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을 읽고

투르게네프가 인간은 햄릿 형 인간과 돈키호테 형 인간으로 구분될 수 있다고 말한 것을 듣고 햄릿이라는 책을 다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종종 누군가가 나에 대해 “너는 XX한 사람이야” 라고 규정지어 줄 때가 있다. 내가 이상한 사람인지 몰라도 그 누군가들이 전혀 다른 사람에 대해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느껴질 정도로 다르게 나를 이야기한다. 나는 어떤 인간 형인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한 인간이 여러 자아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총체라고 생각한다. 그 각각의 자아들조차 어떻다고 쉽게 단정지어질 수 없는 것인데, 그 총체인 한 사람은 더더욱이 XX라고 label 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햄릿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이 거의 마지막 부분에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지는 데에도 하느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죽음이 지금 오면 장차 오지 않을 것이고, 장차 아니 올 것이면 지금 올 것이 아닌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올 것이고, 중요한 건 마음의 준비라네.” 라고 햄릿이 말한 대목이다. 우리가 이 때까지 알고 있었던 우유부단함의 상징인 햄릿이 말하기에는 모든 것에 초탈한 느낌의 말이 아닌가?

 

사람의 운명에 작용하는 요소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나의 경우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이다! 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들이 계속 바뀐다. 헤라클레투스라는 사람은 “성격은 곧 운명” 이라는 말을 통해 운명이라는 것이 개인의 성격에 영향을 받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말이 햄릿에서처럼 잘 맞는 경우도 찾기 힘들 것 같다. 어찌보면 이 소설은 햄릿이라는 한 사람 안에서 진행되는 도덕적 갈등에 관한 소설인데, 이 갈등에 있어 성격의 극단성이 모든 것을 파국으로 이끌어 가기 때문이다.

 

햄릿은 거짓으로 미친척 살아간다. 사람이 왜 미치는 것일까 라는 생각에 앞서 가끔 뭐가 미친 것일까라는 생각을 한다. 사회적으로 미쳤다고 낙인 찍혀버린, 어찌 보면 나랑 너무나도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과 이야기하다 보면, 종종 그 사람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소설에서 햄릿의 아버지는 삼촌으로부터 독살을 당했다. 어머니는 그 삼촌과 결혼했다. 친구들은 그를 배반했다. 주변 세상이 온통 악으로 덮힌 가운데 햄릿은 미친 척 연기하고 사람들은 그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미쳤다”는 것에 대해 가지는 환상 중 하나가 섬세한 한 개인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미쳤다고 생각하는 환상이다. 사회적으로 정의된 정상과 비정상의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금도 내가 있는 스타벅스에 한동안 씻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 커다란 봉지 3개를 들고 걸어다니고 있고 나는 그를 미쳤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