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슈퍼 옆 환상가게

강은교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24년 7월 19일 | ISBN 978-89-374-0943-1

패키지 양장 · 변형판 124x210 · 120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허무의 공동체에 구전되는 사랑의 시학

『풀잎』과 『허무집』의 시인 강은교 신작 시집

편집자 리뷰

강은교 신작 시집 『미래슈퍼 옆 환상가게』가 민음의 시로 출간되었다. 강은교의 시를 읽고 있노라면 생의 말년을 가리키는 말로 노년기 대신 ‘노을기’라는 말을 쓰고 싶어진다. 생의 노을이 지는 시간, “강물 위로 서서히 가라앉”는 해처럼 가만히 낮아지는 시간, “검은 몸부림”을 뒤에 남기고 사라지는, 그러면서 또 살아지는 시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노을기에 이르러 황혼의 조명 아래 환히 드러나는 일상의 사소한 풍경, 그 가볍고도 무거운 생의 진경을 담아낸다.

 

『풀잎』 , 『허무집』 등의 시집을 통해 허무의 심연과 윤회적 가치관을 노래한 시인이 근래 천착해 온 테마는 ‘당고마기고모’다. ‘당고마기’는 ‘바리공주’와 더불어 한국의 대표적인 무속 신화다. 당고마기 서사의 핵심에는 잉태와 출산이 있다. 잉태하고 출산하는 과정에서 수난을 겪은 여성이 신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한 신화 등 다양한 서사들이 당고마기를 중심으로 전승된다. 앞선 시집의 연장선상에서 이번 시집에도 당고마기고모가 등장한다. 신화적 인물에 더해 혈연 기반의 호칭이 더해져 ‘당고마기고모’는 유장하고 장대한 시간 속에서 개인의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강은교만의 거리가 된다.

 

당고마기고모에게서 계승된 우리의 고통, 우리의 고통으로 연장된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교차하는 곳에는 ‘깨진 아름다움’이 있다. 젊은 날의 아름다움과는 달리 노을기의 아름다움은 미래도, 환상도, 다 깨진 뒤에 알게 되는 누추한 아름다움이다. 그 아름다움에는 서글픈 가운데 결코 불행해지지 않는 대범하고도 담대한 사랑의 미학이 있다.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드넒은 여기 사랑하올 것들” 모두가 손안에 부서진 채 반짝일 때, 강은교의 언어는 깊은 허무의 공동체에 구전되는 사랑의 언어가 된다.

■ 하늘색 가위

객관적 상관물을 찾는 것은 문학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백석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등장하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나 이청준 단편소설 「눈길」에 등장하는 치자나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객관적 상관물이다. 독자들은 갈매나무나 치자나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정서와 생각에 다가갈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객관적 상관물이라면 단연 ‘하늘색 가위’다. 시 「하늘색 가위」 에 등장하는 이 사물은 작중 화자가 잃어버린 물건이자 화자의 당고마기고모가 애지중지 하던 물건이다. 시는 화자가 잃어버린 가위를 찾으러 집안 여기저기,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던 중 하늘색 가위를 찾는 것인지 그 가위를 아끼던 당고마기고모를 찾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광활해진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이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의 차원으로 비상할 때, 일평생 교차하며 노동한 가위질과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어딜 헤매고” 있을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겹쳐진다. 하늘색 가위의 가위질은 당고마기고모의 고단한 걸음걸음과 닮았다.

 

■ 필립스 다리미

그리고 다리미가 있다. 「필립스 다리미」에서 다림질하는 일상적 순간은 어느새 바다 위에 배가 떠가고 파도가 이는 비일상적 풍경으로 바뀐다. 손에 쥐고 다림질하는 다리미는 바다 위를 떠가는 배가 되고, 다리미가 뿜어내는 스팀은 파도치며 일어나는 거품이 된다.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마다 펴지는 옷감들의 주름. 주름의 파도를 옷감들이 줍는다. 이제 다림질하는 평범한 순간들은 다만 옷에 남겨진 주름을 펴는 것이 아니라 옷에 새겨진 시간을 펴는 행위가 된다. 시간을 편다는 것은 흠결 없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옷감 위를 다리미가 지나갈 때 펴지는 것은 린넨이나 실크의 주름이지만 그 실체는 시간의 주름 속에 감춰진 기억들이다.

