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나, 배신, 키치

독서모임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재룡 역, 민음사, 이하 <참존가>) 읽었음. 여기서는 사비나와 ‘배신’을 중심으로 한 내 감상만 대략 정리해서 남겨 둘 것임. 책 전체의 줄거리를 요약하지는 않겠음. 왜냐하면…. <참존가>에는 토마시, 테레자, 사비나, 프란츠라는 네 인물을 중심으로 ‘가벼움’과 ‘무거움’, ‘육체’와 ‘영혼’, ‘상승’과 ‘추락’, ‘우연’과 ‘운명’, ‘상승’과 ‘추락’, ‘영원’, ‘키치’ 등(헉헉;) 수많은 키워드가 교차하고, 그게 ‘모순’이라는 틀거리 안에서 뒤섞여 있는데, 그걸 다 정리하자면 한 3박 4일은 걸릴 것 같고, 그러면 워드프로세서 기본 설정으로 못해도 18 페이지 분량은 될 것 같고, 심지어 그렇게 작업해 봤자 내가 다시(그리고 다른 누군가가 굳이) 읽을 것 같지도 않음. (…)

    다른 사람들의 <참존가> 후기들을 읽어 보면 대체로 사비나를 토마시와 함께 ‘가벼움’의 범주로 두는 경우가 많음. 하지만 나한테 있어서 사비나를 대표하는 키워드는 ‘배신’임. 배신이라고 하면 일단 비열하고, 사익을 위해 남의 뒷통수를 치는 이미지랑 연결되는데, 그건 그닥 사비나한테 착 들어맞지 않음. 일단 배신을 통해 그이가 취득하는 이익은 단 하나도 없음. 좀 느끼하게 쓰자면 사비나는 그이를 둘러싼 세계를 배신하고, 배신은 사비나를 세계로부터 구출하는 것. 사비나가 몸부림치며 벗어나려 하는 것은 ‘키치’이고, 키치는 개인이 맞서기에 너무 강력하며, 배신은 현실 세계에서 그이가 취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생존법이라고 봐야 함. 사비나를 굳이 가벼움으로 이해하려면, 키치가 지닌 끔찍할 만큼 무거움을 충분히 염두에 둬야 한다고 생각함.

그것이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 …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 (p.398-399)

키치는 인간들의 기억 속에 깊이 뿌리내린 핵심 이미지에 호소한다. 배은망덕한 딸, 버림받은 아버지, 잔디밭 위를 뛰어가는 어린아이, 배신당한 조국, 첫사랑의 추억 … 잔디밭을 뛰어가는 어린아이를 보고 모든 인류와 더불어 감동하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 모든 인간 사이의 유대감은 오로지 이 키치 위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p.404-405)

    아니 대체 세계관 디폴트를 무슨 수로 이기냐고요… 그건 크랙이거나 버그지데우스엑스마키나. 그럼에도 사비나는 온 힘을 다해, 끝없이 저항함. 키치에 잠식당하지 않고, 오히려 키치의 이면을 경멸하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키치의 안락함(특히 ‘행복한 가족’) 속으로 추락하고 싶은 욕구를 느낌. 하지만 그이는 <참존가>의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키치로부터 벗어나는 중임. 다른 주요 등장인물들이 (키치의 전형 같은 묘비명에 속박된 채) 생을 마감한 순간까지도. 나는 독자가 사비나의 배신을 *반드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함. 이건 마치 그이가 어떤 방식으로 미술 작업을 계속하는지와도 맞닿아 있음. 그이는 키치가 거짓말이란 걸 처음부터 알고, 거기에 매료된 인물임. 사비나가 소비에트-사실주의-파시즘을 강요당하던 학생 시절에 그린 그림 이야기를 보면 대략 이해할 수 있음.

“이 그림은 망친 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맘에 들더군. 그 공사장이 진짜가 아닐 뿐 아니라 눈속임용으로 그려 넣은 낡은 무대장치 같았고, 붉은 물감 자국은 찢어진 틈 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틈을 확대해서 그 뒤에서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놀이를 시작했어.” (p.114)

    현대인들이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연기하며, 그러니까 키치를 구현하며 살아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 있음? 그건 아주 구역질나는 사실이고, 그냥 사실이기도 함. 많은 사람은 무엇을 숭고하다고 여길 것인지, 그리고 다른 무언가는 더럽고 추악한 배신으로 여길 것인지 결정된(거라는 거짓말로) 세운 세계에서 살아감. 그들의 사랑, 인생, 가족, 가치관은 키치에서 태어나 키치 밖을 경험하기도 전에 키치 안으로 잠식되어 사라진다는 것. 사비나는 그것을 조롱하고 배신하며, 그 틈을 벌리는 사람임.

    근데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되게 경전 읽듯 했네. 키치라는 절대악으로부터 탈출하는 주인공 사비나…. 웅웅앵앵….. 이게 다 텍스트 읽는 법을 잘못 배워서 그렇다…… 아오 몰라….. 아무튼 그래서 결론이 뭐냐? 제 최애는 사비나입니다. 네, 그렇다고요. 끗.


    이건 사족인데, (쿤데라의 다른 저서를 읽어 본 사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소설 속 화자인 ‘나’가 작중에서 툭 하면 전면에, 아니 그냥 전면도 아니고, 영화로 치면 스크린 중앙 절반가량을 뙇 차지하고 앉아서 “이 캐릭터는 어떤 생각으로부터 나왔고…. 내가 생각하기에 니체의 영원회귀는 어쩌구…. 파르메니데스는…. 베토벤은…. 웅앵…” 하는 게 쿤데라의 문체인 모양이다. 이쯤 되면 전지적 작가 시점도 아니고 그냥 군주신 아니냐 -_-; 다들 읽으면서 이거 괜찮았나? 난 진짜 얘가 이럴 때마다 몰입이 와장창 깨져서 진짜 미쳐벌이는 줄 알았음. 물론 화자가 현실 세계의 쿤데라 자신은 아니지만(사실 다른 저서를 읽어 본 사람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맞는 거 같음 -_-;), 이건 뭐 내가 읽는 게 <쿤데라의 4가지 그림자>도 아니고…. 다른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진짜 치밀해서 와 쩔어 준다, 하고 감탄하다가 갑자기, 아 시발 근데 이거 쿤데라지 하는 생각이 들어오면서 와장창-_- 되는 경험을 자꾸 함. 물론 쿤데라의 이름에 엄청난 아우라가 있고, 저항과 망명으로 이어진 그의 인생사를 보며 경의도 느끼지만, 그래도 솔직히 내 입장에선 쿤데라가 어쨌든 그냥 먼 나라 작가라 그런지, 이 사람이 작중의 무대를 헤집는다 싶은 장면에서는 아 진짜 왜 저래, 싶어지는 그런 맘이 든다는 것임. 물론 그럼에도 500페이지가 넘는 장편을, 연달아 2독까지 하게 만들 만큼 매력을 뿜어 내는 작품이 <참존가>이긴 함. (할아버지 마이크 볼륨 좀 줄여 주세요) 다음에는 <농담>을 읽을 계획인데, 솔직히 이런 점이 제일 걱정 됨 -_-ㅋㅋ 과연 이번만큼 폭 빠져서 읽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