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를 기점으로 봇물처럼 터져 나오던 여성 소설가와 여성문학이 21세기를 맞이하여 오히려 주춤하고 있는 시점에, 여성 평론가 김미현은 평론집 <여성문학을 넘어서>를 민음사에서 출간했다. 이 책에서는 여성문학의 역사와 가치를 되짚어 보면서 앞으로의 여성문학이 여성문학을 넘어서 진정한 문학으로 거듭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
여성문학이 이 땅에 자리 잡은 지는 오래이지만, 그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는 폄하되거나 과장되기를 반복하는 가운데 올바르게 자리 매김 되지 못했다. 저자 김미현은 여성문학이 지금까지 이룬 성과들을 냉정하게 평가한 후, 그 한계를 보완하는 ‘성찰적 페미니즘’의 입장을 견지한다. 성찰적 페미니즘은, 긴 문학사의 궤적에서 여성문학이 차지하는 위치와 그 업적이 저조한 이유를 단순히 여성에 대한 억압이라는 외부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로만 치부해 버리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시각에서 출발한다. 그런 문제보다는 오히려 여성문학 내에서 발생하는 내부적인 문제가 더 클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문학사에서도 21세기를 맞이하여 오히려 정체 상태를 맞고 있는 여성문학의 문제가 오히려 여성문학 자체의 허물은 아닌지 숙고해 보자는 자세이다. 즉 보다 철저한 부정과 거부를 통해 여성문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자세를 다시 생각해 보는 자세가 바로 성찰적 페미니즘의 정신이다. 이를 위해 『여성문학을 넘어서』에서는 그녀들만의 역사(Herstory)에 눈을 뜬 여성들이 자신들의 정체성(Gender)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Reality)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고유성(Power)을 획득할 수 있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이 책은 크게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여성문학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고, 여성문학을 크게 3기로 구분한다. 제1기는 1920~1930년대, 제2기는 1950~1960년대, 제3기는 1980~1990년대이다. 각 시기를 거치면서 남성 평론가들에게 가장 많이 논의되었거나 논쟁적이었던 여성 작가나 여성 소설을 통해 20세기 한국 문학 속의 젠더를 재고해 본다. 제1기에는 여성문학이 문학사에 편입되기 시작한 시점으로, 여성다울 수도 없고 남성다울 수도 없었던 혼돈의 시기였다면, 제2기는 김승옥, 최인훈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문학에 비해 침체되고, 체념적인 문학으로 빠져 들던 시기였다. 오히려 서구 문명과 개화사상의 세례를 받았던 선배 작가들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지배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이었다. 제3기에 대표적인 작가였던 박완서의 경우에는 여성의 문제를 부각시키기 위해 남성 인물에 대한 왜곡과 단순화의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음을 지적하면서 이 시기의 여성문학에 대한 남성 평론가들의 무관심과 편견을 지적한다.
이렇게 20세기를 통과하면서 여성은 여성이면서도 여성이기를 ‘거부’해야 했고(제1기의 박화성), 여성이기를 ‘주저’해야 했으며(제2기의 강신재), 또 이후에는 여성이기를 ‘주장’해야 했다(제3기의 박완서). 이 때문에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문학에 대한 시각은 여성문학의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학(남성문학)과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에 따라 그 질이 평가되는 경향이 짙었다.
