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은 반복된다.

연령 7세 이상 | 출간일 2018년 6월 29일
수상/추천 뉴욕 타임스 외 1건

2006년 터키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오르한 파묵의 최신작이다. 민음 북클럽 회원을 대상으로 한 서평 프로그램인 ‘첫 번째 독자’ 이벤트에서 책을 제공받았다. 오르한 파묵의 하버드대 강연록 ‘소설과 소설가’를 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소설에 대한 철학을 떠올리면서 읽을수 있었다.

이 책은 어린 시절 작가를 꿈꾸던 이스탄불 출신의 성공한 건축 사업가 젬의 이야기다. 16세 무렵 반체제 성향의 아버지가 가정에 소홀했던 시절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우물파기 장인인 마흐무트의 조수로 이스탄불 근교인 왼괴렌에서 지내며 겪었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에게 소홀한 아버지 대신에 마흐무트를 제2의 아버지처럼 느끼며, 그 주변에서 만난 빨강 머리 여인을 먼 발치에서 보고 바로 사랑에 빠진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줬던 유랑극단 배우가 그녀의 아내인 걸 알면서도 동침을 하게된다.

나는 내 자리에서 꿈쩍 않고 얼굴을 위로 향한 채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위에 마흐무트 우스타가 보이면 이곳 땅 밑에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우스타가 양동이를 비우기 위해 가장자리로 물러나면 우물 입구에 동그랗고 아주 작은 하늘이 보였다. 너무나 멋진 파란색이었다! 거꾸로 본 망원경 끝에 있는 세상처럼 멀지만 아름다웠다. p.154

마을 근교의 언덕 위에 3주 가까이 지났지만 물은 나오지 않는다. 계속 우물파기를 고집하던 마흐무트의 강압에 혼자 남아 돕고 있던 젬은 우물 바닥의 마흐무트에게 흙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떨구는 실수를 하게 된다. 무사한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리 불러도 밑에서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젠은 도움을 청하러 마을로 내려 간다. 하지만 빨강 머리 여인과 유랑극단이 마을을 떠난 것을 알게 된 젠은 자신이 마흐무트를 죽인 걸로 누명을 쓸까 두려워 황급히 짐을 챙겨 이스탄불의 어머니에게로 도망친다.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숨기고 젬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작가가 되려던 꿈을 버린 그는 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해 성공한 건축 사업가가 된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리스의 소포클레스가 쓴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와  페르시아의 페르도우시가 쓴 ‘왕서’에 담긴 이야기 중에서 자신의 아들 쉬흐랍을 죽인 뤼스템의 이야기에 집착하며 살아간다. 결혼도 하고 성공한 사업가가 되었지만 그는 마흔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한다. 그러던 중 사업 확장을 위해 이스탄불에 편입되어 가기 시작한 그 동네의 땅을 사서 건축 사업을 하려고 한다. 자신의 회사 광고를 위해 직접 TV 광고에 출연한 후 자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젊은이의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30년 가까이 숨겨왔던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가끔 내 자신에게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고 되뇌기도 했다. 나는 마흐무트 우스타와 어린 시절의 죄를 특히 비행기 여행을 할 때 가장 많이 떠올렸다. 이따금 벵가지에, 아스타나에, 바쿠에 혹시 내가 마흐무트 우스타를 기억하기 위해 가는 것일까 진심으로 궁금해하곤 했다. 비행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볼 때 나는 그를 생각하며 아이가 없는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p.193

오르한 파묵은 특유의 몰입감을 동반한 이야기 전개로 그리 가볍지 않은 주제의 이야기를 빠른 전개로 풀어간다. 이스탄불 출신의 공대생이었다가 작가로 전향한 파묵과 작가를 꿈꾸다 사업가로 변신한 주인공 젬의 이야기가 묘한 대치를 보여준다. 또한 동양과 서양의 경계에 있는 터키에서 동서양의 상반된 아버지와 아들 간의 살해 이야기인 ‘오이디푸스 왕’과 ‘왕서’의  은유를 통해 비극은 반복되는 것인가 생각을 하게 한다.

우리는 강하고 결단력 있는 아버지가 우리에게 무엇은 하고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 말해 주기를 바란다. 왜 그럴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와 관련해 무엇이 도덕적이며 옳고 무엇이 죄악이며 그르다는 결정을 내리기 어렵기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확인해야 하기 때문일까? 우리는 항상 아버지를 필요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머릿속이 혼란스럽거나 우리 세계가 허물어졌을 때, 우리 영혼이 번민에 찼을 때만 아버지를 원하는 것일까? p.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