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지옥에서 온 바이러스

바이러스가 퍼져 모두가 죽어가는 세상. 도리의 부모는 미소를 지킬 것을 부탁하며 죽는다.

도리는 티켓을 훔쳐 러시아 울란우데로 간다.

우리는 어디로 가?

우리는…… 여름을 찾아서.

여름은 어디에 있는데?

나는 손가락으로 태양을 가리켰다.

저기, 해가 지는 곳에.

24p

도리와 미소는 황폐한 마을을 떠돌며 생존해 나갔다. 한 건물에 들어가 쉬고 있는데 밖에서 들어온 지나와 마주친다. 조용히 바라보는 도리에게 지나는 손을 내민다. “나랑 같이 가자.” 지나는 도리와 미소를 데려가기 위해 아빠를 설득하며 갈등을 겪는다. 지나가 이전에도 남자아이 건지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사람이 늘어나는 만큼 식량이 줄어들었기에 각자의 몫을 해야 했다.

결국 도리와 미소는 이들과 함께하게 되고 탑차를 타고 계속해서 이동한다. 목적지도 없다. 그저 사람들을 피해서, 물건을 구하기 위해 이동했다. 지나는 매일 립스틱을 발랐다. 도리는 그런 지나를 신기하게 본다.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나였다. 재앙 앞에서 둘의 모습은 달랐다. 도리는 급급하게 살아갔지만, 지나는 하루하루를 소중히 살았다. 도리는 지나가 되고 싶었다. 단 하루를 살더라도 평생처럼 살고 싶었다. 도리는 지나에게 입을 맞춘다.

모든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 살아남는 것도, 도망치는 것도 결국 너도 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다 한 사람 아니냐 하는 의미였다. 그래도 도리는 한 편으로 희망을 갖는다. “죽음이나 삶이 무엇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 적어도 그것을 어떤 잘못이나 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다.”(37p) 어른들은 유머감각을 잃었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도리는 눈칫밥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지나의 사촌들은 도리를 성폭행하려 했고, 저항하는 그녀를 건지가 도와준다. 도리는 이들을 죽이고 도망간다. 도리는 도와주며 같이 도망가자는 지나의 말을 거절하고 건지와도 헤어진다. 소란이 있은 후에 지나의 아버지는 도리를 욕한다. 평소에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사람 수가 줄어들었기에 더더욱. 지나 아버지에겐 성폭행 따위가 중요하지 않았다.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건 인간들이다. 도리의 아버지는 강도에게 당해서 죽었던 것이었다.

해림을 바이러스로 잃고, 해민과 함께 도망친 류와 단. 단은 유럽에 생존자를 위한 시스템이 있을 거라 믿었다. 계속해서 가다 보면 새로운 세계가 있을 것이고, 그곳에 해림의 무덤을 만들고 싶었다. 류는 그런 단을 천국을 주장하는 종교인처럼 생각했다. 나름대로 잘 살아왔다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이미 악마야”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들은 악마였다. 그 품에서 천사 같은 해민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둘은 길가에서 만난 도리와 미소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다시 먼 세계로 떠난다.

지켜야 한다. 사람이 무엇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 집엔 언제 가느냐고 해민이 또 묻는다면 대답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설명해야 한다. 미루는 삶은 끝났다.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100p

종말의 세계에서 각자 지켜야 할 것이 존재했다. 그것은 저마다 달랐지만 하나로 묶일 수 있었다.

계속된 여정과 전투로 인해 지나의 무리는 죽어나갔다. 도시를 발견하지만 쉽게 다가갈 수 없었고, 주변을 지나가다 도시 세력에게 발견되어 잡힌다. 지나는 성폭행을 당하고 도시로 끌려간다. 총을 든 사람들은 포로들을 쉽게 쏴 죽였다. 건물에서는 포로들을 억지로 먹이고 노동을 시키며 여자들은 가둬놓고 성폭행을 했다. 그런 생활 속에서 지나는 기억이 사라지고 감정도 무뎌졌다. 그 절망 속에서도 도리를 생각하며 생각을 돌이키려 한다.