 

■ 시의 늪을 벗어나

책의 시작을 알리는 첫 페이지에는 시인이 쓴 서문, 즉 자서가 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강은교 시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쓴다. “시여, 달아나라, 시여, 떠나라, 시의 늪들을./ 그때 시는 비로소 일어서리니.” 시에 대한 결심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결심이라고 해도 오독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여, 달아나라, 떠나라, 인생의 늪들을. 그때 인생은 비로소 일어서리니. 일평생 시로 살아온 시인이 시에 대해 하는 단 한마디 말은 시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미래와 환상으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그때 비로소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인생이 우리를 향해 돌아볼 것이니.

■추천의 말

강은교 식으로 말하면 삶은 깨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달콤하리라는 환상, 괜찮아질 거라는 환상, 한 번 더 살면 이렇게는 안 살 거라는 환상… 환상과 미래는 붙잡으려 할 수록 더 멀어진다. 손바닥을 펴 보면 그 위에는 깨진 환상, 깨진 미래, 깨진 낭만이 부서져 반짝일 뿐. 속절없는 파편의 무리들, 그러나 깨진 반짝임이야말로 “드넓은 여기 사랑하올 것들”이자 “우리들의 누추한 아름다움”인 줄 알 때, 이제 쓸쓸함을 아는 이, 이제 홀로임을 아는 이, 이제 울음을 아는 이, 그리하여 이제 늙음을 아는 이 강은교는 바야흐로 용서를 노래해도 섭섭지 않은 시인 중의 ‘시인’이다. ‘시인’은 전생의 허밍처럼 아득하게, 어젯밤 꿈결처럼 생생하게 서러움의 내력을 연주한다. “기-인” 바람결이 찬란하게 쓸쓸한 생의 노래를 거든다. 바람이 거든 노래가 돌멩이들의 막막한 웅크림을 쓰다듬고 우주의 흉터 같은 별들을 스치울 때, 멀리서 반짝이는 우리 “기-인” 상처가 아름다움을 시작한다.

-박혜진(문학평론가)

 

■ 본문 중에서

 

“고모, 노을이질 때가 됐어요” 나는 이층 계단에 올라 서서 외쳤어. 그리고 마구 뛰어 올라갔어. 구석에 있던 의자를 번쩍 들고,

고모가 느릿느릿 걸어오셨어. 고모는 의자에 풀썩 앉으셨어. 마치 싫은 자리에라도 억지로 앉는 듯이, “고모, 고모,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니, 노을을 보려니 내가 사라지는 것 같애” 고모의 비스듬한 웃음, 나는 고개를 숙였어. 나도 사라지는 것 같았기 때문이야. 우리는 나란히 해를 바라보기 시작했어.

-「노을이 질 때」에서

 

**

 

“환상깨기” 첫줄을 읽는다. ‘우리는 너무 환상에 빠져 있다.’ 그렇게 시작되는 그 책,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책장을 넘겨 본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끄덕이며 우선 커피의 환상부터 깬다, 목마름을 축여 주리라는 그 환상, 달콤하리라는 그 환상, 그 환상, 깬다,

홀 한구석 유난히 어두워 보이는 한 켠에 노트북을 켜는 청년이 보인다, 읽던 페이지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환상을 깨게, 그 책의 저자를 넘어서리라는 생각을, 한 명제 뒤엔 늘 다른 명제가 나타나지, 저자만이 아는 명제가,

-「환상가게」에서

 

**

 

나는 하늘색 가위의 인상착의를 말해 주었지만,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짧은 바지를 입었으며 손에는 주머니를 들고 있음…… 뭐 그렇게 설명하곤 했지,

 

오, 나의 하늘색 가위, 당고마기고모가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던 하늘색 가위, 지금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어딜 헤매고 있나, 아니, 어디선가 그 넓은 양팔을 벌려 흙이라든가, 그 무슨 꽃가지를 안고 있나

-「하늘색 가위」에서

 

**

 

배 같은 필립스 다리미

바다를 가네

 

파도처럼

스팀을 내뿜네

 

실크들이, 린넨들이

파도를 줍네

 

방 안 가득 돛들이 춤춰

풀먹인 옥양목 목소리 펄럭펄럭 춤춰

-「필립스 다리미」에서

 

**

 

다시 살아도 이렇게 살게 될 거야

스무 살에 연애를 하고

둬번쯤 긴 키스를 꿈꾸다가

사소한지 모르는 결혼을 하고

사소한지 모르는 이별을 하고

헐떡헐떡 뛰어가 버스를 타고

잠시 숨을 멈추는 동안

사소하고 사소하게 정찰표를 들여다보네

하루에도 몇 번씩 엘리베이터로 승천을 하고

에스컬레이터로 세상을 굽어 보며

내가 종족의 한 명임을 짐작하네

문득 별이 가까이 오는 저녁이면

뉴스를 보며 내가 그 여러 통계의 하나임을 실감하고

사소하고 사소하게 잠드네

-「인생」에서

 

