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노력해도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설명하려 하면 할수록 멀리 달아나 버리는 것들. 이를테면 쓸쓸한 실패 같은 것. 그러나 반드시 만나게 될 실패. 그래서 누군가는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닐까?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담아내려고. <호밀밭의 파수꾼> 같은 소설을 말이다.
열 여덟, 열 아홉쯤 되었을까? 키는 큰데 어디가 아픈 듯 몸이 좀 마른, 하얀데 생기가 없는 얼굴을 가진 한 소년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다. 동생의 머리 색과 같은 빨간색 모자를 깊게 눌러 쓴 소년은, 회전목마를 타고 있는 동생 피비를 바라보고 있다. 중앙에 있는 황금열쇠를 잡으면 회전목마를 계속 탈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소년은 피비에게 그것을 잡으라고 하지 않는다. 언제까지나 머물 수만은 없다는 것, 변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 타락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파도처럼, 실패가 자신을 만나러 올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설은 끝난다. 돌이킬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채로.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은 역사상 가장 독특한 캐릭터로 손꼽히는 ‘홀린 콜필드’를 탄생시킨 고전인 동시에,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세계문학 2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유명작이다(1위는 <오만과 편견>이라고 한다). 그 뿐 아니라 범죄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소설 1위이며, 또한 존 레논의 극성팬이 존 레논을 살해한 후, 경찰을 기다리며 천연덕스럽게 읽고 있던 소설이기도 하다. 한편 세계문학이 늘 그렇기 때문인지, 아니면 소설 속 홀린 콜필드가 청소년이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용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성장소설로도 곧 잘 읽히는 듯 하다.
소설은 학교에서 퇴학당해 갈 곳 없는 홀린 콜필드의 짧은 여정을 다룬다. 부모님의 걱정과 잔소리가 싫어 집으로도 갈 수 없고(첫 퇴학이 아니다), 학교는 혐오스러워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콜필드는 늦은 밤 무작정 바깥으로 나와 뉴욕행 기차를 탄다. 콜필드는 기차 옆좌석에 우연히 앉은 같은 반 친구 엄마를 시작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나눈다. 소설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다. 동생 피비를 만날 때까지 지지부진한 만남들이 계속될 뿐이다. 절정으로 치닫는 서사도, 긴장을 부르는 반전도 없다. 외롭고 혐오로 가득찬 홀린 콜필드가 있을 뿐이다. 소설은 홀린 콜필드로 가득하다. 충만한 것은 그의 혐오와 쓸쓸함, 그리고 실패다.
“오빠는 모든 일을 다 싫어하는 거지? … 그럼 뭘 좋아하는지 한 가지만 말해 봐 … 한 가지도 좋은 걸 생각해 낼 수 없는 거지?”(227)
늦은 밤 부모님 몰래 찾아간 동생 피비가 따지듯 콜필드에게 묻는다. 콜필드는 더듬거릴 뿐 답하지 못한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이 혐오스럽다. 변하기 때문이다. 순수한 상태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는 곧 타락이다. 글을 쓰던 형은 영화를 위해 헐리우드로 갔고, 덩치 큰 룸메이트는 아직 학생인 주제에 섹스 말고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다. 어릴적 친구 제인에게는 그녀가 변했을까 두려워 연락조차 하지 못한다. 어른이 되어 변했을 그녀를 만나는 것이 두렵다. 어린 아이가 타락해 어른이 된다. 어른은 곧 타락의 결과다. 초등학교 벽에 낙서된 ‘이런 씹할’은 곧 어른의 세계다.
콜필드는 ‘이런 씹할’의 세계로부터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 마치 열 살에 죽은 동생 앨리가 더 자라지 않듯, 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지켜야 하고, 잡아야 할 무엇이다. 이제는 죽은 앨리의 나이가 된 피비를 지켜야 한다. 피비로 대표되는 세계가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야 한다.
“너, ‘호밀밭을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는다면(meat)’이라는 노래 알지? 내가 되고 싶은 건…”, “그 노래는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와 만난다면(meet)’이야” …. 피비가 옳았다.(229)
결국 홀린 콜필드는 잡을(meat) 수 없다는 진실과 마주한다. 그는 곧 만나게(meet) 될 것이다. 그는 떨어지는 아이들을 지키는 파수꾼(catcher)이 되고 싶지만, 결국 떨어지게 될 것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변하지 않는 세계라 믿었던 박물관을 비웃는 듯한, 벽에 가득한 ‘이런 씹할’ 낙서를 모두 지울 수는 없다. 실패다. 만나야만 하는 실패. 거대하고 쓸쓸한 실패.
소설은 이렇게 끝이 난다. 소설은 교훈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꼬여버린 매듭을 풀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회전목마 앞에 선 콜필드를 보여줄 뿐이다. 발버둥 치지만, ‘해결할 수 없다’는 진실을 마주한 콜필드를 보여줄 뿐이다.
이 이야기를 단순한 성장소설로 읽을 수 있을까? 철 없던 사춘기 소년이 어른이 되는 것을 깨닫는 이야기로 읽어도 괜찮은걸까? 글쎄. <호밀밭의 파수꾼>은 완벽한 실패를 보여주는 처연한 이야기가 아닐까? 우리가 못본체 하고, 당연한 것으로 치부해 버린 완벽한 실패 앞에 우리를 세우는 이야기가 아닐까. 이제라도 우리는 주인공 콜필드를 만나야 하고, 그를 지나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들의 실패는 완벽하고 전면적이다. 당신이 바라보는 실패는 당신의 실패이며 실패를 모면한 당신은 실패속으로 피신한 당신이다. 오늘 배고프지 않은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과 당신의 자식들과 당신을 잡아먹은 당신이며 오늘 왕이 된 당신은 당신의 애비를 죽이고 당신의 어미와 잠자리를 같이 한 당신이다. 당신이 성공이라 부르는 것은 실패로 가린 실패일 뿐이다. 실패의 찰나지망을 벗어난 삶은 없다.” <황현산, 실패의 성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