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해빠진 이야기

밤 늦게 깜깜한 길을 걷다 보면, 힐끔 뒤(나)를 돌아보면서 걸음을 재촉하는 여성들이 있었다.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무섭겠다’는 생각보다는 범죄자 취급 받는 것 같아 싫은 감정이 앞섰다. 그때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걸음을 재촉해서 가능한 빨리 그(녀)를 지나가는 일이었다. 의심받기 싫어서기도 했지만, 일종의 소심한 항변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그땐 그게 중요한 게 아니란 걸 몰랐다. 그(녀)가 얼마나 두려웠을지, 늦은 밤 어두운 길을 얼마나 긴장하며 걸었을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난 그랬던 적도, 그럴 필요도 없었으니까.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하는 세상이 있”었다는 뜻이다.(170) 지금은 그 세상을 알게 되었을까?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의 주인공이라기고 하기에는 너무나 평범한 한 여성의 삶을 그린다. 책 제목의 절반인 ‘김지영’은, 소설이 얼마나 흔한 이야기를 들려줄 지를 짐작하게 한다. 실제로 ‘김지영’이라는 이름은 82년에 태어난 여아 중 가장 많은 이름이라고 한다. 마음 먹고 평범한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거다. ‘김지영’으로 살아가는 흔한 여성들의 삶을 말해보겠다는 것이다. 흔하디 흔한 김지영들 안에 얼마나 뼈가 시린 이야기들이 숨었는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소설은 소위 감정적이거나 감상적으로 주제에 접근하지 않는다. 작가는 담담한 필체로, 그러나 작심한 듯 숫자를 들이민다. 소설에는 논문에나 어울릴 듯한 각주가 군데 군데 나온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김지영씨가 태어났던 1982년에는 여아 100명당 106.8명의 남아가 태어났는데, 남아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1990년에는 116.5명이 되었다.(<인구 동태 건수 및 추이>, 통계청)”(53)

“김지영씨가 졸업하던 2005년, 한 취업 종보 사이트에서 100여 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채용 비율은 29.6퍼센트였다. 겨우 그 수치를 두고도 여풍이 거세다고들 했다.(<키워드로 본 2005 취업 시장>, 동아일보, 2005. 12. 14)”(72)

작가 조남주는 한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여성의 삶을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남기고 싶었다’고 했다. 누가 무엇을 왜곡하는 걸까? 소설이 내미는 숫자는 ‘지나치게 감정적이다’라거나, ‘그래도 많이 나아지지 않았냐’ 라고 현실을 왜곡하는 입들을 닫게 한다. 피해의식이라느니, ‘한쪽으로 치우쳤다’느니 말하는 혀를 꽁꽁 묶는다.

그렇다고 해서 <82년생, 김지영>이 숫자나 사실적 진술만을 늘어놓는 것은 아니다. 소설은 이야기를 놓치지 않는다. 소설은 김지영의 삶을 그(녀)가 태어난 1980년대부터 2016년 오늘날까지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다루는 단순한 서술 방식을 취한다. 하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진부하지 않다. 작가는 김지영의 삶 안에서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주요한 이슈들을, 여남을 불문하고 모두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글쓰기로 하나 둘 풀어 놓는다.

“나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보러 가는 거 같아서 태워 준 거야.” ‘태워 준다고? 김지영씨는 순간 택시비를 안받겠다는 뜻인 줄 알았다가 뒤늦게야 제대로 이해했다. 영업 중인 빈 택시를 잡아 돈 내고 타면서 고마워하기라도 하라는 건가.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100p)

소설은 너무나 흔해서 깨닫지 못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모두의 이야기지만 누구나가 알지는 못하는 세계, 너무나 평범해서 모두가 관여하고 있는, 그래서 더 심란한 세계를 보여준다. 좋다는 감정을 괴롭힘으로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 세계, 고무줄을 끊고 치마를 들추는 것이 남성들의 놀이로 인정받는 세계, 늦은 밤 여성의 뒤를 좇는 이유로 ‘좋아서’라고 답하는 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세계, 몰카에 찍힌 사람이 자신의 앞날을 위해 입을 다무는 게 더 현명한 세계, 당사자의 몸과 삶에 들이닥칠 변화는 충분히 고려되지 않은 채, 출산과 모성애가 당연한 것인냥 요구되는 세계 말이다.

82년에는 그렇다치자, 그렇다면 20년이 훌쩍 지난 오늘은 조금 나아졌을까? 김지영은 이렇게 말한다.

“이제 여자니까 공부를 못하거나 덜 배워도 된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없는 듯했다. 여자도 똑같이 교복 입고, 가방 메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당연해진 지 오래고, 여자아이들도 남자아이들과 다름없이 적성을 고민하고, 직업인으로서의 미래를 계획하고, 그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했다. 오히려 여자라고 못할 것이 없다는 사회적 지지와 응원의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였다. 김은영 씨가 스무 살이던 2001년에는 여성부가 출범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면 ‘여자’라는 꼬리표가 슬그머니 튀어나와 시선을 가리고, 뻗은 손을 붙잡고, 발걸음을 돌려놓았다. 그래서 더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다.”(72)

그래서 김지영은 입을 닫는다.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문제를 만들기 싫어서, 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들어 먹지를 않아서 말을 삼킨다. 그것 역시 흔한 일이다. 또 다른 김지영이 입을 열어 말하면 누군가는 비난한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97)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순간 순간 김지영을 대변하는 또 다른 김지영들이 있다. 선생님의 부당한 판단에 손을 들고 따져 묻는 김지영이 있고, 바바리맨을 경찰에 잡아 넘기고, 당당히 욕지거리를 뱉어내는 김지영이 있다. 남편 눈에는 귀신에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분열이라도 온 것처럼 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김지영이 뱉어내는 죽은 선배의 말과 엄마의 쓴소리는, 말할 수 없는 김지영을 대신하는 다른 김지영들의 목소리며, 동시에 김지영들의 연대인 것이다.

끝으로, 여기에 남성은 없다. 김지영은 설득하지도, 도움을 구하지도 않는다. 남성은 그(녀)들을 공감하거나 돕지 못한다. 필요한 게 있다면 도움이 아니라 가해를 멈추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이 나아졌다는 말에 김지영이 공감하지 못하듯 남성들은 더 나아진 세계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쥔 권력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를 알게 되면 달라질까? 김지영과의 상담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던 정신과 의사는, 오랜 시간 함께 일하던 간호사가 임신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병원에 손해를 끼치자, 앞으로는 미혼을 구해야겠다고 결심한다.(175) 소설은 그렇게 끝난다. 공감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삶과 겹하지 않으므로 언제든 손바닥을 뒤집을 수 있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에 황망하고 심란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소설이 답해야 할 이유는 없다. 해결책을 찾는 것은 자신이어야 한다. ‘무엇을 어떻게 도우면 되느냐?’는 식의 태도를 멈추고, 듣고 배워야 한다. 그리고 멈춰야 한다. 멈추는 게 낫다. 멈춘 자리에 생기는 여백을, 혐오와 차별 아닌 언어로 다시 채우는 일은 남성 자신의 몫이다. 그것을 깨닫지 않는 한 세계는 나아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양쪽 모두에게 충분히 작용한다. 여성에게는 뼈 아프고 쓰린 위로를, 남성에게는 부끄럽고 황망한 배움을 준다. 기꺼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