목차

자서(自序)

1부 운조의, 현(絃)을 위한 파르티타

내가 팔을 뻗치면 13

꽃을 끌고 14

용서 15

붉은 달빛 16

저 하늘의 피리소리가 17

너를 잃으니 18

교목(喬木) 19

부활 20

가야금 21

자갈길 22

애란 잔디 23

가장 기-인 소리 24

무수한 내가 25

선물 26

너의 길 28

저녁 식탁 29

벽 30

붕대 31

아무데도 32

사랑하는 사람은 33

계단 34

그 작은 주점 35

 

2부 당고마기고모의 여행노래

당고마기고모의 굽 낮은 구두 39

하늘색 가위 42

환상가게 44

샛골목 안 우체국 48

당고마기고모는 살짝 절름거리네 50

당고마기고모의 흉터 53

고모의 자줏빛, 낡은 가방 54

찻집, ‘1968년 가을’ 56

초록빛 식탁 59

당고마기고모네 싱크대 62

짜다 만 붉은 털실 64

당고마기고모네 창 밑 67

이옥봉의 집 68

너무너무 안락한 의자 71

슈퍼마켓을 나오는 고모 74

빗속에 혼자 앉아 있는 당고마기고모 76

고모의 기도서 78

오래전에 쓴 시: 비마(飛馬) 80

고모의 골목 81

노을이 질 때 82

필립스 다리미 84

 

3부 내것이 아닌 나의

‘아니고’ 들에서 돌아오는 밤 89

인생 91

키 큰 금목서가 내게 말했네 93

어떤 전시장에서 94

봄·산길 96

앵두나무 가지를 부러뜨리다 97

검은 창들_ _ _ 구형왕릉에서 98

시집값 100

거대한 오후 101

내것이 아닌 나의 102

TV를 들여다보네 104

만두 106

나는 결국 DMZ에 가지 않았다 108

새가 난다-어느 시인에게 바침 110

양배추, 그리고 113

그 아이의 방 114

작가 소개

강은교

1945년 12월 13일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 백일 만에 서울로 이주. 1964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졸업. 1967년 연세대학교 재학시 연세문화상 문학상 수상. 1968년 연세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 졸업. 9월 월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 외 2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1970년 사단법인 「샘터」사에 입사, 동년 김형영, 정희성 등과 「칠십년대」 동인지 활동. 1971년 첫 시집 「허무집」(칠십년대 동인회) 출간. 1974년 시선집 「풀잎」(민음사) 출간. 1975년 산문집 「그물 사이로」(지식산업사), 「추억제」(민음사), 역서 「예언자」(K. Gibran, 문예출판사) 출간. 제2회 「한국문학 작가상」 시부문 수상. 1976년 역서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E. Dickinson 시선, 민음사) 출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 1977년 시집 「빈자일기(貧者日記)」(민음사), 산문집 「도시의 아이들」(진문출판사) 등 출간. 1978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1년 연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입학. 1982년 시집 「소리집」(창작과비평사) 출간. 1983년 동아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에 교수로 임용, 삶의 터전을 부산으로 옮김. 인도 등 잠시 여행.

1984년 시선집 「붉은 강」(풀빛), 산문집 「누가 풀잎으로 다시 눈뜨랴」(문학세계) 출간. 1985년 산문집 「어두우니 별뜨는 하늘이 있네」(영언문화사) 출간.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986년 시선집 「우리가 물이 되어」(문학사상) 출간. 1987년 시집 「바람노래」(문학사상) 출간. 1988년 문학선 「순례자의 꿈」(나남사), 시화집 「어떤 미루나무의 꿈」(영언문화사) 출간. 학위 취득. 1989년 시집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실천문학사), 비평연구집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공저, 세계사) 출간. 1990년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부교수. 1991년 시선집-한국대표시인100인선 「그대는 깊디깊은강」(미래사) 출간. 1992년 시집 「벽 속의 편지」(창작과비평사) 출간. 제37회 「현대문학상」 시부문 수상. 1993년 산문집 「잠들면서 참으로 잠들지 못하면서」(한양출판사) 출간. 1994년 동화집 「하늘이와 거위」(삼성출판사) 출간. 1995년 동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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