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작년 5월에, 민음사 패밀리 세일 당시에 구매했더랬습니다. 구매한 이유는… 6학년 국어 교과서에 훈민정음과 관련한 글들이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찌아찌아족과 관련한 글도 있고, 유네스코가 지정한 ‘훈민정음언해상’에 대한 설명과 그 상의 제정 까닭을 담은 글도 있습니다. 뉴스 방식으로 외국어 남용 사례를 소개하며 우리말을 바르게 사용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도 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서 한글에 대한 정체성을 강조하는 글은 굉장히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 우리가 당연하게 사용하는 언어인 한글 – 이에 대해서는 조금 뒤에 부연하기로 하죠 – 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부분은 분명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사용하는 한글은,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한 지적 호기심의 발생이라든지, 그에 대한 의문점 등을 가지기 어려운 측면도 있습니다. 이미 잘 쓰고 있는데, 굳이 더 알아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렇다보니, 우리는 한글에 대한 별다른 지식에 대한 필요성이나 호기심 없이 그냥 사용하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는 다양한 글을 통해 그러한 상황을 바꾸어보려고 하는 것이고,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조금 더 넓고 깊게 안 연후에 아이들을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책은 서울대 교수인 김주원 교수의 ‘서울대 인문강의’를 책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강의할 수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들 정도로 자세하고 전문적인 내용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내용들이었습니다. 제가 중요하게, 인상적으로 받아들였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훈민정음’이라는 말의 뜻은 ‘백성을 깨우치는 바른 소리’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훈민정음은 소리는 아닙니다. 말은 아니죠. 글입니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이전에도 우리말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말을 표기할 수 없는 글이 없었던게지요. 그래서 신라 시대, 설총이라는 학자는 이두문을 고안했습니다. 우리말의 발음과 같은 발음이 나는 한자를 씀으로써 우리말을 표기한 것이죠.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자주 드는 예가 하나 있습니다.
I love you. 를 우리는 아이 러브 유라고 말하고 I love you. 라고 쓴다. 이 때 아이 러브 유, 라고 말하는 것은 말이고, 이것을 I love you. 라고 쓰는 것은 글이다. 전 세계적으로 말은 3천여 종류가 있지만, 그 말을 표기할 수 있는 글을 가진 것은 50여 종류 밖에 없다. 만약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마 ‘나는 너를 사랑해’를 나는 너를 사랑해라고 말하고 nanun nourul saranghea. 라고 썼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말은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의 말을 표기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던 것이죠. 훈민정음은 표기수단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말은 이 전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어’와 ‘한글’을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표현합니다.
많은 경우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할 때 한글을 통해서 배운다. (15쪽)
우리는 한국어를 먼저 배웁니다. 그 수단이 되는 것이 한글인 것이죠.
이 책에서는 다루고 있지 않지만,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에 대한 것도 위와 같습니다. 찌아찌아족은 자신들의 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표기할 글이 없으니, 한글을 이용해서 표기하기로 했다는 것이죠. 물론,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용에 대해서는 과장되거나 왜곡된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일단 찌아찌아족의 한글 사용은, 글로써의 한글 사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첨언하자면, 따라서 ‘훈민정음’이라는 명칭 자체도 글로써의 한글을 의미하는 바른 명칭은 아니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입니다. 훈민정음은 소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런 부분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2.
저자는 ‘한어 학습의 백태’라는 소제목으로, 당시 외교에 사용되었던 한어, 즉 명나라에서 사용하던 언어를 당시에 어떻게 익혔는지를 요약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영어라는 언어를 위해서 온 나라가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서 몰입하고 있지만, 조선 초기에는 명나라의 한어는 역관이라고 하는 특수한 계층에서 담당하였습니다. 모두가 그 말을 알 필요는 없었던 것이지요. 국가의 외교를 위해서 한어를 꾸준하게 학습하였던 역관들의 학습 방법, 저자는 그것을 요약하여 주고 있습니다.
1) 외교문서 작성이 가능한 자이면 외국인도, 포로도 중용
2) 외교문서 전문가는 부친상도 제대로 못 마친다
3) 이문(한어) 전문가는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4) 외국어 학습을 위해서는 우리말을 하면 안 된다
5) 외국어 학습은 기숙 학원 식으로
6) 외국어는 외국에서 배워야
7) 북경에는 못 보내니 요동에라도 보내야
8) 한어 학습을 평가하여 상벌을 줌
9) 외국어 공부는 젊을 때 해야
10) 언어만 배울 것이 아니라 교양도 쌓아야
이와 같은 내용 중에, 우리에게 의미있는 부분은 4), 5), 6) 정도가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영어 교육이 명심해야 할 부분인 것이죠. 영어 몰입 교육이 맞느냐. 그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영어 교육이 부질없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필리핀이나 인도 같이 제 1언어로 영어를 사용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영어의 숙달을 위해서는 영어만을 사용할 수 있는 바탕이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살면서 한국어를 사용하면서 한글을 쓰는 우리나라 사람이, 도대체 영어를 그렇게 과도하게 공부할 필요는 있으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영어의 숙달이 가능하느냐는 말이죠. 영어를 쓰고 싶으면,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로 가야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계속 살아야죠. 우리나라에서 영어를 사용할 필요는 극소수입니다. 그 사람들만 숙달해도 될텐데, 우리나라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숙달하기 위해서 영어에 과도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나, 문제는 영어에 숙달된 사람이 많지 않다는 점일 것입니다.
