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고전문학들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동물 농장>은 실제적인 내용보다도 ‘명성’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친근한 작품이라 오히려 읽을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을수록 오히려 그것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간과하고 있을 수 있다. <동물 농장>은 생각했던 것 만큼 뻔한 풍자우화도 아니었고 기대이상으로 흥미있는 소설도 아니었다. 오웰은 나의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인 차원의 사회주의자였다.
동물농장이 풍자하고 있는 대상은 명료하다. 당시의 스탈린의 소비에트를 직접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소설에 가까운 이 우화의 내용은 큰 반전도 희망도 없이 끝난다. 존즈라는 인간이 주인이던 메이너 농장에 늙은 돼지 메이저가 어느날 동물들의 반란을 예언하고 죽는다. 동물들은 메이저의 뜻을 받들어 반란을 일으키고, 인간들을 몰아내고 농장이름을 동물들이 주인인 농장,’동물 농장’으로 개명한다.
머리가 좋은 돼지들은 자진해서 지도자가 되고, 동물들은 나름대로의 계명을 세우고 규칙을 만들어서 모든 동물들이 평등한 농장을 만들기로 약속한다. 그러나 반란의 첫날 일어난 우유와 사과 실종사건은 이 반란의 좋지 않은 결말을 예기하고 있다.
돼지들은 점점 권력욕에 맛을 들이고 지도자의 중심인 스노볼이 반대파 나폴레옹에 의해 농장에서 내쫓긴다. 나폴레옹은 처음에 동물들끼리 정한 일곱계명을 차례차례 어기기 시작한다. 동물들은 미심쩍어하고 계명이 달라진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도 나폴레옹의 측근 돼지 스퀼러의 교묘한 말솜씨에 넘어가서 자신들의 기억이 잘못된것이었다고 믿게된다.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마지막에 나폴레옹과 측근 돼지들은 인간과 거래를 하고 같이 술잔치를 벌인다. 창 밖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동물들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창 밖의 동물들은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인간에게서 돼지로, 다시 돼지에게서 인간으로 번갈아 시선을 옮겼다. 그러나 누가 돼지고 누가 인간인지,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이미 분간 할 수 없었다.’
이미 동시대 인간이 아닌 나로서는 이러한 맥락의 러시아 풍자우화가 완전히 이해되진 않는다. 당시의 시대 상황도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동물농장>이 그러한 특정 권력을 지시하는 게 아닐지라도, 이러한 권력부폐는 어느 시대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오웰은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시대처럼 소란한 세월을 살면서 이런 문제들을 회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넌센스다. 이 시대의 작가는 누구나가 다 이런저런 형태로 그 문제들을 다룬다. 그것은 어느 쪽에 설 것인가, 어떤 방법을 따를 것인가의 문제이다. 자신의 정치적 편견을 더 많이 의식하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가진 미학적 지적 성실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정치적으로 행동할 기회도 더 많이 갖게 된다.’ 실제로 오웰은 아주 활발한 활동을 한 행동가였다.
모든 작품이 정치적인 냄새를 풍길 필요는 없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의 흐름은 누구든 파악하고 있을 필요가 있다. 아니, 알고 있어야 하는 건 거의 의무에 가깝다. 그런 관점을 깨우쳐준다는 점에서 조지 오웰의 <동물 농장>과 그의 에세이 두편은 많은 시사점이 있다. 단지 <동물 농장>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보고 판단했을 때, 내용은 충분히 이해되지만 특별한 감흥을 느끼진 못했기 때문에 ‘좋았다’라는 감상을 솔직하게 쓰기 힘들다. 이미 작품 발표 후 많은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들이 더이상 새로운 비유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 작품보다는 오히려 에세이를 더 흥미롭게 읽었고, 오웰의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