는 볼 수 없는 환경이었지만 그들은 어쨌든 살아나갔다. 꾸역꾸역 살아갔다.

사실 미래란 건축물처럼 벽돌 하나하나를 쌓아 올리고 올바른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무서운 노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 길을 잃거나 낙오자가 될 게 불을 보듯 뻔했다. 꿈을 꿀 수도 없을 만큼 가난한 환경이었지만 그 시대에도 청소년들은 존재했다. 십 대의 평범한 프랑스인 앙토니, 앙토니의 첫사랑 스테프, 모로코 출신의 이민자 하신, 그리고 이외에도 많은 청소년들이. 그들은 폭력, 마약, 담배와 술에 항상 노출돼 있었고 세습적으로 대물림되는 가난과 씨름해야 했다. 운 좋게 몇몇은 그들이 나고 자란 에일랑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어디에서나 차별은 존재했다. 의사 아버지, 장학사 어머니. 바로 이런 사람들이 이 놀이를 만들었다.


물질적인 것, 만족감, 지금까지 이룬 것들에도 불구하고, 누구도 자신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생활이 아무리 안락해도 처음에 온몸으로 겪은 가난의 흔적을 지우기엔 역부족인 듯했다. 그것은 어디에서 올까? 직장에서 경험한 분노, 사회적으로 미천하게 간주되는 일, 소외, ‘이민자’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정리되지 않을까?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을 관통하는 주제는 소외와 갈등이었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이들의 갈등을 그려낸 것이 바로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이었으니까. 자녀들에게 같은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애썼지만 탈공업화는 가난과 원통함, 경멸을 되풀이하게끔 만들었다. 환경적인 요소의 극복이 간혹 일어나긴 했지만 그들을 향한 편견은 여전했다. 마치 새겨진 것처럼.

눈앞에는 폐허, 낙후된 것들, 몇 주가 지나도 놀랄 일 하나 안 생기는 권태, 뻔한 얼굴들을 품은 풍경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경제적 불황 속에서 10대를 보낸 청소년들이 자라 20대의 삶을 어떻게 맞이하는지를 그린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각자가 처한 환경에 따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는 모습, 그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와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든 가사들은 그 시절의 프랑스를 기억하는 모든 사람에게 추억을 되살리는 뜻 깊은 시간이리라 생각한다. 우리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소외에 대해 이야기하며 갈등을 그려내 공감을 사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2018 공쿠르상을 수상할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나의 청소년기, 나의 90년대를 떠올리며 읽으면 좋을 듯한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괜히 공쿠르상 수상작이 아니란 사실을 금세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