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 있는 거잖아

종합금융회사의 신용카드 승인실에서 근무하는 계나는 톱니바퀴의 일부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지 못한 채 전쟁과 같은 출퇴근을 반복하다 어느날 회사를 그만두고, 호주 이민길에 오른다. 계나는 태어난 나라를 버리고 이민길에 오른 이유를 ‘한국이 싫어서’ 라거나, ‘여기서는 못 살겠어서’ 라고 요약한다. 한국사회에서 자신은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며, 또한 남들이 가는대로 따라가기 보다는 자꾸만 무리를 이탈하는 가젤과 같은 인간형이기 때문이라고.

 

물론 계나가 부모로 부터 물려받을 만한 재산이 있거나, 명문대를 나왔다거나, 빼어난 미모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의 일반적인기준으로 볼 때 여기서 살지못할 만큼 뒤떨어지거나 부적응형의 인간은 아니다. 대기업에 다 떨어지고 아무 데나 넣어 된 회사라고는 하지만 대학 졸업 후 곧바로 취직이 된 운 좋은 케이스이고, 자신을 끔찍히도 좋아해주는 집안 빵빵한 기자 지망생 남자친구도 있었으니 가족이나 친구들이 볼 때, 그녀의 이민은 그저 ‘외국병’에 지나지 않았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계나 정도의 여건만 되어도 소원이 없겠다 할 또래는 이미 한국사회에 차고 넘치게 많지 않은가 말이다.

   

계나는 한국 사회에서 불만족스러웠던 자신의 회사생활에 대해 자신이 무슨 일을 왜 하는지도 모르겠고 이 회사는 뭐 하는 회사인지 모르겠고, 온통 혼란스러웠다(19쪽) 라고 회고 한다. 계나가 일했던 신용카드 승인실은 고객의 거래를 승인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곳으로, 종사자들이 일을 통해 개인적 성취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직업인은 꼭 카드 승인실이 아니더라도 일찍이 찰리 채플린이 영화 <모던 타임즈>에서 연기해 보였듯,  거의 대부분이 거대한 톱니 바퀴의 부속품으로 존재한다.

더많은 생산, 더 더 많은 소비, 그리하여 끝없는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직업인이 톱니바퀴의 한부분으로 이 톱니바퀴가 어디에 끼어있고 이 원이 어떻게 굴러가고 이 큰 수레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그런 걸(19쪽) 알면서 성취감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는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호주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그건 결국 국가가 문제가 아닌 그 국가가 표방하는 경제체계의 문제란 이야기다. 다만, 전국민이 경제, 즉 ‘돈’에만 목표를 두고 고속으로 발전해 온 탓에 한국 사회에서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여유마저도 없다는 것이 계나가 한국을 떠난 이유라면 이유일까.

 

영화 <매드맥스:분노의 도로>에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핵 전쟁으로 황폐화 된 곳에서 물과 기름을 소유하고 인간들을 조종하는 독재자 임모탄 조로 부터 달아나 녹색의 땅을 찾아나선 퓨리오사는 녹색의 땅 마저 이미 황폐했음을 알고, 소금사막을 건너 또다른 낙원을 찾고자 한다. 퓨리오사는 맥스에게 함께 소금사막을 건너가자고 제안하지만 맥스는 이렇게 말한다. 차라리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자고. 소금사막을 건너봤자 거긴 또 어차피 소금사막일테고, 그러느니 차라리 물이 있고 식물이 자라는 처음 시작점으로 돌아가서 임모탄 조를 몰아내고 다시 시작하자고.

영화는 맥스와 퓨리오사 등이 힘을 합해 임모탄 조를 몰아내고 물과 기름을 차지하고 인민을 해방할 것을 예고하며 막을 내리지만, 글쎄? 실제로 그들이 그곳에 낙원을 만들었을지는 보장을 못하겠다. 새로 시작된 세상에도 어떤이는 분명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더 높이, 더 멀리를 주장할 것이고, 그러다보면 새로운 세상은 또다시 개혁해야 할 만한 세상이 되고 말터이니 말이다.

 

도망치지 않고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게 멋있다는 건 나도 아는데… 그래서, 뭐 어떻게 해? 다른 동료 톰슨가젤들이랑 연대해서 사자랑 맞짱이라도 떠?

 

국경을 넘어,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조금 더 자유스러운 곳,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그만한 댓가를 받는 것처럼 보이는 곳, 그러니까 말하자면 소유하느냐로 부터 그나마라도 자유가 보장되는 곳으로 넘어간들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곳 또한 이미 서로가 서로를 치는 경쟁사회이고 보면 말이다. 그 속의 정당한 대가라는 것 역시도 또다른 경쟁이며 전쟁일터이니, 그보다는 절을 아예 중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는 것이 맞는 생각이겠지만, 계나처럼 나도 어쩐지 그쪽으로는 자꾸만 비관적인 생각이 든다. 소금 사막을 건너면 또 소금 사막이 나오고, 또 소금 사막이 나오더라도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덜 절망적이지 않겠느냐 하는 매우 절망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니 달아나고 또 달아나되, 더이상 달아날 수 없다면 영화 <성실한 앨리스>의 ‘수남’이라도 되어  하는 것이 아닐까.

 

무턱대고 욕하진 말아 줘. 내가 태어난 나라라도 싫어할 수는 있는 거잖아. 그게 뭐 그렇게 잘못됐어? ….미국이 싫다는 미국 사람이나 일본이 부끄럽다는 일본 사람한테는 ‘개념 있다’며 고개 끄덕일 사람 꽤 되지 않나?(11쪽)

 

한편 자본주의니, 경쟁사회니, 그에 따른 인간성 회복이니… 이런 거창한 이유말고 계나의 이민이 여타의 다른 이유없는 그저 단순히 외국병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나는 어쩐지 계나의 탈출(?)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이 다른 자본주의 국가보다 유달리 경쟁이 심한 사회라거나, 유난히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문화라는 것은 제쳐두고, 태어난 나라라도 별다른 이유없이 싫을 수 있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에서 말이다. 태어남으로써 자연 취득된 국적에 대해 요즘처럼 맹목적으로 애국심만 강조하는 이 때에 자신이 살 나라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매력적이냐 이 말이다. 물론, 그에 따르는 책임도 분명히 자신의 것이다. 가령, 계나가 호주 시민이 되기 위해 한 노력이나, 생래적으로 주어진 시민권이 아닌만큼 본토인들로부터의 차별을 감수해야 한다거나 하는.

어찌되었든 계나의 이민이 ‘탈출’이 아닌, ‘선택’이 였더라면 그나마라도 희망이 있는 세상이었겠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