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히비스커스

#우리는모두페미니스트가되어야합니다 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 작가는 나이지리아 출신의 흑인 여성 작가다. 소수성이라는 소수성은 다 가지고 있는, 생소한 국가에서 온 이 작가의 글은, 소수성과 낯섦을 지녔음에도 인류 공통의 보편성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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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 크게 성공하여 굉장히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지만, 너무나 엄격한 카톨릭 신자이자 통제광, 가부장 그 자체인, 요즘말로 집착광공인 아버지 유진과 그 아래에서 한평생 가스라이팅 당하며 살아온 어머니와 오빠 자자, 그리고 캄빌리. 이 소설은 캄빌리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일종의 성장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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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뭐 한 유교 하는 집안에서 자라서-명절날 제사 후 남자 여자는 겸상하여 밥먹지 않으며 아침 7시 자정 전후로 명절 당일 차례를 두 번이나 지내는데다 끝내주는 효자들인 아버지와 아버지 형제들 – 가부장 사회에 대한 반감 어디서 지지않는 편인데, 나이지리아에 사는 캄빌리는 여기에 종교를 곁들인. 저 멀리 지구 반대편 나이지리아에서 벌어지는 일이지만 바깥에서 존경받고 좋는 사람인 아버지가 집안에선 폭군이 되는 서사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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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래 아이들처럼 웃지도 떠들지도 않고, 아버지가 정해놓은 시간표대로 순종하며 그저 기도하고 공부하고 식사하고 잠들던 생활을 하던 자자와 캄빌리로부터 아버지와 종교에 대한 권위를 무너뜨린 계기가 된 건 이페오마 고모. 자자와 캄빌리가 이페오마 고모 및 그녀의 자식들과 함께 은수카에 머물면서부터다. 그들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안타깝고 애처로운 한편 즐거우면서 행복하기도 했다. 그들은 어디에서든 잘 살아나갈 것이다. 극복해낼 것이다. 은수카의 이페오마 고모네 집 한켠에 피어있던 보라색 히비스커스가 그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P.027

어머니가 방을 나가고 나서 침대에 누워 과거를, 오빠와 어머니와 내가 입술보다 마음으로 이야기할 때가 더 많았던 세월을 샅샅이 훑어 보았다. 은수카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든 것이 은수카에서 시작됐다. 이페오마 고모의 은수카 집 베란다 앞에 있는 작은 정원이 침묵을 밀어 내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게 오빠의 반항은 이페오마 고모의 실험적인 보라색 히비스커스처럼 느껴졌다. 희귀하고 향기로우며 자유라는 함의를 품은. 쿠데타 이후에 정부광장에서 녹색 잎을 흔들던 군중이 외친 것과는 다른 종류의 자유. 원하는 것이 될, 원하는 것을 할 자유.

하지만 내 기억은 은수카에서 시작되지 않았다. 그 전, 우리 앞마당의 모든 히비스커스꽃이 눈부시게 선명한 빨간색이었을 때에서 시작되었다.

P.071

하마탄의 먼지바람이 12월과 함께 왔다. 그것은 사하라 사막과 크리스마스의 향기를 가져왔고, 플루메리아 나무의 가느다란 달걀형 잎과 목마황 나무의 바늘 같은 잎을 잡아 뜯었으며, 모든것을 얇은 갈색 막으로 덮었다.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고향에서 보냈다. 버라니카 수녀는 그것을 이보족의 민족 대이동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단어를 혀끝까지 굴려 보내는 아일랜드식 악센트로 이렇게 말했다. 왜 수많은 이보족 사람들은 고향에 거대한 저택을 지어서 12월에 일이 주밖에 안 쓰고 나머지는 일 년 내내 도시의 좁아터진 집에서 사는 것으로 만족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버라니카 수녀가 왜 굳이 이해하려 하는지 의아할 때가 많았다. 그냥 원래 그런 것일 뿐인데.

P.152

나는 내 접시에 담긴 졸로프 밥과 튀긴 플랜틴과 닭 다리 반 개를 내려다보면서 집중하려, 음식을 내려보내려 애썼다. 접시도 짝짝이였다. 치마와 오비오라는 플라스틱 접시였고 나머지 사람은 귀여운 꽃무늬나 은줄 따위는 없는 평범한 유리 접시였다. 웃음소리가 내 머리 위를 떠다녔다. 대개 대답을 구하지도 않고 얻지도 못하는 말들이 모두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우리 집에서는. 특히 우리 집 식탁에서는 항상 목적 있는 말만 했지만 사촌들은 그냥 말하고 말하고 또 말하는 것 같았다.

P.193

“오빠가 고모한테 손가락 얘기 했어?” 내가 물었다. 묻지 말았어야 했다. 내버려 뒀어야 했다. 하지만 어찌라, 이미 뱉어 버린 것을. 내 목구멍 속의 공기 방울이 내가 말하는 걸 방해하지 않을 때는 오빠랑 단둘이 있을 때뿐이었다.

“고모가 물어보길래 말했어.” 오빠는 활기찬 박자에 맞춰 발로 베란다 바닥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내 손을,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바짝 깎아 주던 짧은 손톱을 처다봤다. 아버지는 나를 다리 사이에 앉혀 놓고 뺨을 내 뺨에 비비면서,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나이가 될 때까지 손톱을 깎아줬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손톱을 바짝 깎았다. 오빠는 우리가 절대 말하지 않는다는 걸, 우리가 절대 말하지 않는 게 너무나 많다는 걸 잊어버렸나? 사람들이 물으면 오빠는 늘 집에서 있었던 “어떤 일” 때문에 손가락이 그렇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 거짓말하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사고를, 아마 무거운 문에 의한 사고를상상하게 만들 수 있었다. 나는 오빠한테 왜 이페오마 고모에게 말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필요가 없음을, 오빠 자신도 그 대답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P.358

한번은 이렇게 썼다. 우리가민주주의를 몇 번 시도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에 민주 정치를 못할거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민주 국가들은 처음부터 잘했던 것처럼. 그것은 걸음마를 떼려다 엉덩방아를 찧는 아기에게 가만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다. 마치 그 아기를 앞질러 가는 어른들은 기어 다녔던 시절이 없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