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과 6펜스

시리즈 세계문학전집 38 | 서머싯 몸 | 옮김 송무
출간일 2000년 6월 20일

달(Moon)은 예술가가 추구하는 정신적 이상, 현실 너머의 영원히 닿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영역을, 6펜스(당시 영국에서 유통되던 가장 낮은 화폐단위)는 인간인 이상 묶여있을 수밖에 없는 현실, 돈, 세속의 겉치레와 가식 등 육체적 한계를 의미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물체이지만, 서로 정반대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두 가지를 하나로 엮어 놓은 ‘달과 6펜스’보다 이 소설에 어울리는 제목이 있을까?

평범한 은행원이자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사내로 여겨지던 찰스 스트릭랜드는 돌연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다. 소설 속 화자인 ‘나’와 스트릭랜드의 아내를 비롯해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아 도망친 것이라고 수군댄다. 스트릭랜드의 아내로부터 말을 전하기 위해 파리로 가 스트릭랜드를 만난 ‘나’는 생각과 전혀 다른 광경을 목격한다. 고급 호텔에서 젊은 여자와 시시덕거리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스트릭랜드는 사실 더럽고 낡은 호텔방에 홀로 묵고 있었고 여자는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그런 스트릭랜드에게 ‘나’는 묻는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부인을 버렸단 말입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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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릭랜드는 40이 넘어가는 나이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 하나로 모든 것을 버리고 파리로 온 것이다. 계속 이야기를 나눴지만 도저히 스트릭랜드를 이해할 수 없던 ‘나’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다. 스트릭랜드의 눈에서 느껴지던 뜨겁고 이해하기 힘든 열망 만을 머릿속에 남긴 채. 그 후로도 ‘나’의 시선으로 스트릭랜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는 자신에게 관여하려 하는 다른 사람을 무례할 만큼 무시하고 경멸하며 오로지 그림에만 모든 것을 쏟기 시작한다. 스트릭랜드를 천재로 여기며 지극히 그의 병간호를 하고 그림을 팔아주려 노력하던 화가 스트로브, 스트릭랜드의 병간호를 해주다 남편인 스트로브를 저버리고 스트릭랜드에게 모든 것을 바친 스트로브의 아내 블란치, 그나마 가까이 지내던 화자인 ‘나’에게까지도 스트릭랜드는 어떤 호의도 보여주지 않는다. 꾸준한 경멸과 비웃음을 보일 뿐. 결국 스트릭랜드의 무시와 경멸에 블란치는 음독자살을 하게 되고 너무나 사랑하던 아내를 스트릭랜드에게 빼앗긴 스트로브는 아내의 생명까지 스트릭랜드에 의해 잃게 된다. 그 광경을 모두 목격한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윤리적 비난을 퍼붓지만 그는 일련의 사건에 관심조차 없었고 뉘우치기는커녕 오히려 날카로운 반박을 던진다.

“당신이 정말 블란치 스트로브의 생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고 있긴 하오?”

스트릭랜드의 질문에 ‘나’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다. 한편 스트로브는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겪고도 스트릭랜드의 그림을 보고 이 자는 진정한 천재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스트릭랜드에게 함께 네덜란드에 가지 않겠냐는 제안을 할 정도로.

주변의 모든 이를 집어삼키는, 오로지 자신의 이상에 다다르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친 스트릭랜드는 타히티로 떠나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나’는 사후 유명한 화가가 된 스트릭랜드의 흔적을 찾아 타히티로 향하고, 그곳에서 스트릭랜드를 알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스트릭랜드가 숲 속에 틀어박혀 그림만을 그리던 이야기, 원주민 여자와 결혼해 원시림 속에서 살아가던 이야기, 문둥병에 걸려 죽어가던 스트릭랜드의 모습 등등. 그런 ‘나’에게 스트릭랜드의 죽음을 보았던 의사 쿠트라가 스트릭랜드의 마지막 그림에 대해 말한다. 그 마지막 그림은 스트릭랜드가 살던 오두막집의 벽과 천장 전체에 걸쳐 그려져 있었으며 미술에 큰 조예가 없던 쿠트라 의사는 그 그림을 보자마자 탄성을 내뱉는다.

“맙소사, 이건 천재다.”

‘나’는 스트릭랜드가 마침내 자신이 끝없이 추구하던, 이를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던 그 어떤 것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한 예술가의 일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폴 고갱이 모델이다)의 인생을 관찰자인 ‘나’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속에서 펼쳐지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을 보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40이 넘어가는 나이에 불쑥 그림을 그리겠다며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이전까지 무뚝뚝하고 재미없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던 그가 모든 사람들을 비웃음과 경멸과 무시로 대하기 시작한다. 게다가 자신을 도와준 스트로브의 아내를 빼앗고 심지어 그녀를 자살로 몰아넣는다. 그런 일을 벌이고도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 스트릭랜드.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사회의 윤리적 잣대를 가지고 비난하려 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서 그러한 잣대를 스트릭랜드에게 적용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주변의 어떤 것도 돌아보지 않는, 자신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스트릭랜드의 무식한 집념에 질려버린 것일까? 아니면 감화되어 버린 것일까?

