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 (밀란 쿤데라). 불멸을 향한 욕망의 몸짓.

출간일 2010년 3월 19일

불멸 (밀란 쿤데라)

아베나리우스는 잠시 어색한 침묵을 지키다가 상냥하게 물었다.

“그 소설의 제목은 뭔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아니, 그 제목은 이미 써먹지 않았는가.”

“그래. 써먹었지! 하지만 그때 난 제목을 잘못 달았어. 그 제목은 지금 쓰는 소설에 붙여야 했어.”​

​​ 유난히 더웠던 어느 여름, 집 근처 카페에서 여느때와 같이 아이스 카페라떼를 큰 사이즈로 시켜놓고 홀짝이며 책을 읽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쓰고 있는 소설에 맞는 제목이 떠올랐으나 그 제목은 벌써 자신의 전작에 써버렸다고 한탄하는 작가. ‘이 작가 뭐지?’ 뒷 이야기가 너무 궁금해진 나는 카페라떼 속 얼음이 다 녹아 싱거운 커피가 되어버린지도 모른채 이야기에 집중했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오르한 파묵은 ’소설 쓰기는 독자의 기대와 체스를 두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쿤데라의 소설 쓰기는 독자의 호기심이라는 말을 두고 혼자 두는 체스와 같다. 체스를 두는 사람은 오직 쿤데라 자신 뿐이며 독자는 그가 조정하는 체스판의 말에 불과하다. 체스판에 말들은 독자뿐만 아니라 소설속 주인공들, 그리고 괴테, 헤밍웨이와 같은 죽은 자 위인들까지도 예외가 없다.

 불멸을 향한 욕망의 몸짓.

 쿤데라는 친구인 아베나리우스 교수를 기다리며 수영장을 바라보던 중 한 60대 여인의 몸짓을 바라본다. 그리곤 불현듯 ‘아녜스’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래? 소설의 주인공을 아녜스라고 해야겠다’라며 주인공을 만든다. 아녜스를 중심으로 동생 로라, 남편 폴, 딸 브리지트를 만들어내며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그러던 중 갑자기 괴테가 등장한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유명한 독일의 대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맞다. 괴테를 둘러싼 한 젊은 여성 베티나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괴테와 베티나 사이에 있었던 야화를 드러내며 작가는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써내려 간다.

 밀란 쿤데라의 『불멸』은 소설의 중심부가 없다. 3차원의 뫼비우스띠가 서로 교차되기도 하고 또 반대 지점을 향해 나아가기도 한다. 크게 구분 지으면 세 개의 층으로 구성된다. 가장 바깥쪽에는 쿤데라 자신과 친구 아베나리우스 교수가 소설 안팎을 넘나들며 존재한다. 그들은 소설을 쓰면서 아녜스와 로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책의 마지막에는 소설 속 캐릭터인 폴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쿤데라는 『불멸』을 쓰면서 친구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끊임없이 소설 속 인물들에 대해 대화를 내누고 그의 의견을 반영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한다. 그런 과정들을 소설 속에 하나의 이야기처럼 넣어버린다. 이게 자칫 소설인지 에세이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쿤데라와 아베나리우스 교수의 이야기가 가장 바깥쪽 테두리를 형성한다면 그​ 안쪽에는 아녜스를 중심으로 로라와 폴의 이야기가 존재한다. 쿤데라가 만들어낸 아녜스라는 소설속 여인은 폴과 부부였으나 훗날 아녜스가 죽고나서 폴은 처제 로라와 결혼을 한다. 쿤데라가 말하길 ‘사람은 많되 몸짓은 별로 없다’라고 한다. 그들이 서로 사랑하여 결혼하고 이별하고 다시 결혼하는 과정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내는 단순한 몇가지의 몸짓에 불과하다고 표현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안쪽에는 괴테와 베티나의 사랑 이야기다. 그런데 그게 서로간의 진실된 사랑이었을까? 어찌됐든 소설은 이 세개의 층을 넘나들며 3차원의 뫼비우스띠 속으로 독자들을 가둔다.

