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코보 | 옮김 김난주
출간일 2001년 11월 10일

모래의 여자

8월의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

 

 한 남자가 사막에 곤충 채집을  하러 떠났다가 실종됐다.  무료한 교사 생활을 하던 중 머리를 식힐 겸 떠난 그는 모래 바람이 가득한 한 마을에 도착했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모래 구덩이 속에 갇히고 만다. 그런데 이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모래를 퍼내는 일을 반복한다. 하루라도 모래를 퍼내지  않으면 마을 전체가 모래로 파묻혀 버리는 곳. 그들의 하루는 모래를 퍼내는 일로 시작해 모래를 나르는 일로 끝나고, 모래를 퍼내는 노동의 댓가로  마을로부터 물과 음식을 비롯해 각종 생필품을 제공받는다. 남자는 왜 이곳에 갇히게 된 것이며 그들은 왜 이런 무의미한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

 

 

이거 봐라, 뭔가  뜻이 있는 거 같지 않냐.

한쪽 모래가 다  떨어지면 끝나는 꼭 우리 사는 거 같으다.

제 아무리 대단한  것두 끝이 있는 법이다.

 

                                                      『모래시계』(SBS  드라마, 김종학, 1995)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김난주 역, 민음사,  2001)는 인간의 허무주의적 삶을 곱씹는다. 한쪽 모래가 다 떨어지고, 뒤집고나면 다시 똑같이 모래가 떨어지는 ‘모래시계’처럼 반복적이고  무의미한 인간의 삶에 대해 절규하는 이야기를 담았다. 모래 구덩이 속에 갇힌 남자는 한 30대 과부인 여자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 마을의 생활에  너무나도 완벽히 순응한 여자는 일어나면 모래를 퍼내고 제공받은 물로 씻고 음식을 차린다. 밥을 먹을 때에는 떨어지는 모래로 인해 모래밥을 먹기  일쑤고 아무리 씻어내고 입안에 모래는 가시지 않는다. 늘 고되고 반복적인 노동에도 여자는 어떤 방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른다. 일생을 그렇게  살았기에.

 

처음에 남자는 끊임없이 도망치려고 한다. 하지만 노동을  중단하자 그들은 제공하던 물을 끊어버리고 만다. 결국 백기를 들고 만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이 모래를 퍼내는 일을 동참할 수밖에  없다. 그러던 어느날 생필품을 제공하기 위한 로프를 매단 양동이가 내려올때 남자는 그것을 붙들고 협상을  시도한다.

 

 ”그야, 나 역시 이  모래를 파내는 일이 부락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생활 문제니까요. 심각하지요. 잘 압니다. 굳이 이렇게 강제적으로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협력할 마음이 생겼을 정돕니다. 정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과연 진정한 협력일까요? 난  의심스럽군요. 달리 적절한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까? 인간에게는 적재적소란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많은 외부 사람들의 검은 속내에  속아왔기에 마음의 문을 굳게 닫은 상황. 이전에도 관광지로 만든다거나 온천을 개발한다는 식으로 접근을 해와 정부 보조금을 가로채려는 수작들이  있었기에 더이상 신뢰하지 않는다. 기관들의 주판알 퉁기는 사이에 부락 전체가 송두리째 모래 속으로 파묻힐 것이기에. 그들에게 모래를 퍼내는  일은, 돈을 떠나 생명과 직결된 일인 것이다. 남자의 말을 적당히 들어주는 척 하고는 긴장을 늦춘 사이에 로프를 올려버린다.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모래를 퍼내는 것쯤, 훈련만 받으면 원숭이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난 좀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인간에게는 자기가 갖고 있는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의무가 있단 말이야.”

 

이후 남자는 모든걸 포기하고 협력하는 척 하면서 그들의  긴장을 누그러뜨린 다음 철저한 계획아래 모래 구덩이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하지만 마을을 빠져 나가기 전에 붙잡히고 만다. 다시 구덩이 속으로  들어온 남자는 또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반복하는 여자를 보며 희망을 잃어버린다. 오히려 여자와 함께 더 열심히 모래를 퍼내면서 시간을 절약해  부업을 통해 원하던 라디오도 구매한다. 실종된 지 7년째에 접어들자 남자는 마을 주민들과 동화되었다. 아니 길들여지고 만 것이다. 남자는 모래  속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유수 장치를 발견한다. 더이상 그들에게 물을 의존하지 않아도 스스로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도주의 마음만 있으면  언제든 가능하지만 남자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는다.

 

 도주 수단은, 그 다음날  생각해도 무방하다.

 

소설은 남자의 ‘실종 신고 최고장’으로 끝을 내린다.

 

남자는 처음에 지루하고 무료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모래의 마을을 찾았다. 그리고 모래 구덩이에 갖히게 되자 다시 일상의 무료함을 그리워했다. 남자는 여자에게 왜 이런 현실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느냐며 한심하게 생각했다. 밖에 나가 걸어보고 다른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지 않느냐며 묻는다. 하지만 여자는 계속해서 걷는 일상에 지쳐 더이상  걷지 않아도 되는 지금의 현실에 안주하게 된 것이다. 여자가 탈출해서 밖으로 나간다고 달라질 것은 무엇인가?

 

우린 늘 ‘안’에서는 ‘밖’을, ‘밖’에서는 ‘안’을  그리면서 살아간다. 인간의 삶은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안과 밖의 구분이 없는 공간임에도 우리는 다른 세계를 꿈꾸느라 바로 여기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다. 소설의 제일 첫 장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소설을 끝까지 읽고 깊이 곱씹어보니  이제야 그 뜻을 제대로 알 것 같다.

 

 

 벌이 없으면, 도망치는 재미도  없다.

『모래의 여자』 (김난주 역, 민음사,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