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

논문보다는 쉬운 글이지만 어려운 개념이 많아서 개념화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다. 쉽게 읽을 수 있는 글들은 아니다. 흥미롭게 읽었던 건 이우창의 「”20대 남자”문제」, 「밀레니얼은 다 똑같아?」, 「미래세대의 눈물과 함께」.

정년 연장과 청년 실업이 동시에 거론되고 있는 이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린다면, 더욱이 청년층의 백수화는 가속화될 것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386 세대의 양보만이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면 청년층의 역할은 과연 무엇일까? 애초에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에 반하는 ‘양보’의 개념에 문제 해결을 기대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를 생각하면 속이 답답해진다. 너무 늦었다는 말을 인정하기 어려운 걸지도 모른다. 기후위기를 몰랐던 때처럼 평범하게 살아가고 싶었다는 말이 너무 공감갔다. 하지만 주어진 현실을 언제까지고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더는 평범하게 살 수 없다. 내가 포기해야만 하는 것, 포기할 수 있는 것, 포기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유난일지도 모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사회의 흐름에 개인이 얼마나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어차피 곧 죽을 거라면 ‘욜로’라는 패배주의가 만연한 사회 속에서 어른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는 의견이 얼마나 공감을 받을 수 있을까. 착잡하다. 그러나 정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유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진정한 악은 사유하지 않는 것이라는 한나 아렌트의 말은 기후위기적 측면에서도 통용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