 소설의 주제는 ‘불멸‘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다른 불멸, 사후에도 후세의 기억 속에 살아남는 자들의 세속적인 불멸이다. 쿤데라는 ‘불멸’을 ‘작은 불멸’과 ‘큰 불멸’로 다시 구분짓는다.

 불멸 앞에서 사람들은 모두 평등하지 않다. 작은 불멸, 말하자면 생전에 알고 지낸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모리비아 마을의 그 시장이 꿈꾸던 불멸)과 큰 불멸, 즉 생전에 몰랐던 이들의 머릿속에도 남는 어떤 인물에 대한 추억은 구분되어야 한다.  ​

 작은 불멸과 큰 불멸 외에도 우스꽝스러운 불멸에 대해서도 이렇게 정의한다.

 티코 브라헤는 위대한 천문학자였지만, 오늘날에는 프라하 황궁에서 일어난 그 유명한 식사 사건 외에 우리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식사 도중 화장실에 가고 싶은 욕구를 점잖게 참다가 기어이 방광이 터지고 말았는데, 이로써 그 수줍음과 오줌의 순교자는 곧 우스꽝스러운 불멸자들의 일원이 되고 말았다. ​

 베티나는 괴테가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인의 딸이다. 무려 30년 넘는 나이 차이에도 베티나는 괴테라는 커다란 아우라 속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것은 괴테가 나이들어 죽음에 임박할수록 더 강렬해진다. 괴테의 여인이라는 역사속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싶은 불멸에 대한 욕심이다. 베티나는 괴테의 무릎에 앉는 교태를 부리기도 하고 수십통의 편지로 연인 행세를 한다. 하지만 괴테는 그녀의 속셈을 알고 다소 거리를 두려한다. 괴테가 죽고 베티나는 둘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들을 일부 조작하여 『어린 소녀와 괴테의 서간집』을 출간하며 이루고자했던 불멸에 다가간다. 하지만 그녀는 원본 편지를 불태우지 않는 우를 범한다. 훗날에 그녀가 나이들어 죽고 원본 편지가 세상에 드러나면서 그녀가 원했던 불멸은 편지를 조작까지 하며 괴테의 여인으로 불리고 싶어했던 여인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불멸속으로 들어간다. 베티나는 왜 책을 출간하고 나서 원본 편지를 없애버리지 않았을까? 우리는 늘 내일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 어떻게 죽게될지 모르지만 항상 내일이 존재할거라는 믿음에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루다가 정작 실행해야 할 때에는 이루지 못한 것이다.

 ​아녜스와 로라의 자매지만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아녜스는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는 반면 로라는 허영과 허례의식으로 가득차 있다.

 아녜스는 자신의 순수한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자아에서 외적인 것과 빌려온 것을 모두 추려 냈다. 로라의 방법은 정확히 그 반대다. 자신의 자아를 좀 더 잘 보이게 하고, 좀 더 파악하기 쉽게 하고, 좀 더 두텁게 하기 위해서, 그녀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덧붙여 그것에 자기를 동화했다.

​사실 둘의 성격은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나왔다. 수학 교수인 아버지는 조용하고 내적인 성격을 아녜스에게 물려줬고, 로라의 허영심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 하지만 둘은 동시에 폴을 사랑했다. 아녜스와 폴은 결혼한 사이므로 로라가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남자가 그녀에게 금지된 남자라는 것이다.

 아녜스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때 쯤, 쿤데라를 찾아온 아베나리우스 교수.

“자네가 이 풀 속으로 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 내 소설의 여주인공은 마침내 자동차 시동을 걸고 파리행 길에 올랐다네.”

천연덕스럽게 소설의 이야기와 현실을 넘나든다. 이쯤되면 독자는 작가의 시나리오 속에서 놀아나는 체스판 말이 되어 버린다. 독특한 구성이라 해야할까? 난해하다고 해야할까? 그 경계의 모호함에 대해 쿤데라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요즘  사람들은 글로 쓰인 건 무엇이건 모조리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 혹은 만화로 개작하려 하네. 그러나 소설에서 본질적인 건 오직 소설로만 말할 수 있기에, 어떤 형태로 개작하건 각색을 하면 비본질적인것만 남지.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설을 쓸 만큼 미친 작가라면, 그리고 자기 소설을 보호하고 싶다면, 그는 사람들이 각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달리 말해 이야기할 수 없는 방식으로 소설을 써야 한다네.”

