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일다.. 싯다르타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싯다르타의 말처럼, 항상 모든 지혜는 가르침에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깨달음에 있다. 지나치게 감명받은 작품은 오히려 감상을 말하기 힘든 법이다. 거의 모든 내용에 공감하고 교화되어 버려서, 어떤 얘기도 그 작품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 감상을 적는 것이 나에겐 매우 힘든 일임을 미리 밝혀둔다.

 

싯다르타는 바라문의 아들로, 남다른 총명함과 우월함으로 부모님과 친구들의 기쁨이 되는 존재였다. 그러나 싯다르타 자신은 그런 자신에게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스스로에게 필요한 무언가를 찾기위해 사문이 되기로 결심한다. 절친한 친구인 고빈다와 함께 사문이 된 싯다르타는 사문들의 고행을 배우고 따라하면서 다른 모든 존재들의 자아가 되는 체험을 거듭했다. 그러나 그 어떤 명상과 수행도 싯다르타를 만족시켜주진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세존 부처의 소문을 듣게 된다. 고타마라고 불리는 그 부처는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제자들에게 에워싸인 가운데 설법을 행한다고 한다. 싯다르타와 고빈다는 즉시 사문들을 떠나고 고타마의 설법을 듣기 위해 떠난다. 부처의 설법을 들은 고빈다는 부처의 제자로 귀의하였지만 싯다르타는 “세존께서 몸소 겪으셨던 것에 관한 비밀, 즉 수십만 명 가운데 혼자만 체험하셨던 그 비밀이 그 가르침 속에는 들어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가르침을 들었을 때 생각하였고 깨달았던 점입니다. 이 점이 바로 제가 편력의 길을 계속하려는 이유입니다.” 라고 고타마에게 말하며, 어느 누구의 가르침으로도 깨달을 수 없는 혼자만의 길을 떠난다. 싯다르타는 고타마를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으나 그분이 하였던 것처럼 자기도 스스로의 체험으로 완성을 이루겠다고 다짐한다.

 

마지막에는 결국 완성을 이룰 수 있게되지만, 그 과정에서 싯다르타는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았던 탐욕과 쾌락, 욕구, 태만 등에 사로잡혀 무의미한 세월들을 보내기도 한다. 한 여인을 사랑하는 것에서 시작된 그 유희의 나날들에서 돌이킬 수 없는 것의 상실을 느낀 싯다르타는 그제서야 모든 부를 청산하고 다시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러던 중 강가에서 만나는 뱃사공 바주데바의 제자이자 친구가 되어 진정한 완성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강을 보면서, 이러한 인생의 굴곡도 고행, 사색, 침잠같은 수행들과 마찬가지로 내면의 단일성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임을 깨닫게 된다. 강에는 아무련 시간도 없으며 모든 것은 그저 그대로 존재하는 것 자체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내가 절망을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 그러니까 자살할 생각까지 품을 정도로 나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자비를 체험할 수 있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옴을 듣기 위해서였으며, 다시 올바로 잠을 자고 올바로 깨어날 수 있기 위해서였어. 내가 바보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나의 내면에서 다시 아트만을 발견해 내기 위해서였어. 내가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은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기 위해서였어.’

 

정신과 욕망의 어느 한쪽에 편중되지 않는 이러한 삶의 과정을 통해서 외부세계와 내부세계가 모순되지 않고 합일되어 진정한 단일성을 보여준다. <데미안>에서 선과 악을 구분짓지 않았던 것처럼, 욕망과 본능의 외부 세계도 모두 포용해줌으로써 일종의 안도감과 감동을 주는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도 끝부분에서는 한스가 한심하게 생각해왔던 기계공들의 생활을 직접 겪으면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던 것도. 물론 한스는 싯다르타나 싱클레어처럼 제대로된 내면 성찰을 이루지 못하고 그 어떤 단일성도 느끼지 못한채 소멸되었지만, 헤세의 책을 하나씩 읽어갈 수록 그의 이야기 맥락이 점점 명확해진다.

 

헤세는 언제나 작품속에 종교적인 코드를 보여주는데, 그 종교를 온전히 따르지 않고 ‘독자적인 종교’를 만들어낸다. 스스로의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다. ‘진리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것. 이 깨달음을 나는 일생에 꼭 한번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 시도가 바로 싯다르타이다.’ 라는 헤세의 말처럼. <싯다르타>로 얻은 깨달음을 누군가에게 말로서 알려주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이 황폐해지고 스스로가 타락했다고 느껴질 때마다 찾을 것 같은 책이라는 한심한 감상 밖에 전하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