스트릭랜드는 철저히 달의 세계, 정신적 이상을 추구하는 자였고 ‘나’와 스트로브, 블란치, 그 외의 모든 등장인물들은 6펜스의 세계를 추구하거나 혹은 적어도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달의 세계에 빠져 있던 스트릭랜드에게 6펜스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모든 이들은 한심하게만 보였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점 때문에 6펜스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잣대를 스트릭랜드에게 들이댄 ‘나’는 오히려 반박을 당한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자에게 같은 판단의 잣대를 들이대려는 꼴은 상어에게 사람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그로 인해 ‘나’는 스트릭랜드에게 사회의 윤리적 판단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될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스트릭랜드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스트릭랜드는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으려 했고 세속과의 연을 철저히 끊고 싶어 했다. 돈도 그림에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 데 필요한 돈과 최소한의 식비 정도만 해결했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그림에 쏟았으며 스트로브에게도, 블란치에게도 자신을 도와달라는 말 한 번 한 적이 없다. 그들이 먼저 나서서 그를 돕고 보살피고 스스로 파멸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범인은 잡으려 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는 예술가의 열망이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있는 걸까? 한 번쯤 그런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의 의미는 사회의 모든 가식과 겉치레를 거부하는 강렬한 캐릭터, 찰스 스트릭랜드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과감히 주변의 시선과 은행원이라는 직위, 부를 모두 내던지고 가난한 화가의 길로 뛰어든다. 그 뒤로 한결같이 6펜스의 세계를 거부하고 달의 세계를 쫓는다. 그 모습에서 독자들은 기이한 열망과 유혹을 느끼게 된다. 분명 사회의 시선에서 보았을 때 무례하고 비윤리적이기 그지없는 자이지만 왠지 모르게 매혹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의 규범과 윤리 속에 갇혀 있다. 주변에서 이게 맞다고, 이게 좋다고 하니까, 이렇게 하면 이상하게 쳐다보니까, 이런 옷을 입으면 상황에 맞지 않으니까. 그 때문에 우리나라 공무원 시험과 대기업 공채 경쟁률은 끝도 없이 올라가고 지하철을 타면 모두가 똑같은 롱패딩을 입고 있으며 주변의 시선 때문에 혼자 밥을 먹기조차 힘든 경우도 있다. 알게 모르게 여러 가지 실들에 묶여 있는 우리는 그 실들을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잘라내고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걸어가는 스트릭랜드를 보고 마음속 어딘가에서 동경의 감정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내가 이것까지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되나? 난 이 일이 하고 싶은데 돈 때문에, 부모님의 기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 일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들의 시선을 어디까지 신경 써야 할까? 사회 윤리와 도덕은 어디까지가 합리적이고 어디까지가 비합리적인 걸까? 그 선은 어디에서 시작되고 내가 주의해야 하는 건 어느 선부터일까? 물론 스트릭랜드의 비윤리적인 행동이 모두 용납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소설을 읽은 독자들이 사회 규범을 아무런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따르는 데에서 한 발 나아가 과연 이 규범이 합리적인가,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가치가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소설에서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성 인물들의 서사와 묘사였다. ‘달과 6펜스’ 속에서 여성 인물들은 철저히 6펜스의 세계에 속해 있는 자로 그려진다. 원대한 꿈과 이상을 가진 남자를 방해하는 방해물, 남편을 속박하려 드는 귀찮은 존재, 한없이 세속적이고 속물적인 미련한 자들.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봐도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여성을 깎아내린다. 특히, 스트릭랜드가 여성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다. 물론 이와 같은 여성 비하적인 이야기가 많은 고전 소설들(운수 좋은 날, 날개 등등)에서 보이기는 하지만 이런 소설들을 읽을 때는 그 문학의 가치와 별개로 여성 비하의 시선에 주의해야 한다.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소설 속에 나타난 여성 인물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과 편견을 이유로 글 자체의 문학적 가치를 무시해서도 안 되고 고전 소설들이 가지는 문학적 가치를 가지고 소설 속 여성 비하의 서사를 덮어버려도 안 된다. 그 두 가지를 전혀 별개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달과 6펜스’ 속 여성들에 대한 묘사와 그들의 수동적 서사는 분명 부족한 사고와 잘못된 편견의 결과이다. 그러한 비판적 관점을 견지하는 동시에 한 예술가의 생애를 이상과 현실의 세계의 대비를 통해 매혹적으로 그려낸 문장들을 음미할 수 있다면 좋은 독서가 되지 않을까.

서머싯 몸은 매혹적이고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한 예술가를 만들어 냈다. 모두가 닿을 수 없으리라 생각하기에 비슷하게 생긴 6펜스로 만족하고 마는 세상에서 끝없이 달을 쫓던 그 예술가는 결국 달에 닿고 말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6펜스를 손에 쥔 채 그의 그림에 매혹당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달의 한 조각을 보여주는 그의 그림에.