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다.

인간의 내면과 사회, 종교를 이렇게 처절하고 심오하게 그려낸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130년이 넘는 시간을 통해 더욱 그 의미가 깊어진다. 그 말은 130년 동안 인간의 삶과 고뇌와 사회가 더 좋아지진 않았다는 이야기기도 하다. 세상은 더욱 복잡하고 무질서해져간다. 그 속의 인간은 자신이란 존재를 잃어가고 그 상실감 속에서 생각지도 못한 일을 저지르고 무감하게 그것들을 받아들인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먼 미래를 내다보며 이 작품을 쓴 것이 아니다. 그러나 먼 미래의 우리는 그의 글 속에서 더욱 무력해진 드미트리가 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까라마조프가의 남자들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아버지 표도르는 가부장적이고 폭군이라 강하게 느껴지지만 한편으로는 늙고 늙어서 두려움을 가진 약한 존재이다. 본능적이고 충동적인 드미트리는 자신의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살고 그 모습이 어딘지 자유로워 보이지만 제어할 수 없는 인생과 사건에 휘말리면서 결국엔 자포자기 해버리는 의지박약의 모습을 보인다. 냉철한 이성과 지성으로 무장한 듯 보이는 이반은 내면에 들끓는 질투와 분노의 감정으로 결국에는 비이성적인 드미트리 탈주라는 계획을 세우기에 이른다. 종교적 성스러움의 화신처럼 보이는 순수한 알료샤는 결국 종교를 대하는 인간, 인간의 종교에 회의를 느끼고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탐구를 위해 수도원을 나온다. 그 외에도 천박하고 사랑에 자유로운 여인 그루셴카가 드미트리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발견하고, 기품 있는 카테리나가 격정에 휩쓸리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찾아낸 인간들의 모습에는 대단한 양면성이 깃들어있다. 어쩌면 당연하다. 인간은 한 가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없고 많은 사건과 시간에 의해서 변해간다. 독자도 까라마조프가의 남자들이 의외의 모습을 보이고 자신 안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해 나갈 때 함께 변화를 느낀다. 사람은 일종의 이데아적 형상으로 내가 보길 원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나는 다르고 어떤 문제를 통해 발견해 낼 모습 또한 원하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이것을 맞닥트렸을 때의 인간은 과연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순응할 것인가, 폭주하고 반박할 것인가. 어느 쪽이든 쉽지 않다. 그래서 사는 것은 어렵고 절망의 나락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하는 것이다. 말 만큼은 쉬운 이런 진리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몸소 겪는다. 나도 간접적으로나마 겪으면서 과연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를 고민한다.

인간을 고민하게 하는 삶. 삶은 다양한 것으로 이뤄져있지만 과거에도 그렇고 현대에도 물질인 돈이 의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어떤 때에는 존엄, 이상, 자아추구, 행복 등의 관념을 넘어서 제1의 가치가 될 때도 있다. 표도르는 그 돈으로 폭력적인 힘을 가지게 되었지만 유산을 원하는 드미트리와의 마찰로 계속 위협을 받고 있다. 결국 돈 때문에 드미트리는 아버지 살인범으로 몰렸으니 돈이 아니었다면 비극은 싹을 틔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폭력적인 힘은 스메르쟈코프를 낳았고 억눌린 스메르쟈코프는 죽음 그 자체가 된다. 자본사회는 돈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물질인 돈은 어느새 정신의 일부가 되었다.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도 하고 사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물질이 없다면 인간은 동물의 영역으로 포함되었거나 신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것과 떨어져 있는 알료샤도 가난한 자의 눈으로는 부르주아 도련님의 수도생활 정도로 치부될 정도다. 돈이 없어 일어나는 일들로 수치심을 느끼고 돈으로 구원받기도 한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과연 신의 은총일까, 돈의 은총일까. 종교는 물질을 넘어서 인간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것일까. 8명의 주요 인물들이 삶과 사건이 60억 지구인들을 압축하고 있다.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를 모으면 그 본성은 어떤 특징으로 귀결될 수 있는 것일까?

비록 누명을 쓴 드미트리의 삶이 되더라도 결국 그는 그루셴카의 사랑을 얻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것. 물질은 잃어도 다른 것이 돌아온다. 알료샤가 종교적 지주를 잃었지만 세상의 신념을 얻으려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서 삶에 대한 고민을 하나 더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