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원제 Autumn

앨리 스미스 | 옮김 김재성

출판사 민음사 | 발행일 2019년 3월 22일 | ISBN 978-89-374-3978-0

패키지 양장 · 46판 128x188mm · 336쪽 | 가격 14,000원

책소개

《뉴욕 타임스》 올해의 책

맨부커상 최종 후보작

 

영국의 사회, 정치적 맥박을 정확히 짚어내는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

교감과 창조의 가치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춘 작품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인데?”

“우리 이웃 사람이니까요.”

편집자 리뷰

■ 영국문단의 독보적인 여성 캐릭터, 앨리 스미스의 사계절 4부작 중 첫 번째 장편

 

앨리 스미스는 독특한 방식의 글쓰기와 신화와 회화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적인 주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의식 등으로 영국에서 독보적인 여성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영국 작가다. 맨부커상에 4회나 최종 후보작에 오른 경력이 그것을 입증한다. 그리고 스코틀랜드 출신으로서, 스코틀랜드에서 언젠가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다면 그녀가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평가 역시 세상이 그녀를 바라보는 모습 중 하나다. 국내에서는 ‘알리 스미스’라는 이름으로 『소녀 소년을 만나다』 (문학동네, 2008), 『호텔 월드』(열린책들, 2011) 두 작품이 출간된 후 다른 작품들이 소개될 기회가 없었지만, 앨리 스미스는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며 자신의 행보를 넓혀 가고 있었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새롭게 국내에 소개하는 작품은 그녀의 2017년 최신작이자 ‘사계절 4부작’으로 기획한 연작 중 첫 번째로 출간된 『가을』이다. 출간되자마자 전 세계 도서 시장에서 화제가 되었으며, 맨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뉴욕 타임스》에서 ‘올해의 책’에 선정되는 등, 언론과 문단, 독자들의 큰 주목을 받은 작품이다. 스미스는 현재까지 『가을』과 『겨울』을 집필해 발표했고, 4월에 『봄』이 출간을 앞두고 있으며, 민음사는 스미스의 4부작 작품을 모두 계약해 차례대로 국내에 소개할 예정이다.

팔십이 넘은 이웃 노인 대니얼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십대 소녀 엘리자베스의 이야기와, 시간을 건너뛰어 서른두 살의 미술사 강사가 된 엘리자베스의 일상을 교차시키며 진행되는 이 이야기가 “최초의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뉴욕》)이라는 평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이 소설은 실제로 여러 사회 정치적 이슈들로 혼란스러운 영국 사회의 면면을 현재 진행형으로 묘사한 통찰력 있는 작품인 동시에, 지금 이 순간 한국 사회에도 적용되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동시대성을 지닌 소설이다. 백한 살이 넘어 요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기다리는 대니얼과, 사회인이 된 엘리자베스의 차가운 일상은 ‘독거노인’와 ‘비혼여성’을 넘어 ‘관료주의’와 ‘난민’으로까지 생각의 영역을 넓힌다. 이웃과의 교감이 개인들 각각의 삶에 얼마나 강한 불빛으로 사회를 건강하게 밝힐 수 있는지, 앨리 스미스는 사회의 한복판 속에서 소설가가 가진 날카로운 직감력으로 사회를 크로키한다. 재기 발랄하고 영리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그녀만의 언어유희를 발견하는 것 역시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 빼놓을 수 없는 독서 체크 사항이다.

 

 

■ 줄거리

 

세상이 지금과 달리 흥미진진하던 시절, 당대의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지식인이자 작곡가였던 대니얼은 이제 동네에서 늙은 동성애자라는 소문에 휩싸여 산다. 어린 엘리자베스는 우연히 학교 숙제로 이웃 사람 인터뷰를 하러 그의 집을 방문했다가 그와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사이가 된다. 이십 년 후, 엘리자베스는 대니얼의 영향으로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강사가 되고, 백한 살이 넘은 대니얼은 요양원에서 주로 잠들어 꿈을 꾸며 지낸다. 그 ‘투표’ 이후 엘리자베스가 겪는 매몰찬 도시의 분위기와 차가운 사람들, 대니얼의 꿈속에 복기되는 옛 시절에 대한 추억들, 그리고 그와 쌓은 우정의 근원과 영향에 대한 엘리자베스의 추억들을 오가며 순환을 이루던 이야기는 점차 늦가을을 향해 나아간다.

