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be kind each other

이반 일리치는 살면서 삶의 외적인 모습, 즉 남들에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 여기고 그러한 것들이 충족되면 만족감을 느꼈습니다. 따라서 가족에게 받는 애정도 ‘아버지’인 그의 존재 자체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많은 연봉을 받는 잘나가는 판사에게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을 앞둔, 더 이상 창창한 미래가 기대되지 않는 그에게 남은 것은 연금을 걱정하는 아내와 자신의 혼담이 깨질까 걱정하는 아름다운 딸이었습니다.

 결국 침대에 누워 죽어가던 이반 일리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픈 아이를 보듯 그를 가엾게 여기고, 아픈 그를 위해 울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위로가 되어준 존재는 하인 게라심과 그의 어린 아들이었습니다. 이반 일리치는 자신을 돕는 게라심의 태도에서

‘제가 수고를 무릅쓰고 도와드리는 것은 죽어 가는 사람을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제가 아플 때 다른

누군가가 저에게 같은 일을 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1]

라는 뜻을 읽어냅니다. 죽음이 자신의 삶에 찾아올 것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는 ‘위선’없는 게라심의 태도에 이반은 위로받습니다. 죽음을 맞이할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반을 그토록 외롭게 했던 것은 그에게 찾아온 죽음이 오로지 그의 것이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주변 사람들의 태도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손을 잡고 엉엉 우는 아들의 곁에서 그는 광명을 발견합니다. 아내와 가족들을 불쌍히 여기게 되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함께 해 주는 존재가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찾아올 수 있는 가장 큰 절망은 죽음입니다. 더 좋은 미래가 오지 않는다는, 더 이상 남은 내일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은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분 짓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죽음에 대해 알고 있지만 애써 그 존재를 무시합니다. 분명 어느 순간 삶에 도래할 것은 분명하지만, 지금 당장의 자신과는 관계가 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진정으로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삶에 대해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