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속의 삶에서 일탈을 꿈구는 남자

아베 코보 | 옮김 김난주
출간일 2001년 11월 10일

 

 

젊은 시절에는 삶에 매여 하루 하루를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교만한 생각으로는 그들을 경멸했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가?

 

먹고 사는 것이 삶에 전부인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뭔가 남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하지 않는가?

 

거이 매일같이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시간이 점점 줄었다.

 

한 달에 가끔 한 번씩 정도…

 

그러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정도…

 

어느덧 내 삶을 보니 젊은 시절 내가 그렇게 싫어하던 사람들의 삶을 살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에 매여, 가족과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하루 하루를 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삶을 경멸하던 예전의 교만한 마음은 없어졌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삶이 아름답거나 가치 있는 삶이라는고는 이야기 하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다시 꿈꾸어야 하나?

 

다시금 나만의 가치있는 삶을 찾아야 하나?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를 읽으며 오랫 동안 하지 않았던 이런 생각들을 다시 하게 되었다.

 

모래의 여자는 실존주의 소설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계속해서 카뮈나 카프카의 소설들이 오버랩되었다.

 

실존주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초현실주의적인 배경과 상황들도 계속해서 반복된다.

 

 

 

주인공 남자는 평범한 학교 교사이다.

 

(책의 끝에서는 주인공의 이름인 니키 준페이라고 언급되지만 소설 속에서는 계속해서 한 남자로만 불린다.)

 

그는 평범한 삶을 견디지 못해 곤충수집을 시작한다.

 

그것도 자신만이 발견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길 수 있는 그런 곤충을 발견하고자 모래 속을 뒤진다.

 

그러던 어느 날 곤충을 수집하기 위해 어느 바닷가의 모래 마을을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마을 노인의 호의?로 모래 구덩이 속에 있는 한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된다.

 

그 곳에는 30대의 여성 한 명만이 기거하고 있었고, 외부와는 사닥다리 하나로 연결되어 있었다.

 

여자는 모래에 쌓여가는 구덩이 집에서 밤새 계속해서 모래를 퍼 담아 올리는 일을 했다.

 

다음 날 남자는 모래 구덩이를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려 했으나 아무도 사다리를 내려 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 곳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마을을 향해 고함도 치고..

 

여자를 윽박지르기도 하고…

 

여자를 묶어 놓고 탈출 방법을 묻기도 한다.

 

그러다가 결국 최후의 방법으로 자신의 옷과 헌 옷들을 묶어서 밧줄을 만들고…

 

여자가 자는 사이에 그 줄을 통해 모래 구덩이를 탈출한다.

 

그러나 마을 밖으로 달려 나갈 수록 길을 알지 못하고…

 

개에게 쫓기거나 깊은 모래 구덩이로 몸이 빠져간다.

 

결국 사람들에게 잡혀 다시 모래 구덩이로 돌아온다.

 

그리고 결국 체념하고 여자와 함께 모래를 퍼 나른다.

 

모든 소망을 잃어 갈 무렵 그는 모래 구덩이 속에서 물을 퍼올리는 유수장치를 만든다.

 

이제 이것이 그의 소망이 된다.

 

그 후 그는 탈출 할 기회가 생기지만 탈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망가진 유수시설을 고치며…

 

나중에 천천히 나가도 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소설을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가 생각났다.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스는 인간으로서의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신에게 맞선 대가로 언덕 위로 돌을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시지프스는 아침부터 힘들게 돌을 언덕 위로 올리면 그 돌은 저녁무렵 언덕 위에서 다시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다시 언덕 아래로 내려가 다음 날부터 또 돌을 올린다.

 

이 모든 것들이 신들이 시지프스에게 내린 형벌이었다.

 

카뮈는 이것이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부조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카뮈는 그런 부조리를 증오하거나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 부조리의 삶에 오히려 행복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부조리와 행복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한다.

 

 

 

“행복과 부조리는 하나의 대지에서 나온 두 자식이다!”

 

 

 

소설 속의 남자는 이 부조리에 갇혀 있다.

 

모래 속의 세상은 그에게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세상이다.

 

왜 내가 모래 속에 갇혀 있어야 하는가?

 

이런 부조리한 삶이 어디있는가?

 

 

 

이런 부조리함은 단지 남자의 마음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모래 속의 삶이 바로 그런 삶이다.

 

모래는 하루만 퍼 올리지 않아도 쌓여서 집을 무너뜨리려 한다.

 

그러기에 계속해서 모래를 퍼 올려야 한다.

 

같이 있는 여자는 이런 삶은 자신의 삶으로 받아 들인다.

 

밤에는 모래를 퍼 올리고, 낮에는 잠을 잔다.

 

 

 

남자는 이런 일상을 거부한다.

 

여자에게 왜 어리석게 이런 곳에 갇혀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남자도 차츰 여자의 삶에 동화가 되어 간다.

 

그도 밤에 모래를 퍼 올리고, 낮에 잠을 잔다.

 

 

 

차이가 있다면 그는 계속해서 희망을 꿈꾼다.

 

마지막에는 유치하게 보이는 유수시설이 그의 희망이다.

 

그 유수시설이 모래 속의 작은 일상일뿐임에도…

 

 

 

 

 

저자가 말하는 모래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야기한다.

 

형제도 없고, 끝임없이 이동하는 신기루와 같은 것들…

 

하루라도 퍼올리지 않으면 우리를 무너뜨리는 것들…

 

그 속에서 잠을 자고, 그 속에서 밥을 먹고, 그 속에서 삶을 꿈꾼다.

 

그럼에도 남자는 그 모래 속에서 계속해서 탈출을 꿈꾼다.

 

 

 

 

 

저자는 이런 모래 속의 삶에서 카뮈처럼 행복을 발견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모래 속의 삶을 긍정하는 건지, 부정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단지 우리 인간의 삶이 모래 속의 삶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