 

 

■ 현재 영국 사회를 진단하는 ‘포스트 브렉시트’ 소설

 

매일 아침 그녀는 어쩐지 속아 넘어간 것 같은 기분으로 잠에서 깬다. 그러면 어느 쪽에 투표했든 속았다는 기분으로 일어나는 사람이 온 나라에 몇 명이나 될까 하는 것으로 생각이 이어진다.(본문 256쪽)

 

『가을』의 배경은 2016년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 전후의 시점이다. 탈퇴 찬성 51.9%, 반대 48.1%로 근소한 격차로 여론이 나누어진 영국 사회는 반으로 갈라져 뒤숭숭해졌다.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브렉시트 논의는 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니얼이 문화적 축복 아래 보낸 20세기 중반과 2010년대 현재의 모습과의 비교는 시대상을 반영하는 소설의 역할에 충실하지만, 그렇다고 거대한 역사 소설은 아니다. 삼십 대인 엘리자베스가 스쳐 지나가는 동네 풍경들, 관공서에서 대기하는 주민들의 모습들이 배경처럼 등장인물들을 휘감으며 현재 영국이 어떤 분위기인지 생생히 전달한다. 특히 엘리자베스가 여권을 새로 신청하기 위해 우체국에서 하염없이 순서를 기다리거나 우체국 직원과 대화하며 ‘머리 크기가 규격에 맞지 않기 때문에’ 여권 신청을 거절당하는 장면은 이 사회가 가진 관료주의적 성격을 정확히 꼬집는 명장면이다.

 

청구서를 꾸며서 인쇄하기도 지극히 쉬운 일이에요. 어떤 사람인 척하기도 마찬가지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또 어떻고요? 인쇄된 종잇장에 이름이 박혀 있다는 게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죠?(본문 138쪽)

 

특히 엘리자베스의 ‘신분 증명’에 대한 논의는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데, 급하게 진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가지만 증명할 방법이 유효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대학교 교직원증밖에 없는 장면은, 현재 한국에서도 극심한 진통을 겪고 있는 고등교육법안 이슈를 떠올리게 한다. 대학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언제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시간강사의 처우와, 그와 무관하게 돌아가는 시스템의 횡포는 눈여겨볼 만하다.

한편 엘리자베스의 엄마 웬디는 작품 내내 딸 엘리자베스와 갈등을 일으키는 인물로 등장한다. 웬디는 딸이 나이 든 동성애자와 우정을 나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며, 딸이 공부하는 예술에 대해서도 무관심하게 반응해 딸과 항상 마찰을 빚는다. 한마디로 기존 사회에 순응하며 현재에 대해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않는 인물이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웬디는 한국의 「TV쇼 진품명품」과 비슷한 영국 TV 프로그램에 일반인 출연자가 되면서, 사라지고 잊힌 영국의 골동품들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사람으로 새롭게 전환된다. 엘리자베스가 미처 몰랐던 그녀의 과거에 대한 열정과 또 그 프로그램 출연으로 인해 새로이 맺어진 조이와의 동성애 관계를 아우르며, 웬디는 전통의 가치를 간직한 동시에 변화가 가능한 인간의 모습으로 새롭게 조명한다. 이렇듯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을 품은 채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는 한 나라의 다양한 인물들이 ‘가을’이라는 계절적 키워드와 함께 천천히 순환해 나가는 모습을 앨리 스미스는 함축적 장면 묘사와 대화들을 통해 군더더기 없는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 타자를 포용하는 이웃의 가치

 

엘리자베스는 어릴 적 ‘이웃과 인터뷰하기’ 숙제를 하기 위해 옆집 노인 대니얼 글럭의 집을 방문하려고 하지만, 엄마는 대니얼이 늙은 호모라는 소문이 있다면서 가까이 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결국 엘리자베스는 대니얼과 친구가 되며, 대니얼은 십 대의 그녀의 삶에 가장 중요한 가치들을 일깨우며 엘리자베스가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인간으로 성장하게끔 도와주게 된다.

그러나 이야기 바깥의 일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영국, 스코틀랜드, 유럽, 비유럽 등 사람들은 끊임없이 선을 긋고 ‘나’와 ‘타자’를 구분 지으려 한다. 이미 유럽 사회는 난민 문제로 인해 큰 홍역을 겪고 있다.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세 살 난 아이의 주검 문제는 전 세계적인 이슈가 된 적 있다. 작가는 작품의 첫 부분부터 그 장면이 떠오르는 장면을 삽입했는데, 이는 독자들을 향해 앞으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를 알려 주는 상징적인 행위인 셈이다.

