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읽다가 불현듯, 세월호에서 스러져갔던 학생들이 생각이 났습니다. 참사 당시 많은 이들이 더 안타까와했던 것은, 그 많은 학생들이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는 것이었습니다. 청소년하면 가지고 있는 일탈, 반항, 탈주, 이런 이미지들이 참사 당시에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채, 그 학생들은 그 곳에서 잘못된 지시에 정확하게 참여하고 그렇게 스러져갔던 것입니다.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청소년에 대한 이미지, ‘젊은이’라는 말 속에 들어있는 고정관념들. 과연 그런 것들이 청년들에 대한 적확한 이해 속에서 나온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청년에 대한 몰이해가 기성세대에 의해 만들어지고 확산되는 현상 속에서, 이미 기성세대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 저의 경우에도 제가 가진 고정관념들을 깨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젊은 사회학자인 후루이치 노리토시가 일본 사회의 ‘젊은이’들에 대해서 쓴 책입니다. 우선 저자의 나이가 흥미롭습니다. 1985년생인데, 아무래도 젊은이가 쓴 ‘젊은이론’이라는 것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의미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젊은이들이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참 힘이 든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어른들의 야유이겠지요. ‘너희도 더 커서 경험해보면 생각이 달라질거야’. 굉장한 폭력이자, 젊은이들의 삶과 선택에 대한 야유라고 할 수 있지요. 젊은이들의 삶이 어른들의 말 한 마디에 무너지는 것. 그러한 현상은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책은 묘하게 계속 우리나라와 일본이 오버랩됩니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한 20년은 앞섰던 나라 – 도쿄 올림픽은 1964년, 서울 올림픽은 1988년 – 일본. 그 일본이 1990년대부터 장기불황에 돌입하여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장기불황의 전초가 보이는 상황에서, 일본의 젊은이들이 닥친 상황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닥친 상황과 엇비슷합니다. 가장 어두운데, 여명이 오리라는 기대는 전혀 되지 않는, 그냥 가장 어두운 그 상황. 젊은이들이 행복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을, 저자는, 젊은이들에게 미래가 없기 때문이라고 단언합니다. 지금 이 상황에 최고의 상황이니까, 젊은이들은 만족하고 있으며, 그래서 젊은이들의 행복지수가 높을 수 밖에 없다는 저자의 상황인식.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불행은 앞으로 10년, 20년 뒤, 지금의 젊은이가 더이상 젊은이가 아니게 된다면 격차로써 드러날 것이라는 저자의 예언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저자는, 20대의 젊은이들은, 프리터 족으로 살던, 번듯한 대기업에 취업을 하던, 큰 격차를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받는 급여는 어쨌든, 프리터 족이든 대기업 신입사원이든 비슷할테니까요. 그러다가… 그들이 20년 더 그런 인생을 지속해가면, 더이상 젊은이가 아닌 시절이 오면, 그 때부터 격차가 벌어지겠지요. 지금의 젊은이들의 불행은, 더이상 그들이 젊은이가 아닐 때에야 비로소 체감할 수 있기 때문에, 현상의 개선은 요원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저자는 일본 인구 ’1억명 모두가 젊은이가 되는 사회’라고 지금을 진단합니다. 기술의 발달이, 정보의 확산이, 젊은이가 선취할 수 있는 것들을 모든 인구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점차로 젊은이가 설 자리는 좁아지고 있습니다. 젊은이가 내세울 수 있는 카드도 점점 축소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습니다. 아니, 우리나라는 일본보다 더 못한 상황이라고 봐야겠지요. 일본이 가진 사회안전망도 제대로 가지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젊은이들은 노인 세대를 부양해야할 몫까지 짊어져야하니까요.

우리나라의 청년들에 대한 이해, 그리고 장년 세대로써 미래세대에 대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책임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이었습니다.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