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논산훈련소에서 훈령병 때였다.
늦가을이었는데 그 해 가을에는 유난히 비가 많이 내렸다.
하루는 군복 위에 판초우의라고 불리는 군용 비옷을 입고 비를 맞으며 훈련장에서 숙소로 돌아왔다.
논산훈련소는 훈련교장 간의 거리가 워낙 멀었기에 거이 한 시간 이상을 걸어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해는 지고 있었고, 늦가을이여서 주변의 논들의 볏잎은 누런색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젖은 몸을 이끌고 돌아가 봤자 아무도 반겨 줄 사람이 없는 숙소로 가고 있었다.
그때 옆의 무너져 갈 듯한 스레트지붕의 집에서 아궁이에서 밥짓는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창문에서는 갓 어둠이 깔려서 겨우 비치는 희미한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갑자기 그 집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어머니와 가족이 있고, 나를 위한 따스한 밥상이 준비되어 있을 것 같았다.
당시 나는 집에서 너무 멀리있는 느낌이었고, 어떻게 하든 꼭 다시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2015년 퓰리처상 수상작이라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이란 책을 읽었다.
책을 읽고 나면 대부분은 어떤 느낌이라는 것이 있다.
그리고 느낌은 글로 적어두면 오랫 동안 그 책을 읽었던 감동이 남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의 느낌은 글로 적으려 할 때 한 참을 망설이게 되었다.
무언가 마음을 사로 잡는 느낌이 있는데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대신 이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의 논산훈련소의 이미지가 계속해서 떠 올랐다.
늦가을의 추수 때의 누런 논들, 해질녁 무렵의 시골집들과 아궁이에서 피어나는 연기, 그리고 그 연기에서 나는 구수한 냄새, 추적 추적 내리는 빗소리….
잊고 있었던 색깔과 냄새, 그리고 소리들이 떠 올랐다.
이 소설은 훌륭한 스토리와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작가가 진정 원했던 것은 독자들이 그 스토리와 배경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스토리와 배경의 뒤에 있는 색깔과 소리, 그리고 냄새를 느끼는 것이다.
이 소설의 시작은 2차 세계대전의 막바진인 1944년 8월 7일이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 서부해안에서 연합군의 폭격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장소는 연합군의 집중 포격 대상이 된 프랑스의 오래된 해안 도시인 ‘생말로’이다.
그 곳의 6층 다락방에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녀가 혼자 폭격 속에서 견디고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마리로르’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떨어진 독일군이 방어진지로 사용하고 있는 꿀벌 호텔의 지하에서는 한 독일군 소년이 폭격에 대피하고 있다.
그 소년의 이름은 ‘베르너’이다.
소설은 다시 193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각각 파리의 마리로르의 삶과 그곳에서 500KM떨어진 독일의 알자즈 지역의 졸라페인이라는 광산 지역의 베르너라는 고아의 삶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어떻게 1944년 8월에 생말로에서 만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 한다.
마리로르의 아버지는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의 열쇠 장인이다.
그는 눈 먼 딸을 끔찍히 사랑한다.
그녀에게 파리의 모형을 만들어 모든 도시의 길을 익히게 해 준다.
생일이면 그가 손수 만든 퍼즐 상자 안에 선물을 담아서 준다.
그녀가 좋아하는 점자 소설 책들과 함께…
그러나 독일군이 몰려오고 아버지와 그녀는 파리 박물관의 가장 큰 배모양의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작은 할아버지가 있는 생말로로 피신하게 된다.
그녀는 그 곳에서 전쟁으로 그녀의 빛과 색깔, 냄새들, 그리고 시간이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들을 더 간절히 붙잡으려 한다.
베르너는 고아로서 여동생 유타와 함께 엘레나 아주머니가 돌보는 고아들과 생활한다.
그는 유타와 함께 라디오를 통해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와 그 소리가 만들어내는 세계를 본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세계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지고….
독일제국과 히틀러가 만들어 놓은 환상의 세계를 쫓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가 동경하던 세계의 빛이 잿빛 어둠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어린 유타와 함께 있었던 그 세계, 그 빛, 그 소리로 돌아오려 한다.
베르너는 결국 원래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하지만 생말로에서 마리로르라는 소녀를 만난 잠시 어린 시절에 보았던 그 세계를 맛보게 된다.
이 소설에서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하나는 다이아몬드나 히틀러의 제3제국이 비추는 영롱하고도 화려한 색깔을 가진 세계이다.
모두들 그 세계를 동경하고, 그 세계를 가지려 한다.
다른 하나는 눈 먼 마리로르가 느꼈던 파리나 생말로의 골목길의 작은 세계이다.
베르너가 동생 유타와 라디오를 통해 느꼈던 추억과 상상의 세계이다.
전쟁과 사람들은 마리로르와 베르너가 느꼈던 세계를 지워버리고…
세상을 화려한 빛의 세계로 만들려고 한다.
아니, 그런 세계를 만든다고 믿는다.
그러나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진정한 믿음은 마리로르와 베르너가 누렸던 그 작은 세계에 있다고 이야기 한다.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이 소설에 대한 여러 개의 기사나 서평을 보았다.
대부분 이 소설을 반전소설이나 어린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야기들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이 소설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영원한 시간 손에서 찰라의 순간에 비추는 그 빛과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영원 속에서의 잠시 누렸지만 곧 사려져 버리는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이야기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