어느 날 지나의 아버지는 지나를 구하러 온다. 무장 단체들끼리 세력 다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응해야지. 마음 단단히 먹고. 내가 힘을 갖게 되면 널 빼낼 수 있어. 넌 공주처럼 살게 될 거다. 우리에게도 집이 생길 거야. 널 위해 온갖 흉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내고 있어. 난 인정받을 거다.” (141p)

인간은 그런 종족이다. 사명감이나 책임감 같은 이상한 감정이 탑재되어 있다. 세상이 이렇게 망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며 고군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에는 이 재앙을 살인과 광기의 축제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내게는 책임감도 광기도 있다. 그 두 가지가 전혀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124p

건지는 지나를 사랑했다. 가족에 의해 죽을 뻔한 자신을 살려준 권지나를. 그녀는 인간에 대한 다른 세계를 보여주었다. 건지는 혼자 생활하면서 생존하는 방법을 익힌다. 누나들과 같이 지낼 때를 생각하며 그들의 방식을 따라했다. 도리와 미소는 지도를 찾으며 밤에만 움직였다. 그러다 류 일행을 만나는데, 이들은 모두 잡히게 되고 성당에 갇힌다. 류는 이 절망의 세계에서 서로를 감싸는 모습을 본다. 절망 속에서도 맞잡을 손이 있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것을 느낀다.

굉음이 터지고 성당문이 열렸다. 도리와 지나는 류에게 같이 탈출하자고 하지만 류는 꼭 단을 찾으러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해민을 두 자매에게 맡기고, 그들이 뛰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그들은 다시 만자나는 약속을 하지 못했고,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갔다.

내가 내린 결론은, 우리가 망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진짜 망한 게 아니야.

진짜 망하는 건 뭐야?

망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거.

……. 유령처럼?

응. 망해야 할 순간에 망하지도 못하는 유령.

187p

망했다는 건, 끝이 났다는 건 일말의 희망 혹은 지켜야 할 것이 있었다는 말이 아닐까. 희망을 갖는다는 것,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망했다는 생각조차 못하는 삶이란 유령 같은 삶이 아닐까. 삶의 의미를 잃은 채 그저 떠다니는 인간들.


인간이란 무엇인가.

한 사람을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이 힘들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 된다는 말이 있지 않나. 그렇다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선 인류를 재앙에 빠뜨리면 될 것이다. <해가지는 곳으로>에선 역시나, 비관적인 세계에서 인간의 사랑을 논하는 최진영 유니버스가 펼쳐진다. 이 공간에서 인간들이란 비관적으로 현실적이다. 재앙의 상황에선 그 누구의 인권도 지켜지지 않으며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수많은 일들이 펼쳐진다. 희망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꿈꾸는 처량함을, 절망을 배워가는 아이의 시선으로 전달한다.

사랑은 사랑이라 규정하지 않아도 비슷한 모습으로 떠오른다. 어렴풋이 경계 지어지는 사랑, 도리는 그것에 입을 맞췄다. 지나의 사랑은 절망적이었던 도리에게, 건지에게 스며들었다. 그렇다면 바이러스란 무엇이라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바이러스가 될 수 있을까? 아니, 바이러스가 사랑이 될 수 있을까.

미소의 ‘좋은 건 영원하지 않다’라는 말은 지나가 말했던’이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당에서조차 기적을 바랐던 이들에겐 놓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 절망의 시대의 기적은 사랑이 아닐까. 우리는 그 기적을 꿈꾸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최진영은 아픔으로 어른에 다가간다 말한다. 아픔의 과정에서 덜 중요한 것과 더 중요한 것을 구분하는 것. 절망의 시기에서 더 중요한 것을 찾아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것.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 답을 내려가는 것. 우린 어른이 되었을까?

인간을 아득한 심해에 집어넣으면 무엇이 떠오를까. 해가 지고 나면 사람들은 불을 피우며 온기를 나눌까.

언젠가 인류가 멸망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갈 그날에도 사람들은, 당신은, 우리는 사랑을 할 것이다. 아주 많은 이들이 남긴 사랑의 말은 고요해진 지구를 유령처럼 떠돌 것이다. 사랑은 남는다. 사라지고 사라져도 여기 있을 우주처럼. 2017년 여름, 최진영

19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