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을 처음 만나고 그의 이름을 뇌리 속에 각인한 작품이 바로 백탑파 시리즈의 첫 권인 ‘방각본 살인사건’이다. 우연히 어떤 게시판에서 재미있다는 이야기를 읽고 본 그 소설은 한국 팩션에 대한 기대감을 충족시켜주고 작가를 기억하기에 충분했다. 그 후 읽은 그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역시 백탑파 시리즈다.
작가의 소설에 대한 애착을 다룬 것이나 열녀문을 둘러싼 비극을 다룬 소설처럼 이번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이다. 학창시절 박지원하면 언제나 먼저 ‘열하일기’를 연상하고 외웠다. 교과서에서 만난 ‘열하일기’는 다른 글들처럼 시험을 위해 읽어야하는 한 편일 뿐이었다. 주옥같은 글들을 그 당시 시험만을 위해 읽다보니 그 깊이나 느낌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님을 생각하면 약간은 아쉽고 안타깝다. 다행히 지금이라도 새롭게 그 의미를 되새기는 다행이기는 하지만.
‘열하일기’를 생각하게 되면 정조의 문체반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연암 박지원에 대한 글들을 보면 이 여행기가 단순한 의미를 뛰어넘어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다는데 그 책을 읽지 않은 나에게 그 의미나 느낌이 제대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킨 글이란 것과 그 책을 다룬 책을 읽다보면 빨리 그 재미를 느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른다. 한데 그 분량이나 구입가격을 생각하면 조용해지는 현실에 다른 책들로 그 갈증을 조금씩 해소하고는 한다.
시대는 정조 때로 1792년. 정조는 연암의 여행기를 폐관소품으로 치부하고 금서로 정한다. 이미 장안에 베스트셀러이자 많은 이들을 놀라게 한 그 책에 대한 열광적 마니아가 된 사람들에겐 너무 힘든 어명이다. 이들 열하광들은 숨어서 ‘열하일기’를 읽고 토론하고 주해서를 만들려고 한다. 이때 이들을 둘러싼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연속적으로 벌어지는 사건 속에서 단서들과 증인들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다. 그가 주인공이자 화자인 청전 이명방이다. 방각살인과 열녀살인사건을 해결한 탁월한 금부도사이자 전하의 종친이기도 한 그가 사건의 중심에 우뚝 서 있다. 그것도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요즘 같이 정조에 대한 드라마나 책들이 유행한 것을 본 기억이 없다. 시대의 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시점에 이미 몇 편이나 그를 다룬 작가의 작품을 즐긴 나에게 백탑파 시리즈라는 것과 ‘열하일기’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그 유혹에 빠져 수많은 해석과 부딪히며 청전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만나는 ‘열하일기’는 또 다른 매력을 뽐내게 된다. 새롭게 드러난 청전의 연애이야기와 열하광들로 이어지는 살인사건은 정조시대의 시대 분위기와 더불어 긴장감을 준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과 용의자를 쫓는 의금부 도사들과 정조의 어명에 의해 고문체로 만든 자송문을 지어라는 압박에 처한 백탑파 서생들. 이 모든 상황들을 잘 버무려낸 소설이 바로 ‘열하광인’이다.
하지만 수많은 해석을 달아야 하는 단어와 책들과 사람들은 속도감에 부담을 주었고, 약간은 느슨한 범인 찾기는 다른 부분에서 만들어낸 긴장감을 누그러트렸다. 지금 부각되는 정조의 모습이나 나의 기억 속 정조의 모습과 조금은 다른 정조의 모습에 왜 문체반정이란 단어가 만들어지고 사건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내기가 어렵다. 역사소설이 지닌 재미를 맘껏 살려내었다면 추리소설로는 조금 약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왜 그런 결단을 정조가 내렸는지 작가의 명확한 해설이 없다보니 그가 보여준 글들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혹시나 마지막에 이 시리즈가 끝나는 것이 아닌가 고민했는데 작가가 현재진행형이라고 한 말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신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