 

그는 해안에 널려 있는, 조수에 밀려온 시체들을 바라본다.

아주 작은 아이의 것들도 있다. 그는 부풀어 오른 한 남자의 시체 옆에 쪼그려 앉는다. 지퍼로 잠긴 남자의 상의 속에서 아이가, 아니 아기가 입을 벌린 채 바닷물을 흘리고 있다. 부풀어 오른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대고 죽어 있다.(본문 25쪽)

 

타자 혐오는 어제오늘 일의 일이 아니며 다만 변화하는 세계 속에 자리 잡고 있던 문제가 이제는 수면 밖으로 터져 나오는 시기이다. 난민에 대한 포용 문제는 유럽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제주 예멘 난민 사태에서 보듯 한국에서도 본격적인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하는 단계에 있다. 이때 문학은 무엇을 전달할 수 있는지 앨리 스미스는 우아하고도 날렵한 태도로 사회의 현 모습을 가리킨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유럽 연합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78~79쪽)

 

늙은 동성애자를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로 확대된다. 소설 속 엘리자베스는 대니얼 덕에 옳고 그름을 고민하는 깊이 있는 인간으로 성장했으며, 대니얼 역시 사회적 소수자로서 비참한 삶의 노년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엘리자베스라는 가까운 이의 도움으로 자신이 이루어 낸 가치를 인정해 주는 사람들 곁에서 인간적 존엄을 지키며 보낼 수 있게 된다. 이웃이 되는 경험은 특별하다는 것을, 세상에 도움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시간은 인간이 서로 미워하고 울타리를 쳐도 영원한 순환을 반복하리라는 것을 앨리 스미스는 이 소설을 통해 역설한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인데?” 하고 엄마가 묻자 “우리 이웃 사람이니까요.”라고 말한 어린 엘리자베스의 말은 이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명장면 명대사’일 것이다.

 

 

■ 변치 않는 창조의 중요성

 

대니얼은 십 대인 엘리자베스에게 다양한 인문적 감수성을 질문과 대답의 방식을 통해 깨닫게 한다. 대니얼은 작곡가였으며, “세상이 지금보다 더 흥미진진하던” 시절에 다양한 예술가, 지식인과 교류하던 사람이었다. 세상에서 단 한 명 사랑했던 여자는 실존 인물인 영국의 팝아티스트 ‘폴린 보티(Pauline Boty)’로, 작가는 이 예술가의 실제 이야기에 허구인 대니얼의 이야기를 섞어 솜씨 좋게 풀어낸다. 여성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던 시기에 눈부시게 활동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폴린 보티, 그리고 그녀의 작품 도록을 헌책방에서 발견해 그녀를 평가절하하는 지도교수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정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은 무심한 세상 속에서도 번뜩이는 창조력을 지닌 이들과 그들을 알아봐 주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만든다. 허구의 세상을 만들어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는 어린 엘리자베스의 질문에 대한 대니얼의 대답은, 소설가가 이야기를 짓는 행위에 대한 가치에 대한 작가의 확고한 신념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을 만들어 내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실제 세상이 이미 있으니까요. 그냥 세상이 있고, 세상에 대한 진실이 있어요.

네 말은 그러니까 진실이 있고 그것의 가짜 버전이 따로 있는데 우리는 그 가짜를 듣고 산다는 거로구나. 대니얼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세상은 실재해요. 이야기들은 만들어지고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덜 진실인 건 아니지. 대니얼이 말했다.

그건 초강도 헛소리예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리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을 만들어 낸단다. 대니얼이 말했다. 그러니까 늘 네 이야기의 집에 사람들을 반겨 맞으려고 해 보렴. 그게 내 제안이다.(본문 157~158쪽)

 

 

■ 이 책에 쏟아진 찬사

 

현존하는 가장 독창적인 영국 소설가 중 하나로 이미 인정받는 앨리 스미스는 사회, 정치적 맥박을 정확히 짚어내는 신작 장편 『가을』을 통해 영국 최고의 연대기 작가 중 하나이기도 함을 입증한다. 이 작품에서 스미스는 특유의 장난기 어린 혁신들을 대거 보여 준다.

