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세계를 견뎌야 하는 ‘나’

p10

하지만 나는 수잔나가 작품이 아니라 창작물로 여기는 그 시나리오 ㅡ (후략)​

뫼비우스의 띠 위를 걷는 내 자화상이 같고 얇은 띠를 중심으로 분리되는 세계를 떠나지도 못하고 계속 걷는 기분이 든다.

문을 열고 나갔는데, 방금 나간 방이 펼쳐지는 억울하고 일관된 순간의 반복. 답답한 세계. 나와 분리되는 사람들.

이 책의 이해 여부를 불문하고 나를 향해 솟아난 비늘들을 지나가도 극복할 수 없는 이 균형잡힌 반복.

p76

다시 돌아왔어, 내가 말했다.​

시나리오 작가인 ‘나’는 수잔나와 딸 에스더와 함께 에어비앤비로 빌린 별장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엘라와 야나가 주인공인 영화의 시나리오는 진척될 생각이 없는데 근처에 하나밖에 없는 상점의 주인은 합이 180도가 되지 않는 삼각자를 건네고 상점에서 마주친 여성은 ‘얼른 가라’며 알 수 없는 말을 한다.

급기야 수잔나와 작은 일로 부딪히더니 그녀는 갑자기 떠나고… 딸 에스더와 같이 별장을 떠나려 거실 문을 나서면 거실이 나타나고 뒷걸음으로 간신히 별장을 떠나 산기슭을 뚫자 별장으로 이어지는 괴이한 일이 일어난다.

돌아온 수잔나가 다시 세상의 입구를 열고 에스더를 데려가는 것은 일단의 희망이지만 ㅡ결국의 세계를 견뎌내야만 하는 유일한 괴로움이라는 게, 결코 꿰어 맞출 수 없다는 증명에 오늘도 내 작은 세계가 사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