 [6부 문자반]에서 새로운 등장 인물이 나올 것임을 아베나리우스 교수와의 대화에서 미리 암시한 쿤데라. 갑자기 등장한 ‘루벤스’는 흐름을 따라가던 중 놓쳐버린 느낌이었다. 왜 루벤스가 등장을 했으며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접목시키려고 하는 지. 자칫 소설의 이야기가 다른데로 새어나가 버릴 때쯤 6부 마지막에 기묘하게 다시 3차원 뫼비우스 띠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대단한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쿤데라, 이 사람은 정말 미쳤다.

 결론을 말하자면 아녜스는 죽는다. 소설 속 여주인공을 죽이는 과정도 기묘하다. 아녜스이 운명에 대한 어떤 암시도 없이 그냥 지나가다 죽는다. 심지어 죽는 장면이 나오기 전에 다른 등장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아녜스가 죽었다는 것을 먼저 알게 된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다. 주인공이 죽었다는 사실을 다른 등장 인물들의 대화로 전해들어야 한다니. 아녜스가 죽고나서 폴을 처제인 로라와 결혼을 하고 딸을 출산한다. 쿤데라는 아베나리우스 교수와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중 가족들과 수영을 하러 온 폴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대화한다. 폴은 쿤데라와 아베나리우스에게 로라와 가족들을 소개한다. 소설의 작가가 소설 속 등장인물을 만나 다른 등장인물들을 소개받고 그들의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 참 쿤데라스럽다.

 한 가지 더. 괴테의 이야기 속에서 괴테가 죽고난 다음 저승에서 헤밍웨이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로 헤밍웨이는 괴테보다 27년 일찍 죽었다. 살아생전 만나지 못했던 두 문학 거장이 죽어서 저승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다. 그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오로지 소설을 마음대로 써내려가는 쿤데라의 펜 속에서. 둘은 서로의 불멸에 대해 옥신각신 한다. 죽고난 다음 세상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떠들어대는 이미지에 큰 관심이 없다고 주장하는 괴테에게 헤밍웨이는 이렇게 몰아세운다.

“정말 당신 말을 그대로 믿고 싶군요. 하지만 이걸 좀 해명해주시지요. 당신의 이미지가 당신과 전혀 무관하다면, 어째서 당신은 생전에 이미지에 그토록 많은 정성을 쏟았지요? 왜 애커만을 집으로 초대했습니까? 왜 『시와 진실』을 썼지요?”

 ”어니스트, 나 역시 당신만큼이나 우스꽝스러웠다는 걸 당신도 인정해주십시오. 자기 이미지에 대한 염려, 그건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미숙함 아니겠습니까. 자기 이미지에 무심하기란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 정도의 무심함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겁니다. 인간은 죽은 뒤에나 그런 걸 알죠. 죽었다고 해서 즉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죽은 후에도 오랜 세월이 필요합니다. 당신은 아직 거기에 이르지 않았어요. 당신은 아직 어른이 아니지요. 한데, 당신은 이제…… 죽은 지 얼마나 됐지요?”

 베티나가 불멸을 조작하다가 우스꽝스러운 불멸의 길로 접어든 것은 사실이나 괴테 또한 불멸의 조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비판한다. 실제로 괴테는 『시와 진실』이라는 자서전을 남김으로써 자신의 인생에 대한 변명을 담았고, 젊은 청년 애커만을 천 번이나 만나면서 『괴테와의 대화』라는 과장되고 조작된 자신의 이미지를 타인의 손으로 기록하게 만든다. 이 또한 죽고나서 진지하고 위대한 불멸로 남고 싶은 문학 거장의 속물 근성이 아닐까?

 독일의 문학의 거장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노벨 문학상을 거머진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쿤데라의 소설 안에서는 펜놀림에 놀아나는 등장인물에 불과했다. 이게 바로 밀란 쿤데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