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다, 유익하다, 어렵다 등의 일반적인 표현으로는 이 소설을 감히 설명해낼 수가 없다. 무질서한 전개, 주인공의 의미모를 행동, 그리고 미루어 짐작컨대 한국어, 한국문학의 특성과 다른, 이질적이고 낯섬도 이 소설의 난해함을 더 높였으리라.

작가 페터 한트케의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47세대는 독일이 일으킨 전범 행위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조금의 거짓도 없이 있는 그대로인 작품 활동을 했는데 이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페터 한트케다. 일반적인 문학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유려함은 물론, 우리가 문학에서 기대하는 기본적인 서사 구조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읽으면서 약간의 분노와 짜증이 느껴질 수 있으니 주의하길. 그래도 그의 작품 중에서도 이 소설이 그나마도 덜 실험적인, 내용이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100페이지에 걸쳐 주인공의 블로흐의 불안을 설명하고 있다. 솔직히 그의 불안은 한 페이지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100페이지에 걸쳐 설명되고 있는 그의 불안을 통해 블로흐라는 주인공은 ‘도구’일 뿐이고 그를 설명하고자 하는 ‘언어’가 주인공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예전에 유명한 골키퍼였던 주인공 요제프 블로흐는 건축공사장에서 조립공으로 일하던 중 조금 늦게 출근한 자신을 흘끗 쳐다보는 현장감독의 눈빛을 해고통지로 짐작하고 작업장을 바로 떠난다. 그리고 실직자의 상태로 정처없이 방황하던 중 극장의 매표원 아가씨와 하룻밤을 보내고 그녀와의 대화에서 불쾌함을 느끼던 중 “오늘 일하러 가지 않으세요?”라는 말에 살해해버린다. 교외로 도주한 블로흐는 경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어떤 신호일 것이라며 강박에 시달린다. 그가 겪는 해고, 그가 저지른 살인, 충동적인 싸움 등이 아닌 블로흐의 말장난, 불안, 소외 등이 이 소설을 이끌어 나가는 중요한 요소이다. 함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함정같은 문장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블로흐가 축구경기를 관람하며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골키퍼가 키커를 잘 안다면 어느 방향으로 공을 찰 것인지 짐작할 수 있죠. 그러나 페널티킥을 차는 선수도 골키퍼의 생각을 계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골키퍼는 오늘은 다른 방향으로 공이 오리라고 다시 생각합니다. 그러나 키커도 골키퍼와 똑같이 생각을 해서 원래 방향대로 차야겠다고 마음을 바꿔 먹겠죠? 이어 계속해서, 또 계속해서..(P120)’의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골키퍼가 가질 수 있는 강박을 블로흐는 일상 생활속에서도 병처럼 앓고 있다. 소설 중에는 이렇게 지도에서 사용되는 기호들을 나열해 블로흐의 강박이 극에 달했음을 표현하기도 했다.

 누군가를 흘끗 쳐다봄으로 해고하는 일도 없거니와 누군가 화나는 말은 한다고 해서 다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이 소설의 블로흐를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닌 듯하다. 나에게는 조금 어려웠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완독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