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 다가오는 것에 공포를 느끼면서 삶에 회의를 느끼고, 깨달음을 얻는 흐름으로 진행되는 이야기. 이반 일리치라는 캐릭터에 톨스토이(작가 본인)이 많이 투영되어있음을 작품해설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죽음이라는 불가피한 과정 혹은 상태에 대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탐구했단 것을 알 수 있었다.
죽음에 대한 긍정이 삶에 대한 긍정으로 변모하는 순간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작품에서 일관되게 제기되는 ‘왜 죽어야 하나’에 대한 물음에 근본적으로 공감을 할 수가 없었다. 삶이 영원하다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까? 그것이야말로 지옥이지 않을까?
톨스토이는 문명화된 삶에 대한 회의와 반성, 자연적 삶과 인간적 감각/감정의 회복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으로부터의 해방을 확인한다. 나는 이 이원적(삶/죽음, 문명/자연)이기도 다원적(인간의 다양한 감정 회복과 삶과 죽음의 중첩 등)이기도 한 톨스토이의 생각이 그의 경제적 지위와 위치로부터 기인했다고 본다.
성과와 숫자로 대변되는 문명화된 삶이 비도덕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의 경험을 가져다 준 것 자체가 톨스토이가 상류층에 속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문명화된 삶이 가져다주는 부와 권위, 편의를 경험하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선과 도덕은 어떻게 정의 내려지는가는 다른 문제이지 않을까 생각했다. 막말로, 톨스토이가 지난한 가난의 고통 끝에 끔찍한 병을 앓게 되었을 때, 그가 반추하는 ‘삶’과 ‘죽음’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도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톨스토이가 대문호로서의 명성을 가지게 된 이유를 알게끔 해준다. ’죽음이 끝났다’는 결말은 정말 인상적이다. 죽음에 대해 사유하며 삶을 회고하는 과정 자체를 죽음에 빗댄 게 인상적이었어. 죽음에 이르렀으니, 죽음이라는 ‘과정’은 마무리가 된 것이다. 아들과 아내의 얼굴을 다시 보고, 타인에 대한 사랑을 깨달으며 죽었으니 그렇게 두려워 하던 헛된 죽음은 아니게 된 것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