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산뜻하다, 는 형용사는 어떤 감각을 담고 있을까. 산뜻하다는 말의 반대편에 있는 형용사들을 떠올려보자. 끈적하다, 더럽다, 무겁다, 답답하다. 어떠한 감각의 과잉의 순간의 반대편에서 우리는 산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인식되는 감각인 셈이다. 이렇듯 산뜻하다는 말은 부재(不在)함에 대한 감각이다.
그러나 ‘자극-감각-인지’로 이어지는 인간의 인지 체계에서 감각은 본디 어떠한 존재로 인한 자극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존재가 없이 우리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을까. 무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인지되기 위해선 그 전에 어떠한 감각이 선행되어야 할까.
<몸과 마음을 산뜻하게>는 이러한 부재에 대한 인간의 감각을 탐구한다. 누군가의 부재로 인한 죽음과 애도를 담은 기존 시들의 세계를 넘어, 정재율은 부재 그 자체를 감각하는 언어를 모색한다. 지금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먼저 앞서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나의 발을 가져다 대 보”(‘끝과 시작’)을 함께 따라가본다.

#2.

존재하지 않는다, 는 감각은 존재하는 것을 감각해본 자들만이 느낄 수 있다.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것들 앞에서 우리는 ”유실에 대해 생각해 본”(‘고해성사’)다. 부재를 감각하는 것은 유실(遺失)을 감각하는 것이다.
있었던 것의 부재를 감각하는 것은 흑백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를 통해 더욱 두드러진다. “흑백이 된 나는/ 색이 있는 널 사랑해야 하”(‘프랑스 영화처럼’), 해변을 걸으며 너와 “다음 신에서 만나”는 순간을 준비하기 위해 주웠던 조약돌도 “모두 다 흑백이었다”(‘영화와 해변’). 컬러영화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흑백영화는 그 자체로 완전한, 어느 것도 부재하지 않다. 영화 속에서 색채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흑백영화 속 부재하는 색채의 감각을 인지할 수 있다. “본 적 없는 눈이 가장 깨끗하다고 믿는 것처럼”(‘축복받은 집’) 경험하지 못한 것으로부터는 부재함을 감각할 수 없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부재의 감각이 더욱 강력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람의 존재를 경험했기에, 그 사람의 부재도 감각할 수 있다. 우리가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을 기억하기 위해 물건을 태웠”(‘축복받은 집-숲’)던 이유도 이 때문일지 모른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지금 우리에게 존재하는 것보다 과거에 존재했지만 지금은 부재한 것들은 우리에게 더 강렬한 감각으로 다가오니까.
부재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소리가 언제나 존재하는 비(非)청각장애인의 세계에서는 “순간 주위가 너무 조용해”지는 것만으로 “세계는 잠시 지구 종말 같”은 두려움을 선사한다(‘개기일식’). 우리가 이미 소리의 존재를 경험했기에, 그 부재가 더 두렵게 다가온다. 하지만 청각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한 이들에게 이 순간은 어떻게 다가올까. 청각을 경험했지만 후천적으로 이 부재를 평생 감각해야만 하는 이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그 부재를 인정하며 살아갈까.

#3.

부재의 감각에 대한 정재율의 탐구는 인간을 넘어 비인간동물들의 감각으로 확장된다.
“맹목적으로 우두머리를 따라가다가 그대로 바다에 빠져죽게 되는” 집단자살로 잘 알려진 동물 레밍은 비이성적인 군중심리를 비유하기 위한 수단으로 빈번히 인용된다. 하지만 정재율은 이러한 레밍의 행위를 인간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고, 슬픔과 부재를 끌어안는 그들 종(種)만의 방식으로 바라본다. 그들의 행위는 어쩌면 “남겨진 레밍들이 죽은 레밍의 몫까지 열심히 땅을 파는 것처럼” “모두가 한꺼번에 슬픔을 나누면/ 그건 그거대로 슬프지 않”게 된다. 그들의 행위는 결국 부재의 슬픔을 나누기 위한 하나의 리추얼(ritual)인 셈이다. 그들의 행위를 통해 정재율은 질문한다. “함께 슬픔을 나누려면 몇 명이나 필요하지”라고. (‘축복받은 집-레밍’)
펭귄 중에는 “걷다가 뛰다가 날다가 (…) 떨어져서 죽은/ 펭귄의 뼈를 모아// 둥지를 만드는 녀석도 있다”고 한다. 죽은 이를 매장하거나 화장해서 시체를 보존하는 것이 익숙한 인간에게 다른 재료로 유골을 활용하는 것은 상당히 불쾌하게 느껴진다. 무리에서 죽은 동물의 사체를 먹는 일부 종들의 행위도 그러하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부재하는 그들을 항상 곁에 두면서 “우리가 다시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일지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지금은 부재하지만 한때 “사랑했던 것을 조금 남기는 기분으로” 함께하는 이들의 “어깨를 두 손으로 감싸”안는다. (’0′) 그렇게 그들은 부재를 감각한다. 인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