—《인디펜던트》

 

『가을』은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를테면 죽음의 운명, 비인습적인 사랑, 셰익스피어의 『태풍』, 각운을 맞춘 광고 문구, 그리고 나치주의와 최근 득세하는 포퓰리즘 신국수주의 바탕에 깔려 있는 외국인 혐오 같은 주제들을 놀라운 솜씨로 한데 엮어 낸다. 자유로운 정신과 예술의 생명력이야말로, 친절, 희망, “우리 스스로는 거기 파묻혀 있더라도 사악함 너머를 지향하는” 준비성과 함께, 스미스가 이 감동적인 소설에서 주창하는 바일 것이다. —NPR

 

말장난과 서정적인 몽상들이 가득한 즐거운 책. 『가을』은 삶에 대한, “붙잡으려 애써 온, 우리로부터 조금 떨어진 대상의 치열한 행복”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희망을 보여 준다. —《월스트리트 저널》

 

맨부커상 최종 후보로 선정된 스미스의 이 신작 소설은 외로운 소녀와 소녀에게 문화의 세계를 선사하는 친절한 노인의 매혹적인 우정을 핵심에 두고 있다. 커다란 관념들과 사소한 즐거움들을 담은 이 소설을 단연코 추천한다. —《라이브러리 저널》

 

노화와 예술, 사랑, 그리고 애착에 대한 다층적인 고찰의 중심에는 한 소녀와 나이 든 이웃 간의 우정이 존재한다. 스미스는 자신이 창조하는 어떤 세계에 대해서도 독자를 끌어들이는 재능을 갖고 있다. 『가을』은 정서적, 역사적인 무게, 유머, 그리고 창조성과 상실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갖춘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작품이다. —《커커스 리뷰》

 

우울한 시대에 살아 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장난스럽고 기묘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뉴욕 타임스》

 

이색적인 서사, 기지와 말장난의 바탕에 깊고 포용적인 연민의 경이가 숨어 있는 소설.

—《워싱턴 포스트》

 

앨리 스미스는 그녀 특유의 용맹함으로 노화, 우정의 탄력성, 미의 정치학, 명성의 의미에 질문을 던진다. 성공적인 소설들이 그러하듯 이 작품은 읽은 이의 뼛속에서 멈추지 않고 반향한다. 기지와 멜랑콜리, 슬픔과 기쁨, 지혜, 작은 사랑의 행위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계절에 대한 경이로 반짝이는 작품. —《보스턴 글로브》

 

 

 

■ 본문 중에서

 

 

최악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다. 다시. 세상이란 그런 것. 모든 것이 무너진다. 늘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다.(13쪽)

 

열두 개의 창구를 맡은 직원 두 명이 아마도 154번과 155번일 손님을 응대하고 있어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여기 온 지 이십 분이 되었는데 아직 같은 손님 둘이 서비스를 받고 있다.) 그녀는 우체국에서 나가 초록불을 기다려 길을 건너서는 버나드 거리의 헌책방으로 간다.

십 분 후에 돌아가 보니 여전히 직원 둘이 서비스를 하고 있는데 안내 화면은 다음 순서로 284, 285, 286번을 알린다.(28쪽)

 

셰익스피어의 탄생 또는 사망 몇 주기인가를 기념해 제작된 주화가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도 보인다. 한쪽 면에 해골이 있는 것을 보면 사망 쪽인 듯하다.

엘리자베스는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마침 읽고 있던 페이지에 셰익스피어의 인용구가 나온다. (…) 소설이 비로소 셰익스피어와 제대로 만나는 순간 책에서 눈을 들어 기념주화를 바라보는 일이란 실로 대단한 경험이었다. 그녀가 몸을 움직이다 실수로 좌석을 절거덕거린다. 옆자리 여자가 살짝 공중으로 뜨는데 모르는지 신경 쓰지 않는지 아무 반응이 없다.

이처럼 비공동체적인 공동 대기석에 앉아 있다는 것이 우습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그 점에 대해 눈짓을 나눌 사람이 없고 책과 기념주화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할 대상은 더더욱 없다.(30쪽)

 

그는 기존 여권의 사진과 엘리자베스가 즉석 사진기에서 찍어 온 사진을 비교한다.

