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년 괴테 나이 스물셋, 청년 괴테는 샤로테를 사랑했다. 그러나 샤로테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었다. 괴테는 샤로테와 더불어 그녀의 약혼자와도 친분을 나누었지만, 샤로테를 향한 열정을 버리기 힘들었다. 한번은 약혼자가 없는 틈을 타 샤로테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16세의 샤로테는 괴테에게 우정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라는 자못 어른스러운 충고를 한다. 이후 괴테는 샤로테와 그녀의 약혼자에게 편지를 남기고 도망치듯 그들을 떠나버린다. 얼마간의 세월이 흐르고 괴테도 알고있는 한 남자가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비관해 권총 자살하였다. 괴테는 이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괴테를 일약 스타로 만들었지만, 베르테르의 자살을 흉내내는 젊은이들이 많아 일부 지역에서는 발간이 금지되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유명인의 자살을 흉내내어 자살을 시도하는 현상을 일컫는 ’베르테르 효과’는 이렇게 유래되었다.

 

학창시절 필독서로 읽었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분명 이룰 수 없는 사랑에 괴로워하는 한 남자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읽어보니, 이는 삶의 공허에 일찍이 절망한 조로 청년의 자살기다.

이제 막 자신을 펼치며 세상을 살아보려는 젊은이치고 베르테르는 좀 많이 늙은 정신력의 소유자이다(그렇기때문에 괴테는 제목에 유독 ’젊은 베르테르’라고 강조한 것이리라!). 그에게는 신나는 일도 재미있는 일도 없으며, 미치게 즐거울 때도 없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것을 자유를 빼앗기고 감옥에 갇히는 일과 같다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자연과 어린이가 있는 천국같은 작은 고장에서 고독을 벗삼아 사색하며, 자기 자신 속에 스스로의 세계를 창조하고자 한다.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꿈꾸던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여신 로테. (베르테르의 정신이 조로증을 앓긴했어도, 그의 육체는 아직 피끓는 청춘이였던 거다!)

로테는 일찍 병사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여덟 동생을 돌보는 천사다. 그녀는 그토록 총명하면서도 그토록 순진하고, 그렇게 꿋꿋하면서도 그같이 마음씨 곱고, 착하고 친절할 뿐 아니라, 정말로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침착한 마음의 여유를 지니고 있다. (32쪽)

 

모든 사랑에 빠지는 연인들이 그렇듯 베르테르 역시 로테의 참모습을 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여인상에 로테를 투영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에게는 이미 약혼자가 있다. 현실적인 삶을 두 다리로 버티기 보다 순수와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그와다르지 않은 고상한 삶을 살고 싶은 베르테르에게 로테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며,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인 것이다.

<그곳>이 <이곳>으로 변해 버리고 나면 결국 모든 것은 전과 마찬가지가 되고 말아. 우리는 여전히 가난과 궁색에 얽매인 몸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영혼은 잃어버린 청량제를 찾아서 허덕이는 것이다.(48쪽) 이루어지는 사랑은 완성이 아니라 끝이다. ‘그곳’은 절대 ‘이곳’이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

‘그곳’을 ‘이곳’으로 받아들 수 있었던 괴테는 샤로테를 떠나 괴테로써의 삶을 살수 있었다. 베르테르 역시 로테를 떠나 현실적인 삶에서 기쁨을 얻고자 했지만, 세속적인 일에 능하지 못한 베르테르로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는 다시 로테에게로 되돌아가 사랑을 구걸한다.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현실 도피처의 역할을 한 것이다.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괴로워하던 베르테르는 이상주의자이지만, 거칠게 말해 현실도피자 또는 사회부적응자, 즉 루저의 다름 아니다.

그렇다면 로테가 베르테르의 사랑을 받아들였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까? 물론 죽지 않았을 것이다. 로테가 현실이 되는 순간 또다른 이상을 찾아야 했을테니까 말이다. 베르테르는 사랑이 아니라 이상의 완성을 위해 자살했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자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늘 궁금하기 마련이다. 도대체 왜, 무엇이 죽을만큼 힘들었을까.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남을 수는 없었던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추측. ‘그만한 일로 죽을꺼라면 나도 진작에 죽었다! ‘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삶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듯, 죽음조차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영원한 질투의 말 일 수 있다. 죽음은 두려움이지만, 평범한 나같은 사람에게도 일정부분 ‘매혹’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