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끝 한쪽에서 잠든 그들이 꾸는 지독한 꿈일지도

장은진
출간일 2016년 11월 25일

날짜 없음 ㅡ 장은진

 

크리스마스가 생기고 이브 날을 기쁘게 기다리며 맞던 ,  많고 많은 날들에서 눈이 오던 날은 과연 몇 번이나 되며 안 와서 섭섭했던 날들은 얼마나 될까 . 전세계 연인들이 기다리고 들떠하던 그 크리스마스 이브에 내리지 않은 눈을 이 회색 도시에 몽땅 쏟아 붓는 건 아닌지 , 너무 오래 기다려서 , 너무 많이 기대 했던 날들이 , 너무 미룬 행복이 층층이 쌓여서는 이 도시를 무겁게 무겁게 덮는 것은 아닐까 .

 

차례차례 떠나는 이들 , 179 부터 0 까지 . 앞에서 읽다 책 장에 매겨진 숫자가 역순임을 깨닫고 맨 뒷 쪽으로 간다 . 어느 시인의 말처럼 뒷걸음으로 , 내 발자국을 보듯 작가의 글을 꺼꾸로 읽어나온다 . 어마무시 하게 쌓인 눈 속의 세상에선 차례차례 떠나는 이들이 있다 .

 

두 사람이 눈을 감기 전 그들과 한 몸 같던 늙은 개 반 (半) 이 떠나고 , 그의 옛 연인이었던 연희가 그림자없이 다녀가고 , 모두와 떠났던 진수라는 청년이 유일하게 돌아온 사람이었지만 , 도착과 함께 저 세상으로 떠나간다 . 기타를 안고 . 젖은 한 숨같은 희미한 그림자를 보내는 시간이 된다 . 소식 없어 걱정하던 폐지 줍는 홍여사가 , 또 싸가지라 부르지만 싫지 않은 맹랑함을 매력인듯 장착한 유나가 , 돌연하게 먼저 간 백구두 김씨와 홍여사를 두고 티격태격하던 박 영감이 미리 부고를 전하러 왔다가고 ,  이웃 가게인 또와분식 아주머니가 불안을 숨긴 채 다녀가고 ,  도시의 악몽으로 부자가 되었다던 졸부 상원이 다녀간다 .  무지개색 우산을 선물처럼 ,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놔두고 회색 눈 속을 간다 . 길을 나섰다가 떨어진 신발에 이 좁고 긴 컨테이너 박스에 들러서 낡은 구두를 고쳐신고 떠나는 회색 인도 있다 . 그렇게 모두가 떠나고 ” 그게 ” 온다 . 온다고 한다 . 눈이 오듯 그게 온다고 …

 

글 속에서 음울하게 ” 그게 ” 점점 다가오는 동안 , 나는 어쩌면 , 어쩌면을 적어내려 간다 . 이 거대한 눈의 재앙이 어쩌면 , 이 엄청난 쏟아짐은 어쩌면 ,  하면서  눈 밭에 찍힌 발자국처럼 책의 맨 앞으로 온다 . 이 세계를 그 붉은 비와 붉은 눈과 회색 눈과 숯 눈으로 반영했구나 생각한다 . 그렇게 차곡차곡 언젠가 어떤 미래인이 읽을 지금이란 지점을 책갈피처럼 끼워두는 걸까  생각한다 . 어쩌면 숫자가 역순이니까 이 모든 일은 그저 세상 끝 한쪽에서 잠든 그들이 꾸는 지독한 꿈일지도 . 어쩌면 , 어쩌면 하고 말이다 .

 

낮과 밤이 사라진 현대의 도시를 , 잠을 미뤄서라도 현재가 아닌 내일을 살 것처럼 살아왔던 우리들에게 발전된 문명의 이기로 계절이 사라진 세계에 대해 , 잠을 잊은 사람들에 대해 잊은 것은 잃은 것은 없냐는 듯 .  그 모두에게 내려지는 벌과 같이 . 너무 열심히 빨리빨리 생을 사느라 , 스스로 명을 단축하면서도 모르고 살던 이들에게 한꺼번에 밀린 이자처럼 몰아쳐 오는 죽음같은 잠과 이불같은 눈의 세계가 아닐까 하고 .

 

어쩌면 회색 시(市) 는 움직이는 회색 인 행렬이나 멈춰선 채 그날 그게 오기 만을  기다리는 무리들보다 암울한 세상을  그저 암울해 할 뿐인 회색주의자들을 그린 건지도 모른다 .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 세상을 얼른 스쳐지나 보내는 이들은 평범한 소시민이던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것인지도 …그런 지도 .

 

신경이 마비된 도시는 유능한 기능들을 하나씩 잃거나 빼앗겼다 . 도시는 한때 재밌게 잘 갖고 놀다가 시시해졌다며 미련 없이 내다 버린 거대한 완구와 다를바 없었다 . 사람들은 예외없이 서로의 안부를 묻거나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조차 잊었다 . …도시는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인의 마을처럼 , 문명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멈추거나 닫히거나 거부되었다 . ( 본문 9 쪽 , 176″ )

 

코맥 매카시나 스티븐 킹이 그리던 세상 속에나 인류에 닥친 거대한 재앙과 길을 나서서 무작정 행렬을 이루는 이야기가 있는 줄 알았더니 ,  이 작가 참으로 조용조용한 걸음을 그리면서 그 걸음이 자못 무섭다 . 있는 세계 그대로를 세기말의 장르물로 만들어 버리다니 … 곱씹어 봐도 멋진 이야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