10)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뉘앙스, 라는 말이 있지요. 언어 자체의 것이 아니라, 언어를 둘러싼 환경이나 배경에 대한 것입니다. 결국, 영어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바는, 모두가 영어에 과도하게 몰입하고 있는 상황을 벗어나서, 영어를 제 1언어로 사용하지 않는 나라답게, 평상시에 영어를 쓸 일이 거의 없는 상황에 맞추어, 어느 정도의 영어 교육 정도라면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지금처럼 아이들을 서너시간씩 붙들어두고 수십개의 영어 단어를 외우게 시키고, 실제 언어 생활에서 사용하지도 않는 문법 측면을 가르치느라 아이들을 소모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가벼운 회화, 그리고 영어로 된 책들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환경의 조성 등, 영어의 사용을 실제적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에 대한 측면은 다시 이야기 할 기회가 있겠지요.
3.
이 책은 훈민정음과 관련된 다양한 배경 지식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편집 방법으로 시작하여 간송본과 상주본의 차이 및 의미까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저자는 상주본에 대해서 그렇게 크게 호의적이지는 않습니다. 일단 해례본의 앞 여덟 장이 없을 뿐만 아니라, 낙장도 많은 상태라 완성된 문서로써의 의미는 간송본보다 덜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듯 합니다.
간송본은, 발견 후에 책을 손질하는 과정에서 원본에 대한 손상 – 책의 여백 부분을 잘라내는 – 도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원본의 여백에 다른 책을 필사하기도 한 까닭에 책의 상태가 깔끔하지는 않지만, 책의 빠진 부분은 앞의 두 장 뿐이라, 훈민정음 창제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는 듯 합니다.
빠진 책 앞 두 장을,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여 보사 – 메꾸어 넣는 – 과정을 거쳐 조악하게나마 원형을 가진 것이 간송본이라는 설명도 빼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상주본이 지금 이권 다툼에 휘말려서 그 위치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그 아쉬움이 크지만, 저자는 간송본에 큰 의미가 있음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있습니다.
4.
책에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훈민정음 해례본에 기록된 훈민정음의 창제 원리와 그 운용 원리 부분은 두고두고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부분입니다.
5.
훈민정음은 세종대왕 단독의 작업일 것이라는 추측을 저자는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의 공동작업, 또는 집현전 학사들의 작업을 세종대왕이 독려했을 것이라는 의견이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세간의 인식이었지만, 저자의 주장 및 여러 주장들을 통하여, 현재는 세종대왕이 단독으로 구상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집현전 학사들이 그 사용을 테스트하였을 – 용비어천가, 삼강행실도 등의 편찬 – 것이라는 의견이 주류로 떠오르고 있는 듯 합니다.
아무래도 우리에게는, ‘숟가락 하나 얹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너무 크게 자리잡고 있는가봅니다. 세종대왕은 중국의 다양한 언어학, 철학 책을 통하여 세계의 이치와 언어 사용의 원리를 훈민정음 속에 담았다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부분을 분석하여, 저자는 훈민정음을 세종대왕의 주도도 아니고, 단독으로 구상하여 창제하였을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종대왕이 세째 아들이면서도 왕위에 오른 상황, 그 아버지인 태종이 거쳤던 왕권 투쟁 상황을 언급하면서, 대군의 세째 아들로 그냥 공부나 하면서 지냈을 수도 있는 왕족 한 사람이, 왕이 됨으로써 훈민정음이라는 글자 체계를 만든 것에 대한 안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역사는 위대한 한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위대한 한 사람이 현재의 삶에 기여하는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은 저자의 표현대로,
훈민정음이 탄생하던 시대의 전후 사정을 독자들과 공유
하면서
(1) 시대의 요구에 의하여, (2) 하늘이 내린 성인이자, 밤낮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세종 임금이, (3) 때마침 이루어진 송의 성리학을 받아들여 (4) 당대의 언어를 철저히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하여 새로운 글자를 창제하고 (5)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6)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나누어 (268쪽)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늘상 사용하는 한국어, 그리고 한글에 대한 지식을 넓히면서, 우리의 언어 생활에 대한 자긍심과 우리의 언어를 조금 더 유의미하게 사용하려는 마음가짐을 위해서라도, 이 책은 한 번쯤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조금 난해한 부분은 적당히 넘어가면서 말이죠.
아에드 인 마이오렘 델 글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