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지의 세계, 첫 번째 시는 ‘멍하면 멍’이다.
작가 낭독회에서 밝혔듯, 다소 어중간한 이 시를 맨 앞에 놓은 이유는
‘망하고 싶어서’였단다.
하지만 ‘종의 기원’에서 말하듯
이 시인은, 그리고 이 시집은 ‘아직 망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 장 한 장 시를 넘기다보면
망하고 싶다던 작가의 말이 얼마나 자신감에 찬 확신에 찬 한 마디였는지 실감할 수 있다.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곳에서 좋은 일이 많았다 이따금 슬픔이
찾아올 때는 숲길을 걸었다 그러나 여기서 그때의 일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건축’ 중에서)
라는 시인의 말처럼
그는 정작 좋았던 그 일을 말하지 않고 싫었던 일을 말함으로써
이를테면 ‘마음이 죽는 일에 대해’, ‘건축이 깨지는 순간에 대해’ 말함으로써
미치도록 치열하게 살아있음을 더욱 강하게 전해주고 있다.
이 시집이, 이 시인이 결코 망할 수 없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