알아볼 수는 있어요. 그가 말한다. 간신히.(어깨가 들썩인다.) 그런데 이게 스물둘과 서른둘의 차이예요. 십 년 더 지나 새 여권을 받으러 오실 때 한번 또 보죠.(어깨가 들썩인다.)(36쪽)

 

그가 줄자를 꺼내 들고 몇 센티미터를 당긴 뒤 그것을 엘리자베스의 사진 위에 얹는다.

맞네요. 그가 말한다.

네?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그럴 줄 알았어요. 그가 말한다. 24밀리미터예요. 예상대로.

잘됐군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잘된 게 아니에요. 남자가 말한다. 안됐지만 조금도 잘된 게 아니거든요. 얼굴 크기가 틀렸어요.

제 얼굴 크기가 어떻게 틀릴 수 있을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규격에 대한 지시 사항을 따르지 않으셨어요. 이용하신 즉석 사진기에 여권 사진 관련한 지시 사항이 있었다면 말이에요. 남자가 말한다. 물론 이용하신 즉석 사진기에 여권 사진 관련 지시 사항이 없었을 수도 있죠. 하지만 어찌 됐건 도움이 되지 않아요.

얼굴 크기가 얼마여야 하는데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제출하는 사진의 올바른 얼굴 크기는 29밀리미터와 34밀리미터 사이랍니다. 남자가 말한다. 손님 사진은 5밀리미터가 모자라요.

왜 제 얼굴이 어떤 크기여야 하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규정이 그러니까요. 남자가 말한다.(39쪽)

 

늙은 호모야. 엘리자베스의 어머니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왜 하필이면 그 사람인데? 그녀가 보다 보통의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이웃 사람이니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59쪽)

 

투표가 끝난 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 마을의 분위기도 음울하다. 엘리자베스는 버스 정류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집을 지나친다. 문에서 시작해 위쪽 창까지 전면에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글자들이 검은 페인트로 칠해져 있다.(72쪽)

 

사람들은 시선을 깔거나 돌리거나 그녀를 빤히 쳐다봐 시선을 돌리게 만든다. 그녀가 어머니를 위해 과일이나 진통제, 신문 따위를 사는데,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과 달리 무심하게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어머니의 집까지 가는 길에서 지나친 사람들이 그녀를, 그리고 그녀 또한 그들을 전과 달리 오만하게 대한다.(73쪽)

 

별것도 아닌 일에는 대단한 일인 양 호들갑을 떨고 정말 끔찍한 일에는 단순하게 다루는 거 말이야. 분노에 지쳤고, 야비함에 지쳤고, 이기주의에도 지쳤어. 그걸 막아 내려는 노력이 전혀 없는 데 지쳤고, 오히려 그걸 조장하는 데 지쳤어. 현재의 폭력에 지쳤고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다가올 폭력에도 지쳤어. 거짓말쟁이들에 지쳤어. 아닌 척하는 거짓말쟁이들에, 그들이 이런 일을 유발하는 데 지쳤어. 그들이 멍청해서 그런 건지 고의로 그런 건지 궁금해하는 데도 지쳤어. 거짓말을 일삼는 정부들에 지쳤어. 거짓말을 듣거나 말거나 더 이상 신경도 쓰지 않는 사람들에 지쳤어. 이렇게 두려워해야 하는 데 지쳤어. 적대감에 지쳤어.(76~77쪽)

 

온 나라에 고통과 환희가 있었다.

폭풍에 송전선이 철탑을 부러뜨리고 나무와 지붕과 차량들 위의 상공을 지져 대듯 그 사건은 온 나라를 강타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그것이 잘된 일이라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패배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승리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옳은 일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른 일을 했다고 느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유럽 연합은 무엇인가”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스코틀랜드 이주”를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구글에서 “아일랜드 여권 신청”을 검색했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을 잡년이라고 불렀다. 온 나라에서 사람들은 안전하지 않다고 느꼈다.(78~79쪽)

 

온 나라에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온 나라에서 평소대로 극히 일부의 사람들이 평소대로 엄청난 수의 사람들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넘쳤다. 온 나라에서 돈, 돈, 돈, 돈이 씨가 말랐다.(80쪽)

 

그는 여든다섯 살이야. 그녀의 어머니가 말했다. 여든다섯 살짜리 남자가 어떻게 네 친구니? 왜 정상적인 열세 살짜리들처럼 정상적인 친구를 사귀면 안 되는 거니?