이어지는 2부에서는 여성의 성적 정체성 즉 젠더의 문제를 탐구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을 신화에 초점을 맞춰 주목하면서, 여성문학의 제2기에 해당하는 강신재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제1기의 여성문학을 계승하면서도 이후의 여성문학에 대한 지향점과 과제를 남기는 작품인 강신재의 소설들은 감각적인 인식을 통한 서정성의 확보라는 여성성의 획득을 특징으로 한다. 3부에서는 제1기의 강경애와 제3기 이후의 차현숙, 배수아 등의 작가들을 통해 여성문학이 현실과 어떻게 관계 지어지는지에 주목한다. 4부에서는 현실과 관계를 맺은 여성문학이 어떻게 그 힘을 획득하는가에 주목하는데, 제1기에 해당하는 김발봉의 연애 소설과 제3기에 해당하는 이혜경에 주목한다. 특히 이혜경은 더 이상 여성이 남성과의 차별을 통해 여성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여성과 남성이 인간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방식과 현실에 방점을 찍는 작가이다. 이혜경은 여성의 문제를 단순히 가부장제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확대시켜 파악하려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여성적인 주제를 통해 인간 보편의 문제에 도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작가이다. 김미현은 이를 ‘에코 페미니즘(Eco-Feminism)’의 시각으로 정리한다. 에코 페미니즘은 생태학과 페미니즘을 결합시켜 현대 문명이나 기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여성의 입장을 연결시킨 흐름으로 문학 생태학에서 파생된 개념인데 기존의 자연/분화의 이분법에 여성/남성의 이분법을 대응시키면서 지금까지의 자연에 대한 억압이나 혐오에는 여성에 대한 폄하나 무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이렇게 『여성문학을 넘어서』의 저자 김미현은 여성문학이 20세기 들어 상승과 하강, 발전과 퇴보의 역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자기 나름의 정체성을 탐구하면서 여성문학만의 고유한 위치를 공고히 해왔다고 정리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주류와 거대 담론의 흐름에 대한 반동으로 파생된 여러 가지 사조들 가운데 페미니즘은 비단 문학뿐 아니라 문화 전반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음을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이론과 사조로서의 페미니즘이 평론계와 학계에서 붐을 일으켰던 것에 비해 실제 문학 현장의 여성문학에 대한 고찰은 산발적이고 미시적으로만 진행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20세기가 남긴 유산과 다양한 탐색의 결과물을 안고 여성문학이 21세기를 맞아 진정성을 회복하고 그 나아갈 바를 정확히 재고한다는 점만으로도 『여성문학을 넘어서』의 가치는 충분하다. 더불어 『여성문학을 넘어서』는 여성의, 여성을 위한, 여성에 의한 문학의 궁극적인 지향점과 여성을 넘어선 ‘인간’과 ‘가족’의 의미까지 포함하는 문학으로의 재도약을 꿈꾸는 우리 시대 여성문학에 대한 도전적인 제언들을 담고 있다. 저자 김미현이 꿈꾸는 여성문학의 모습은 다음의 말에 잘 표백되어 있다.
진정한 여성문학은 여성만이 아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성도 아프다고, 그런데 좀 다르게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 여성문학이다. 무엇보다도 이 지구상에서 여성과 가장 닮은 존재가 바로 남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여성문학이다. 애정이나 희망 없이 욕하는 것은 비판이 아니라 모함이다. 그러니 지금보다 더 나은 (여성)문학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건강한 분노나 정당한 미움일 것이다. 혹은 더 이상 아프지 않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여성을 둘러싼 사회 자체도 더 이상 여성을 ‘결함 있는 남성’으로 보지 않아야 이러한 여성문학의 움직임들을 제대로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책머리에」 중에서)
김미현은 「한국근대여성소설의 페미니스트 시학」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만큼 한국문학사에서 여성문학이 차지하는 역사와 가치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해온 소장학자이다. 1990년대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했던 여성 평론가들이 근시안적인 구호성 평론에 매달리다가 일거에 자취를 감추거나 새로운 정체성의 모색에 실패했던 데에 비해, 김미현은 기존에 자신이 내놓은 평론 작업에 대한 부정과 거부를 반복하면서 변증법적인 발전 방향을 모색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단지 페미니즘이라는 이름만으로 만병을 다스리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여성문학을 넘어서 인간을, 자연을 담아내는 문학과 평론의 스펙트럼이 필요한 시대이다.
저자 김미현1965년 서울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에서 「한국근대여성소설의 페미니스트 시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이다. 199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후 평론 활동을 해오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여성소설과 페미니즘』(1996), 『판도라 상자 속의 문학』(2001) 등이 있다.
책머리에
1부 Herstory 이브의 역사이브, 잔치는 끝났다주변에서 쓰기, 중심에서 읽기신화, 여성을 위한 신화
2부 Gender 여성과 여/성인어공주와 아마조네스, 그 사이다시 쓰는 소설, 덧칠하는 언어서정성, 감각성, 여성성
3부 Reality 현실 속의 현실가족, 천국보다 낯선 가족존재론적 변신과 초월의 수사학계급 속의 여성, 현실 속의 이상
4부 Power 차별에서 차이로여성 연애 소설의 (무)의식태초에 어머니가 있었다우먼토피아, 테크노피아 속의 에코토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