그건 엄마가 정상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어요.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그 정의는 내가 정상을 정의하는 방식과 다르겠지만요. 우리는 모두 상대성 속에 살고 현재 정상에 대한 내 정의는 엄마의 정의와 다르고 아마도 결코 같아지지 않을 거예요.(102~103쪽)

 

부자연스러워.

불건전해.

안 될 일이야.

허락할 수 없어.

더는 안 돼.(111쪽)

 

지금 등록해서 진료를 받을 수 있나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몸이 심상치 않아요. 정말이지 누군가와 상담하고 싶어요.

접수원이 신분증이 있느냐고 묻는다.

엘리자베스가 접수원에게 대학 도서관 카드를 보여 준다.

적어도 일자리를 잃기 전까지는 유효하니까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대학들이 예산의 16퍼센트를 감축할 거라더군요.

접수원이 참을성 있는(patient) 미소를 짓는다.(특별히 환자들(patients)을 위한 미소.)

현재 주소와 가급적이면 사진이 있는 게 필요해요. 그녀가 말한다.

엘리자베스가 그녀에게 여권을 보여 준다.

여권의 기간이 만료됐네요. 접수원이 말한다.

맞아요.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갱신하고 있어요.

죄송하지만 기간이 만료된 신분증은 인정되지 않아요. 접수원이 말한다.(136~137쪽)

 

“청구서를 꾸며서 인쇄하기도 지극히 쉬운 일이에요. 어떤 사람인 척하기도 마찬가지죠. 엘리자베스가 말한다. 사기를 치는 사람들은 또 어떻고요? 인쇄된 종잇장에 이름이 박혀 있다는 게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죠?”(138쪽)

 

“우리가 단지 수사학적, 실제적으로 이 나라의 이민자들에게만 통합 반대를 권고해 온 것이 아닙니다. 수사학적, 실제적으로 우리 자신에게도 통합하지 말라고 권고해 온 것입니다. 대처 총리가 우리에게 이기적이 되라고, 사회라는 것은 없음을 머리로 생각만 하지 말고 신봉하라고 가르친 이래로 우리는 이를 자기 검열의 사안으로 삼고 있습니다.”

“뭐, 이런 셈이군요. 포기해, 철 좀 들어. 네 시대는 끝났어. 민주주의. 너는 진 거야.”(146쪽)

 

아파트 건물 근처의 거리에서 깡패 같은 자들이 떼를 지어 「지배하라, 영국이여」를 불렀다. 영국은 파도를 지배한다. 먼저 우리는 폴란드인들을 잡을 테다. 그다음에는 이슬람교도들과 날품팔이들을 잡을 테고, 이어서 동성애자들을 잡을 테다. “아무리 도망쳐도 우리는 당신들을 쫓아가서 잡을 거예요.”(256쪽)

목차

1 9

2 115

3 233

 

감사의 말 332

작가 소개

앨리 스미스

1962년 스코틀랜드의 인버네스에서 태어났다. 애버딘 대학교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밟은 뒤 1995년 발표한 단편집 『자유 연애(Free Love and Other Stories)』로 데뷔작에게 주어지는 샐타이어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좋아해(Like)』에 이어 두 번째로 출간한 『호텔 월드(Hotel World)』(2001)는 언론과 평단의 열렬한 지지와 더불어 맨부커상과 오렌지상 최종 후보에 올랐고, 스코틀랜드 예술 협회 도서상과 앙코르상을 수상했다. 2005년에 쓴 『우연한 방문객(The Accidental)』 역시 맨부커상과 오렌지상 최종 후보에 오르는 동시에 휘트브레드상을 수상하며 앨리 스미스의 영향력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했다. 이후 이피스 신화를 토대로 재구성한 『소녀 소년을 만나다(Girl Meets Boy)』(2007)로 클레어 맥클린상과 르 프린스 모리스상 후보에 올랐다. 2011년 『그리고 사라진(There But For The)』을 발표했으며, 2017년 ‘사계절 4부작’의 첫 권인 『가을(Autumn)』을 출간해 문단과 언론으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았다.

김재성 옮김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며 출판 기획 및 번역을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나의 우울증을 떠나보내며』, 『밤에 우리 영혼은』, 『우상들과의 점심』, 『하드보일드 센티멘털리티』, 『푸른 밤』, 『불안한 낙원』, 『아름다운 폐허』, 『신디 로퍼』, 『한 문장의 철학』, 『501 위대한 작가들』 등이 있다.

독자 리뷰
등록된 리뷰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